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나는 친구가 어디 있어. 예전에야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칼 퇴근이라 하던데”
“내가 퇴근이 어디 있나? 일감 없으면 일찍 집에 가는 거지. 네가 안 부르면 더 일찍 집에 가고. 너하고 자주 어울리면서 빚을 갚은 속도도 느려졌다”
“허허! 그래! 그러면 내가 네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말이네. 허허!”
수리가 눈살을 살짝 찌푸려 영철을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게 아닌데. 허허. 그나저나 즐기며 살자. 오늘도 마찬가지고. 아등바등 이란 말에는 휴식도 포함돼 있다고 본다. 오늘은 너나 나나 주머니 안 털리려고 아등바등 치려 가는 거 아니겠어”
산 속에서 소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걸 봐서는 가을이 지나가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수리와 영철은 아직 이런 계절에 들어 갈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주변에서는 맞다 고 한다. 지금이 조그만 더 지나가면 수리가 염려했던 나이가 곧 다가온다. 이런 걱정들은 수리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살아 숨쉬던, 곧 임종을 앞두던 누구나 에게 해당되는, 그들의 뇌리에서 단 일초도 떠나지 않는 잠재된 생각들이다. 염려했던, 걱정했던 건 다리 힘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는 건, 몸을 지탱해줄 받침대가 흔들거린다는 의미다. 그건 곧 지갑에 일원 땡전 한푼 없이 복잡한 도시, 서울 어느 한 도로 가에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는 굳이 가난한 사람만이 경험하는 건 아니다. 모든 이의 부러움의 대상인 돈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돈 많은 갑부도 일원 땡전 한푼 없이 길거리에 덩그러니 서 있을 때도 있다. 날치기를 당했거나 아니면 깜빡 잊고 지갑을 집에나 어디에 두고 갈 때도 있다. 물론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택시비를 주면 된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당황하고 앞이 캄캄하다. 이와 달리 반대의 사람들. 집에 가도 돈이 없는 사람들. 굳이 경험을 해보지 않고도 상상이 갈 것이다. 앞이 캄캄하다.
가끔 우리는 깜빡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급히 출장이나, 꼭 참석해야 할 경조사나, 빠져서는 안될 어디를 갈 때, 그것도 장거리에 갈 때, 고속도로를 이용했다고 보자. 한참을 달리다가 ‘아차’ 노란 불이 보일 때 우리는 마음이 급해진다. 출발하기 전에 과연 우리는 기름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름을 넣지 않고 출발한 이유는 제각각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지금 우리네 삶은 나만의 여유를 가지게 용납해주지 않는다. 철저히 준비해 둔 계획을 실행할 때 경험하게 되는 의외의 변수 중에는 당사자의 간과에서 기인하는 경우와 주변의, 전혀 예기치 않은 경우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변수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게 우리네 삶이고 이렇게 우리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떠나기 전에 그때 그랬을 걸이란 생각을 가진다고 본다. 물론 예고 없이 불행히도 갑작스레 떠나는 이도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떠나는 이들은 그 떠날 시점이 뒤에 보이는 사람들의 경우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의학적 판단을 들은 사람들의 경우에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동생 신랑인 박서방. 박영철이가 운전을 하고 이 놈의 친구이고 형님인 마수리는 옆에 앉아 한 시절을 마치고 떠나는 산과 들에,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잎사귀들을 쳐다보며 지난 시절을 잠시 떠올린다. 한가지 분명한 건 지금 이렇게 살기 위해서 지난 시절에 그렇게 아등바등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래 전 일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부둣가에서 어떤 사람이 수리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생명을 연장하려고 했다.
수리가 일을 했던 곳은 바다였다.
잠시 설명을 하자면 배로 실어 나르는 화물의 품질과 수량을 검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수리 손에 매달린 사람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이 배에서 육지로 뛰어 내리는 순간에 배가 파도에 꿀렁거려, 육지에서 아주 조금 뒤로 바다로 가버렸다. 거리로 치자면 한 걸음 정도. 그때 그분은 육지에 발을 디디려고 폴짝 뛰는 순간이었고 그 분의 발끝이 육지에 닿기 전에 배는 파도에 실려 바다로 살짝 벗어난 후였다.
