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에게 한심하다는 둥,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앞으로는 이마저도 듣지 못하고 또 서로 오해를 하며, 또 긴 숨막히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통이 분명히 올 것이다. 정말 진퇴양난인 마누라님 제발 오해 받을 곳에는 뒤따라 가지 마세요. 이선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빙그레 웃으며 기도하면서 뒤따라 걸었다.
아내도 그렇고 자기도 주변 사람들의 영향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직자가 된 김인태도 떠올랐다.
“자기야! 빨리 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왜? 무슨 걱정이 있어?”
세상 모든 고통을 해탈한 사람처럼 또 맑은 목소리로 손짓을 하고 빨리 오라고 했다. 봄소풍 가는 발걸음으로 획 돌아서서 묻고는 바로 돌아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당신 걱정한다. 웃음 전도사 같았다. 방금 했던 자질구레한 상념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소주를 조금 곁들어 저녁을 먹었는데도 아직 해가 조금 남아 있었다. 갑자기 천명구가 떠올라 물었다.
“여보! 천사장님한테 가 볼까? 간 김에 책도 좀 사고.”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한 순간에 세상을 가린 것 같았다. 아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 급변하는 세상에 누구보다도 잘 적응하는 소애리 아닌가?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 아니었다. 이선근이 생각하는 아내는 굉장히 명석한 사람이었다. 단지 흠이 있다면 배려심에 오지랖이 포함된 게 조금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게 문제였다.
“그래! 살 필요까지야! 빌려오면 되지!”
이선근은 잠시 종잡을 수 없었다. 내가 술기운인가? 저 사람이 술기운인가? 아무튼 기분이 좋아서 애리는 버스를 고집하지 않고 대로변에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끝없이 조잘대는 소리에 기사가 처음에 웃으며 성격이 밝아서 좋다고 하다가 라디오를 크게 털었다. 이선근에겐 아주 만족한 기사였다.
천명구의 건물에 거의 다 와서 내릴 무렵에 이선근이 미간이 자동적으로 찌그려졌다.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앞치마를 둘러맨 주두희가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하필 그때 앞에 있는 택시에서 손님이 내리는 바람에 이선근은 주두희를 일분 정도 볼 수 있었다.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죄책감도 같이 들었다. 골프 공만 던지지 않았더라면 식당에서 저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자들 옆에서 끼어 앉아 술을 얻어 마시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멀뚱히 보고 있었다. 그때 주두희가 한 손에는 술잔을 한 손에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바로 후다닥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급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애리가 “에이 씨!” 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보면서 꺼버렸다.
“왜? 누군데?”
“당신은 몰라도 돼! 재수없는 년이야!”
두 사람 사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지금 주두희가 허둥대면서 전화를 하는 모습과 욕을 하면서 휴대폰을 꺼버리는 아내를 보면 주두희가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 지 쉽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선근은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릴 때 주두희가 앞치마를 입은 채로 밖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이선근은 고개를 꺄우뚱했다. 저 여자의 눈은 전신에 다 붙어 있나?
그 사이 택시는 멈췄고 애리가 내리려고 했다. 아내가 주두희와 마주치는 걸 더 싫어하겠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만약에 주두희가 이 택시를 타면 기사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 질 수도 없다. 사람은 어떻게 믿나? 일단은 아내가 내리는 걸 지연시켜야 했다.
“택시 비 내야지!”
“자기가 내!”
“카드뿐인데!”
“카드도 됩니다.”
이런 눈치 없는 양반아! 이선근이 주머니를 뒤척이는 사이 주두희는 택시를 잡으려고 계속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애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이선근을 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렇게 주문을 외며 이선근은 백미러로 주두희를 보고 있었다. 그때 주두희를 보고 있던 기사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손님이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이선근은 기사의 마음을 무시하고 안심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드를 내밀었다. 옆으로 지나치는 택시 속의 주두희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애타게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두희가 탄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쯤 이선근 굼벵이처럼 차에서 내려 애리 손을 잡고 천명구에게로 갔다.
그때 천명구는 허병식과 안도경 매형을 앞에 두고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서점도 독서실도 안 차렸을 건데 본전도 못 찾고 있어. 이 사람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울먹이고 있었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한글도 모르는 제가 도서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나 했겠어요. 처남이 뒤늦게 공부 바람이 들어 도서관을 차리고 싶었겠죠. 그런데 지난번에 처남한테 건물을 판 줄로 알았는데 아직 형님이름으로 되어있더군요. 팔기 싫으면 계약금 그냥 돌려주세요.”
천명구가 건물이 내리 앉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알아듣지 못하게 옹알거렸다.
“이 사람아! 내 평생을 벌은 돈으로 지은 건물인데 내가 어떻게 쉽게 팔겠나? 지금만 더 기다려주게. 도서관과 독서실 준비하는 데 들어 간 돈 본전은 건져야 하지 않겠나. 허사장 자네가 인테리어까지 다 했으니 얼마나 들어간 지는 제일 잘 알 거 아닌가? 책만 해도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 간 줄 아는가? 3층 빌딩 하나 지을 돈이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게나!”
안도경의 매형이 경로우대란 그런 말은 아예 모르는 듯이 ‘개똥 같은 소리를 하고 쳐 자빠졌네’ 란 표정 중 가장 심한 표정으로 흘겨보며 야단치듯이 말했다.
“그럼! 계약금은 왜 받았습니까? 그리고 그 책도 처남이 전국의 헌책방을 다니면서 건축자재 고르듯이 골라온 책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무슨 3층 빌딩이나 들어갔습니까? 처남한테 차 기름값도 안 줬다면서요?”
천명구가 신음소리를 낼 동안 한번 더 윗입술을 코끝까지 붙이며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천명구 얼굴에는 창피하고 난감한 표정밖에 없었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신 있게 도장을 꽉 찍어놓고 돈도 받고, 잠시만, 잠시만 한지만 벌써 언제입니까? 이러다가 건물 무너질 때 넘겨 주실 랍니까? 도서관과 독서실 싹 뭉개고 다시 닭장으로 채워드릴까요? 병식이 형! 조금 싸게 해드리죠! 이것도 저것도 싫으면 계약금 돌려주십시오. 저도 지저분하게 이러기 싫습니다. 형님한테는 그 삼십억이 무슨 돈입니까? 한달 드릴 테니까 계약금을 돌려주던가 건물을 넘기던가 하십시오.”
천명구는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야 이놈아! 그 돈은 인테리어 한다고 허병식이가 다 빼갔다. 이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