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언니! 매번 고맙게 또 가져 오셨어요. 고마워요.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이시네요”
지현이도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별 일이네”
“지난 번에 연지 아빠를 태워가신 분 맞죠? 그땐 고맙단 인사도 못했네요. 고마워요. 호호”
대부분의 여자라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개의치 않는 저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오기를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출입문 입구에 큰 거울이 있었다.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여자가 동시에 거울에 비춰졌다.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견줄 때를 견주어야지. 15살이나 어린 사람과 비교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런! 웃고 말았다.
“어? 언니! 왜 웃어?”
민망하게 지현이 묻고 말았다.
그런데 시원이가 누군가? 이름 그대로였다.
“질투가 나서 그렇지. 부럽습니다. 연지 엄마라 하셨죠? 제가 주제 넘게 남편을 넘봤습니다. 호호”
“호호호! 제발 데려가세요. 천하의 바람둥이 저도 징그러워요”
“애는 무슨 소리! 애 아빠가 무슨 바람둥이라고? 언니가 정말로 알겠다”
“아이고 언니 말도 마세요. 지난 번 같이 나이트클럽 갔는데 저는 안중에도 없더라고요. 저하고 블루스 딱 한번 추고 다른 여자들하고만 추는 것 있죠. 정말 기가 막혔어요”
시원이 얼굴이 갑자기 화끈 달아올랐다. 같이 춰서가 아니고 다른 여자 중에 한 사람밖에 아니었던데 한동안 혹시라도 찾아줄 지 기다린 적이 있어서였다. 그런 여자 중에 한 사람이란 기분이 들어 불쾌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이기도 했다.
“하여튼 직업을 잘못 택했어. 어릴 때부터 춤 하나는 최고였어. 지금이라도 연예계로 보내지”
“아이! 언니! 인물이 문제잖아요”
“허긴! 연지 엄마도 인정해주니까 나도 인정해도 되지?”
“예! 방송사 망해요. 호호호”
그때 방우가 들어왔다.
“어! 안녕! 오늘도 한 보따리 가져 왔어? 어! 누님도 오셨네”
전혀 놀라지 않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시원은 탄복을 했다. 정말 능글맞은 바람둥이라는 걸 떳떳하게 여기는 것 같고 복희 조카 숙이와의 연애사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놈이란 확신도 들었다. 세상 남자들이 다 저런가? 의문을 가지게 했다. 만약에 만약에라도 저 놈과는 절대로 중년의 로맨스 같은 꿈은 꾸지 않기로 결심도 했다. 그냥 스쳐가 저 놈 기억에도 없는 엔조이 상대가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반대로 생각도 들었다.
한번쯤은 소모품으로 사용할 가치도 있단 위험한 발상을 할 때 또 피씩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그때가 떠올랐다.
어떤 여자의 허리춤을 붙잡아 옆구리를 돌리지도 못하게 감싸 안아 빙빙 돌리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시원은 잠시 상대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상상을 했다.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때 처음으로 상상 스캔 십의 위력을 느꼈다. 상대가 자신으로 착각한 그때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벌써 일년이 거의 다 돼 가는 데도 또 떠올랐다. 마치 지금 어디에 사는 지도 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첫 사랑 남정네와 뜨거웠던 첫 키스처럼 눈에서 아른거렸다. 앳된 목소리가 없었으면 시원은 주책없이 그 남정네를 떠올리며 침을 질 흘렸을 것이다.
“자기야! 나 먼저 가도 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만약에 방우 아내 나이를 몰랐다는 온몸이 소름덩이였을 것이다. 가도 된다는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카드를 주던가, 현금을 주던가 좀 주고 가면 안돼?”
이번에는 살얼음이 온몸을 감쌌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떴다.
“언니가 사주면 될 건데”
이 말만 하고 마지못해 주듯이 카드를 꺼내주고는 얼른 인사를 하고 쫓아 나가버렸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올까? 아무리 50대 중반이라도 여자다 둘인데? 자존심도 약간 상했다. 의심도 들었다. 이 놈처럼 저년도 바람둥이인가?
별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지현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숙이 동생 어떻게 할래? 솔직히 나도 걱정돼. 방금 동생 보고 갑자기 숙이도 떠오르고 솔직히 무서워. 동생이 너하고 숙이 사이 모르잖아?”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그 뭐! 나이트클럽에서 만났다고 하면 되지 뭐”
“야! 지금 농담할 때야? 내가 불안해서 잠을 못 자겠더라. 뭐 방법 없어?”
전혀 대책도 없어서 짜증만 내고 있는 표정이 분명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숙이 이모 있잖아. 나는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해. 잔인하지만”
시원이 가슴이 철렁했다. 복희를 잘 알고 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용하려고?”
이 동네 남정네나 여편네나 냉정한 것 같아 보였다. 만약에 자신이었다면 형식적이라도 한숨을 내쉬었을 건데 지현이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물었다.
“너! 내가 등신 아닌 줄 알지?”
“무슨 말이야. 누가 등신이래?”
방우가 시원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원은 이유를 몰라 멀뚱대기만 했다.
“누님! 제가 사과부터 할게요. 사실 제가 숙이 이모를 나이트클럽에서 첫눈에 알아봤어요. 그래서 같이 안 있으려고 이 자리 저 자리 다녔습니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가 숙이 이모를 꼴도 보기 싫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아닙니다. 저 같아도 그런 일을 보면 귀사대기가 아니고 더 심하게 했겠죠. 그리고 이모가 고자질 한 것도 모두 질투에서 그랬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전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모가 두 번인가 저희 집에 찾아왔어요. 복희 이모라면서 그냥 놀러 왔다고 해서 편하게 대했는데 두 번째 와서는 숙이를 놔주라 하더군요. 제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이한테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깨끗이 사라져 주었습니다. 솔직히 누가 더 손해겠습니까? 요즘도 여자보다 남자가 더 이해 받는 세상인데 그 당시는 더 했죠. 구차하기 싫더군요. 지현이 너도 알지만 내가 뭐가 아쉬워서 숙이한테 매달리겠어. 그때 솔직히 많이 지겨웠다. 어릴 때는 좋았는데 촌 동네서 벗어나니 숙이는 인물도 아니더라”
지현이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이유가 아닐 텐데?”
“그래 더 있어. 사실 그 집 식구들은 은근히 잘난 척을 했지. 자기들보다 나은 집안엔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하고 못 사는 집은 확실히 무시하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인자한 척하고. 그랬지. 굉장히 이기적인 집안이었어. 숙이만 볼 수는 없잖아. 그때 숙이 이모가 너무 고맙더라”
씁쓸히 웃으며 지현과 눈을 마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