그분은 그대로 바다로 빠져 버렸다.
그때 그 부둣가에는 배를 부두에 접안 시키기 위해 밧줄로 배를 육지에 묶는 작업을 하는 인부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을 배 앞 쪽에 가 있고 다른 한 명은 배 뒤 쪽에 가 있고 그 분을 건져 낼 사람은 수리뿐이었다. 수리는 군대서 상륙을 위해 수영을 배웠다. 그러나 그건 전쟁을 치르기 위해 배운 수영이라 전투적으로 뛰어 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건 배가 다시 꿀렁거려 부두에 붙는 순간에는 두 사람 모두 압사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수리는 군대에서 배운 전투용 인명구조 방법을 발휘했다.
우선 눈에 띄는 밧줄을 집어 들어 매듭부터 엮었다.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은 미끄럽다. 밧줄도 마찬가지다. 매듭짓지 않은 밧줄을 던져 줘도 그 분은 밧줄과 바닷물에 적혀진 손이 미끄러워 절대로 육지로 올라 올 수가 없다. 그런 판단에 매듭을 지어 던져 주었고 그분은 그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런데 올라 오지를 않았다. 그냥 매달려만 있었다. 그때는 젊었다. 낑낑대며 겨우 건져 올린 그 분을 보고는 매달려만 했던 이유를 알았다. 할아버지였다. 그 후에 수리는 반대로 그분과 마찬가지, 똑 같은 상황에서 바다에 빠졌다. 그때 부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밧줄을 던져 주었다. 바다에 빠진 수리는 허우적대며 화를 냈다.
“야! 임마! 매듭지어 다시 던져”
그렇게 살아났다. 그때 깨달았다. 떠나야겠다 보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창업을 하자. 나이가 들면 근력은 당연하고 의욕도 떨어진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하나의 잠재된 계획 속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나는 저 나이에 저렇게 살지 않는다’ 가 창업을 해야겠다 가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그 이유를 현실에서 실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먼저 돈!
돈은 구하기 쉬웠다. 그때까지는 모아 둔 돈도 제법 있었고, 아파트도 있었고, 신용도 좋았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창업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가 개떡 같았다.
창업을 위한 자격조건. 이건 그 업계의 터줏대감들이 막강한 권력을 발휘한 족쇄였다. 그래도 그 족쇄에 채워져야 다리에 힘 빠지고 난 뒤에 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는 얼마 안돼 항복하고 그 세계를 떠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들은 이미 그들보다 더 막강한 권력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권력은 돈보다 더 무서웠다. 이들에게 항거하는 세월이 아까웠다.
그런데도 버티고 있다가 나오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같은 업종에 있는, 일하면서 만나서, 형님이 된 아는 형님 탓이었다.
그 형님이 늘 하는 얘기는 ‘떠나고 싶다’ 였다. 수리는 그 형님의 전철을 밟았다.
그 형님도 나이가 들어서 밧줄을 잡을 자신이 없다고 하고는 터줏대감이 채워둔 족쇄 속으로 들어가 창업을 했다. 창업을 하고 얼마 안돼서 이 분은 정말로 떠났다. 그 전에 수리는 그 형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님은 정말 이기적입니다. 형님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밧줄을 잡기 싫어하면서도 젊은 친구들에게는 왜 밧줄을 잡게 합니까?”
그때 그 형님은 대답대신에 발로 수리 똥구멍을 걷어차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야! 임마!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 이 것 뿐인데…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떠나?”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리는 어느 부둣가에서 크게 화를 냈다. 일하러 배에 가다가 방파제에 서서 바지를 내렸다. 멀리 동해 바다로 시원하게 갈리고는 바지를 올리려다 눈 아래에, 방파제 속에, 찰랑이는 바다 물 속에, 바다 물 속에 고개를 쳐 박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부두 사무실로 꽁지에 불이 나게 뛰어갔다. 사무실 앞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여자도 보였다. 순간적인 직감에 그 시체의 ‘아내’. 부두 담당자에게 다가가 귀속말로 저기 시체 있다고 했다.
그때 이 사람이 무슨 산삼이나 발견한 것처럼 크게 고함을 질렀다.
“시체 찾았다”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몸에는 뼈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