8화> 아무도 모르게
“장철중. 오랜만이다. 미안해, 내가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
양정태가 먼저 웃으며 장 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 관장은 양정태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 옆에 서 있던 까무잡잡한 얼굴에 코가 오뚝한 여학생이 90도로 인사를 했다.
“강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양정태는 노골적으로 강율의 머리부터 아래까지를 쭉 훑었다. 강율은 몸에 딱 달라붙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신체 조건이 좋았다.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고. 강율의 봉긋하게 올라간 가슴에는 서문여고라고 선명히 찍혀 있었다. 양정태는 강율을 보더니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체육을 하기보다 연극 영화과 쪽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 학교에 오고 싶다던 애가 얘야? 역시. 요즘 젊은 애들은 발육이 남달라. 처녀라고 해도 믿겠다. 우리 때랑은 영 다르단 말이야. 너무 밋밋했잖아. 하하하.”
양정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던 손으로 강율에게 악수를 청했다. 강율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자 양정태는 장 관장이 보이지 않게 검지로 율의 손바닥을 스윽 쓸었다. 순간 율은 움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 관장은 양정태의 말에 기분을 맞추어주며 웃어댔다. 양정태도 강율에게 은밀한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셋 중 기분이 나빠진 건 강율 뿐인 것 같았다.
강율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름 가고 싶은 대학에 미리 견학을 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부풀어 있었다. 무단으로 결석한 유나를 찾는 것도 포기하고 이곳을 온 거였는데! 하긴 캠퍼스에 체육관에 교정을 거닐 때만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이건 아니지! 양정태와 악수를 나누자마자 율은 순식간에 똥통에 팍 처박힌 기분이 들었다.
율은 분을 참으며 겨우 장 관장 옆에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장 관장은 율의 마음도 모른 채 준비해 간 건강음료를 양정태에게 내밀었다. 형님이 무척 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뭐야? 이 변태 자식! 관장님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나가는 건데!’
율은 입술을 실룩거리다 양정태의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깔끔했다. 책꽂이에는 체육서적과 논문들로 가득했고 책상정리도 완벽했다.
'겉으로는 멀쩡하구나?'
율은 양정태를 바라보며 연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정태와 장 관장은 서로 학교 다닐 때 했던 경기와 교수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렇게 추억 팔이를 어느 정도 하며 장 관장은 대학의 입시 정보를 몇 개 얻어냈다. 그리고 슬슬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마무리는 율의 등을 누르며 양정태에게 다시 인사를 시키는 거였다.
“하하 얘가 숫기가 없어서! 형님, 그럼 저는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바쁘시겠지만 청소년 킥복싱대회 오실 수 있으면 꼭 오세요. 이 아이가 거기 출전합니다.”
율은 성의 없이 인사를 한 뒤 장 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강율이 막 건물 밖으로 발을 들이는데 장 관장이 기다렸다는 듯 강율의 뒤통수를 팍 때렸다. 순간 강율의 몸이 계단 밑으로 확 쏠렸다.
“아! 왜 때려요?”
강율은 휙 돌며 장 관장을 쏘아보았다. 장 관장은 강율 보다 더 성난 눈빛으로 맞받았다.
“너 태도가 왜 그래? 방금 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알아? 네가 갈 학교 교수한테 첫인상을 그렇게 배려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내가 운동은 예의범절이 우선이라고 몇 범을 말했어?”
강율은 전에 없이 장 관장을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이 학교 다신 안 올 거예요. 나도 교수 첫인상 더럽게 나빴단 말이에요.”
반사적으로 장 관장의 손이 또 올라왔다. 이번에는 강율이 잽싸게 피했다. 그리고 앙증맞게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자 장 관장이 정확히 강율의 정강이를 찼다. 강율은 허리를 꺾어 정강이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이씨. 저 교수 변태 싸이코란 말이에요!”
장 관장의 손이 이번에는 강율의 입을 막았다.
