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변했지만, 세계는 바꼈지만, 아직 그 장면이 떠올라.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너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봤던 장면이.
그래도 넌 기억하지 못 할테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세계가 알고 있던 일을 고작 두 명만 알게 된 거니까.
다시 처음부터 연기할게.
너를 만나기 전으로.
너와 만나기 전의 나는 혼자였지. 의사소통도 어려웠고 잘 웃지도 않았지.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세계를 바꾼 건 너였어.
고독하게, 지독하게 살아왔던 나의 인생에 씨를 뿌리고, 싹이 트며 싱긋 웃어주었지.
그리곤 시간이 지나 꽃이 피기 시작했어.
너의 웃음을 보고 난 후 부터.
너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난 후 부터.
무겁지만 가벼운 마음을 들고 일어섰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먹을 깊게 쥐었다. 이젠 익숙해진 시간에 일어났다. 익숙해진 교복을 하나 둘 입기 시작했다. 넥타이도 혼자서 메고, 마이는 다시 커져 있는 듯 했다.
익숙한 길을 걸었다. 나를 비추는 햇빛을 만끽했다. 오늘은 새로울 거라고, 오늘은 늘 하던 것과 같을 거라고.
매일 타던 버스를 탔다.
그곳에 비춰진 햇살은 따뜻하고, 따뜻해서 내 기분과 같았다.
버스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 중엔 안수호도 있었고 김지민도 있었다. 오랜만에 본 김지민의 얼굴은 엄청 어려보였다. 안수호는 어제까지의 일을 기억하는지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 인사하였다. 그리고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오랜만에 떠오른 옛 추억에 젖어 있었다.
버스가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 만나겠지.
아름다운 너와.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에서 다시.
처음으로.
“너도 입학 하는 거야? 무거우니까 우산은 네가 들어줘~”
다시.
봄이 시작되었다.
...
“야~ 진설~ 좀 도와줘"
“그래"
이제 익숙하다.
앞치마를 입고 있는 공서진도, 요리하고 있는 공서진도.
물론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공서진도.
공서진은 이미 자기의 꿈을 이뤘다.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난 원하는 직업은 얻지 못했지만 직장은 가지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이다.
고등학생 때 나에게 계속 다가와준 공서진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제 난 행복하니까.
공서진과 만나고 났으니 행복해졌으니까.
매일 아침 공서진이 해준 밥을 먹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행복한 매일이 나를 더욱 전진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안수호와 만났다.
그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고 당당하게 나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행복해 보이네"
그 자리에서 어깨를 펴고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 유일한 꿈이 이뤄진 건데"
안수호가 웃었다.
그리고 지갑을 치켜 세우며 말했다.
“한 잔, 어때?"
“지당한 말씀"
어른이 된 후로 처음으로 안수호와 술을 먹었다.
중간중간에 안수호가 일어나 종종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어깨가 넓고 키가 큰 건장한 남성이 하나 들어왔다.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 진설. 오랜만이네"
“그러게... 엄청 커졌네..."
“그렇지..?"
라며 김지민이 나에게 웃었다.
그 잔잔한 미소에 옛날이 떠올랐다.
그 시절 그저 웃던 우리가.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우리가.
또 다시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