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걸은 뒤로 주춤 밀려나 벽에 등을 기대고 놀란 눈으로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그때 주먹이 한대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인걸은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피하려는 몸짓이 아니었다. 너무 무서워서 주저앉은 것뿐이었다. 임정훈의 주먹은 벽을 그대로 세차게 가격했고 그의 인상은 곧 현실이 될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을 인상으로 일그러졌다. 온몸을 전율로 뒤덮는 주먹과 손목의 고통스런 통증이 그를 더 분노하게 했다. 차라리 한대만 맞았으면 인걸은 더 이상 힘쓸 일이 없이 고통 없이 저 세상을 가거나 운 좋게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한 명은 악을 쓰고 두들겨 패려 하고 한 놈은 기를 쓰고 피하려고 했다. 젊었을 때 아무리 싸움 꽤나 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여자들처럼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듯이 씨름하듯이 부둥켜 안고 싸운다. 하나의 힘겨루기다. 특히 요즘 세상엔 먼저 주먹질을 하는 사람이 벌금을 더 낸다. 다행이 임정훈은 벌금은 피했다. 한참을 힘겨루기를 하다가 두 사람 모두가 팔은 물론이고 다리에도 힘이 빠졌다. 계단으로 데굴데굴 굴러 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우당탕, 와당탕, 이 새끼, 저 새끼, 꽈 당 탕, 쾅쾅, 퍽! 퍽! 퍽!’
그들의 머리, 어깨, 무릎, 팔, 다리, 발에서 나온 피는 계단을 온통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웬만하며 서로 놔줄 수도 있는데 그들은 서로를 탐욕과 성욕의 대상인 해숙이가 안겨져 있는 걸로 착각한 것만 같았다. 한 동안 아파트가 요란했다. 요즘 세상에 남의 싸움에 잘못 끼어들다가 말리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고 벌금을 낸 사람도 있다는 뉴스를 많이 본다. 자칫 잘못하던 아니던, 자의던 타의던 한 순간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도 많이 봤다. 이들도 그들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아파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런 사고가 나기 전보다 아파트가 더 조용해졌다. 유령이 살고 있는 아파트 같았다. 그들 인걸과 정훈은 계단 아래인 입 출구 문까지 굴러 나가떨어졌다. 아마 119 구급대원에 대한 배려 차원인 것 같았다. 그들이 입 출구 문 앞까지 굴러 나자빠져 멈출 무렵에 이 집 저 집 문이 열렸다. 계단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경비실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었다.
“이 새끼! 경비들! 뭐해? 당장 다 잘라야지”
베란다에 내민 머리 아래에서 나오는 이 소리만 아파트를 온통 감싸버렸다.
영철이 부부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119 구급차에 두 사람이 실려지고 있었다.
“여보! 불 난 모양이야? 해숙이 어떻게?”
은희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영철이가 허둥대고 있는 경비 아저씨에게 얼른 쫓아가 온 이유를 설명하자 경비도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차리고 무직한 연장을 들고 뛰어갔다.
먼저 초인종을 눌렸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은희가 또 전화를 건다.
“부수죠”
‘꽝! 꽝! 꽝!’
영철이가 연장을 건네 받고는 문고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해숙아! 해숙아! 정신차려! 정신차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끝없는 질주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부와 명예를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말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TV을 통해 흔히 본다. 휠체어에 실린 그들의 고개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고개를 대부분 삐딱하게 한 쪽으로 걸쳐져 있다. 마치 평생 동안 세상을 그런 얼굴로 쳐다본 것처럼 그들은 마지막 가는 그 순간에도 삐딱한 고개로 축 처져 갔다.
그리고 그들의 다리 위에 걸쳐진 덮개를 흔히들 본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절대 정의로운 길이 아니었던 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다리를 가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는 말년을 맞이한다. 구급차에 실려진 임정훈도 인걸도 유명세를 탄 사람인 척한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삐딱한 고개 짓으로, 가여운 척, 가련한 척, 모방이 아닌 위조를 하고는 병원이 아닌 영안실로 실려 가고 있다. 인생의 종점으로 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그들은 그들의 천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광경은 TV에서 너무 많이 봐서 시청자들에게 식상한 데도 그들은 가는 그 순간까지도 시대의 변천을 모르고 간다. 고인이 된, 망인이 된, 이들에게 이런 표현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마음인 줄은 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는 똑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영전 앞에서 가식의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게 가식이란 걸 같이 이 놈들 문상에 간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각이란 걸 모두 다 알고 있다.
해숙도 마찬가지였다. 신랑에게 완력과 구타로 길들여져 흉내를 내려고 한다. 그래도 해숙 곁에는 은희가 있었다. 고개를 똑 바로 세워준다.
“해숙아! 괜찮아! 병원가면 곧 나을 거야. 괜찮아!”
은희의 소망과는 다르게 머리를 칭칭 감은 하얀 붕대는 빨갛게 젖어가고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라도 그 빨간 붕대를 해숙이 자신 직접 본다면 아마 놀라서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저 세상을 떠올리면서 갑자기 오빠가 떠올랐다.
그날은 자기가 아닌 새 언니가 구급차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새 언니는 간절히 빌었다고 했다.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송장처럼 누워있어도 괜찮으니 살아서 숨만 쉬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그 소원 말고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에, 만약에, 이 친구가 새 언니가 되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만약에, 만약에, 그 언니! 오빠가 짝 사랑한 그 언니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아마 해숙이라면 그 말을 분명히 했으리라고 본다. 해숙은 누구보다도 오빠를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본인, 은희가 더 잘 알고 있다. 얼마나 오빠 마음을 가지고 싶어했으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애절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언니! 은희도 잘 알고 있다. 새 언니처럼 따듯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자기속내를 절대 드러내지 않는, 한마디로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 언니가 오빠를 먼저 좋아했다는 걸 은희만 알고 있다. 그때 마당에는 온갖 꽃 나무들이 있었다. 라일락 향기부터 시작해 눈이 오기 전까지 마당은 온통 꽃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그 언니는 오빠가 집에 없어도 항상 집에 와서 꽃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는 오빠가 오면 차가운 미소를 보내고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 언니는 꽃 향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언니는 향기 따위가 아닌 실제의 꽃을 원했다. 그 언니는 화려한 꽃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만약에 오빠가 자기와 어울리는 화려한 대학에 갔다면 백 퍼센트 그 언니가 새 언니가 되었을 것이다. 오빠가 지방 대에 간 후에 그 언니는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