“너 미쳤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강율은 장 관장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들으면 어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율은 장 관장에게 양정태의 악수를 재연했다. 그러자 장 관장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양정태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었다. 율을 바라보는 시선도 맑지가 않았었다. 장 관장은 교정을 벗어나며 율에게 한 마디 던졌다.
“여기 교수가 저 양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뭔 상관이야? 그런 것 때문에 네가 좋아하는 학교 포기하면 안 된다!”
율은 장 관장의 뒤를 쫓아가며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가는 눈을 하며 물었다.
“근데 관장님 진짜 저 변태 또라이랑 친했어요?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는데…….”
율은 장 관장에게 뒤통수를 한 대 더 맞았다.
며칠이 지났다. 이제 TV에서는 ‘살려줘’ 영상얘기로 토론회까지 만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성범죄 이야기가 주제였지만 어김없이 영상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뭐 특별할 것도 없었다. 말 하는 사람들만 바뀌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다.
할은 며칠째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는 어김없이 유나가 나타나 도망가는 자신을 뒤쫓았다. 할은 그때처럼 있는 힘껏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뛰면 뛸수록 뒤를 쫓는 유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뿐이었다. 꼭 뒤로 감아놓은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몸은 분명 앞을 향해 달리는데 방향은 자꾸 뒤로만 간다. 결국 유나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다.
"살려줘!"
그녀는 늘 똑같이 말한다. 하지만 꿈에서도 과거나 현실에서도 할은 유나를 도와줄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할 수 있는 건 유나 모르게 흑기사 역할을 해주는 것뿐이다.
땀범벅이 된 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패드를 켰다.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를 찾아 들었다.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하지만 귀에는 여전히 유나 엄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너 유학을 가거나 아니면 한국에 살고 싶으면 진짜 아무도 모르게 살아야해. 그래야 하는 거라고!”
유학이라니... 할은 유나와 떨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할이라도 외국까지 유나를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이야 잘 팔려나가는 닭들 덕에 더 잘 나가는 부모를 믿고 아르바이트 하나 없이 화실까지 다니고 있지만 그런다고 유학을 가라고 덥석 돈을 내줄 부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세간의 관심 속에 유나를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은 익숙한 손짓으로 살려줘 동영상 사이트를 들어갔다. 며칠 전 생성된 ‘살려줘’ 영상 카페에서는 피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사실 2014년에 학교를 전한 간 고등학생의 수는 얼마 안 될 터, 유나의 사진이 올라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할은 카페에 올라온 사진을 뒤지다 식겁했다. 이럴 줄 알았다! 화면에는 유나의 중학교 졸업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새하얀 얼굴. 웃고 있는 표정. 누가 봐도 유나는 그놈의 걸 그룹 메인보컬을 닮았다.
사진 밑에 누구든 주인공이 현재 무슨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했는지 댓글로 물으면 꼬리 물기 식으로 답이 금방 달렸다. 예쁜 애들일수록 그 수는 더 많았다. 몇몇 네티즌들은 유나의 사진 밑에 그냥 얘였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적혔다. 이런 상놈의 자식! 할은 그 밑에다 상욕으로 댓글을 달다 말았다. 이러면 유나의 사진 조회 수만 더 올라갈 뿐이다.
할은 유나의 사진을 보다 다시 맨 위의 강율의 사진을 보았다. 강율의 사진도 조회 수가 꾀 많았다.
그렇다면……. 할은 이게 최선이라 믿으며 강율 사진 밑에 댓글을 달았다.
저 강율이란 애 말이야. 얼굴이랑 킥복싱으로 좀 주목 받는 애인데 그거 그 사건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거라며?
할 밑으로 꼬리 물기가 시작됐다.
→나도 알아! 쟤 봤어. 섹시하지 않냐?
→그러고 보니 불 끄면 완전 S양인데.
→S라인이라 S양이라며?
할은 아이패드를 닫았다.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