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사라진다. 그림자가 사라진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곧 아침이 밝아온다. 다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느 정도 이성이 통할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밤을 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후회가 밀려온다. 그때 졸업장을 왜 위조했냐고 따질 수도 없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떠올랐다. 아침이 밝았다. 두렵다. 희망이 보인다. 헷갈린다.
건강하고 힘찬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강변을 뛰고 있었다. 등 뒤에서 올라온 아침햇살이 강물에 비쳐 눈을 부시게 했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렸다. 손가락이 미간에 간 김에 눈곱도 걷어냈다. 진흙투성이인 옷을 툭툭 털어내도 원래 옷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헛웃음을 잠시 쳤다. 정신도 원래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껍데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건 주인에 대한 배신이지.
“자식!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 콧노래도 응얼거려졌다. 흉측스런 몰골을 만들어버린 진흙이며 잡풀을 털어내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강변을 뛰었다. 방향도 조깅을 거의 마쳐가는 사람들과 같이했다. 안쓰러운 얼굴로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은 미소를 보내고 그들도 그러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아이고! 조심하죠. 다 젖었네”
어느 누구 하나 어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몰랐다. 세상이 그렀다.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만약에 지구가 멸망하면 다 같이 멸망한다. 절대 혼자만 멸망하지 않는다. 지난해에 그 제품으로 인해 곧 망할 줄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남편은 그 핑계를 가지고 방황하는 척만 했다. 그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겼다.
그때 이후로 집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 적이 몇 번이었나? 세탁기에다가도 아닌 방바닥에 둘둘 말아 던져놓은 옷들.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었다면 그 향긋한 향기. 아마 화장품 가게에 갔다면 자신도 그 향기에 끌려 그 화장품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향기들은 썩은 배설물과 같은 구린내로 가득 찼다. 그런 날이 길어질수록 자신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화장품이 떨어져도 마땅히 고를 화장품이 없었다. 전부 썩은 구린내들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구역질이 났다.
다른 남자들은 아내가 친정에 가거나 어디 여행을 가면 해방된 기분으로 밤새 즐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가 없는 집을 밤새 지켰다. 너무 감사했다. 그런데 왜 감사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밤새 머리를 감쌌던 기억들 중 하나가 떠올랐는지, 잠재된 그 기억이 표정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때 은희 오빠도 같이 이 앞에 있었다면 두 번 보여줄 번거로운 불편은 없을 텐데 약간 아쉬웠다.
“뭐야? 지금 비웃는 거야? 이 여자가 미쳤나?”
“그래! 미쳤다”
동물 중에 인간들은 항상 그들이 항상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에 사자나 호랑이나 하다 못해 사나운 고양이와 무기 없이 맞닥뜨리면 없는 꼬리라도 억지로 만들어 줄행랑을 치면서도 무기만 들면 강한척한다. 그러나 남녀로 부류가 나눠진 인간과의 싸움에는 무기가 필요한 쪽은 여자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은 무기가 없어 항상 종속을 하지만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 특히 지금 해숙은 악에 바쳐 격앙된 상태다.
두리번거린다. 무기가 필요했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세게 내리치고 또, 계속 내리친다.
“그래! 미쳤다. 미쳤다. 죽어! 죽어! 내가 너 같은 놈을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야! 죽어! 죽어! 이 더럽고 야비한 놈아! 죽어”
아무런 반응이 없다. 드디어 죽은 것 같다. ‘뻑’소리와 함께 해숙은 방바닥에 귀를 대고 있다. 남편의 숨소리를 확인하려고 귀를 댄 게 아니었다. 해숙이 옆에는 베개가 같이 굴러 떨어져 있었고 임정훈은 그런 해숙을 어이없듯이 한번 쳐다보고는 한마디하고는 꽝 소리를 내고 나가버렸다.
“미친 년!”
임정훈이 화가 났는지 아니면 열등감과 자괴감에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둔 말인지는 직접 확인하지 못해 모르지만 이 미친 년은 하루 종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인걸은 내심 불안했다. 왜 출근을 안 하지? 내가 농담이 너무 심했나? 그러나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심도 아니었다. 단지 질투였다. 어린 시절 그토록 짝사랑했던 해숙이를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그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그 놈에게 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동한 시기와 질투. 그 속에는 어떻게 표현할 지 모르는 심적인 갈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잠재된 열등감은 아주 중요한 그 순간에 폭발하고 말았다.
인걸은 지금 반성하고 있다. 자신을 힐책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의 짝사랑. 지금 자기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하고 있고 받고 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반대의 입장도 떠올랐다. 만약에 그런 말,
‘해숙아! 오빠하고 한잔 더 하러 가자.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아내의 휴대폰을 통해 들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치가 떨렸다. 걱정도 됐다.
“영철아! 네 동생한테 얘기해서 해숙이한테 전화 좀 해보라 하지. 출근을 안 하네”
“네가 하면 되지. 그걸 왜 우리 집사람이 해야 해?”
“그게 아니고…”
차마 어제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다시 영철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 해숙이가 출근을 안 하고 전화를 안 받는데. 당신이 전화해볼래?”
마찬가지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 있나? 불길해? 저 새끼 목소리가 좀 떨렸어. 당신 해숙이 집 알지. 얼른 가보자”
그 시간에 임정훈도 불안했다. 그가 가격한 주먹은 일반적인 싸움에서 벗어나간 주먹이 아니었다. 분노에 찬,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한, 악에 바친 주먹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학교에는 결근을 했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로 달려간 집 앞에는 자기만 해숙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세요?”
갑자기 정체를 깨 묻는 말보다 이 사람의 덩치와 발갛게 충혈된 눈알에 인걸은 깜짝 놀라 바로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었다. 임정훈은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이 새끼! 네가 어제 전화한 그 놈이야?”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로 인걸이 멱살을 붙잡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