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시후에게 영감은 급하게 전할 말이라도 있는 듯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수지 아가씨가 오늘 점심때 전화가 왔습니다.”
“수지?”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지난번 가실 때 제 전화번호를 드렸었는데...아가씨가 목걸이를 잃어 버렸다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메이드에게 찾아보라고 시켰는데...다행히 서랍장 밑에서 이걸 찾았습니다.
수지아가씨에게 아주 특별한 목걸인 듯 했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든지. 허허."
영감이 미소 지으며 계속 말했다.
“도련님이 직접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조금 있다 도착하신다 합니다.”
“아.. 알았어.”
그는 무심한 듯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가운데 작은 메달이 있는 중간 두께의 금 목걸이였다.
왠지 낯설지 않는데...어디서 꼭 한번 본 것 같단 말야...
그는 목걸이를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T Y .... 이건 무슨 의미이지?"
메달 뒤에 새겨진 이니셜.
수지는 아니고 ...... 설마?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김시후 정신 차려.. 자꾸 그녀에게서 태이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지마.“
“도련님, 아가씨 도착하셨습니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줘."
‘시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좀처럼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했다.
***
서재 창가에 그녀가 서 있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약간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짙은 녹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허리 라인 위로 올라온 하이 웨이스트 치마 때문에 그녀의 가는 허리가 더욱 더 짤록해보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떼기 싫었다.
“아~~."
그의 입에서 낮은 감탄의 신음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늦은 오후 마지막 뜨거운 햇살에 비춰진 그녀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지난번 보다 더 밝은 갈색으로 보였다. 눈부셨다.
그는 숨 죽여 그녀를 바라봤다. 겨우 진정시킨 그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아.. 안녕하세요.. 차수지입니다. 잘 지내셨죠?“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향해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제 목걸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그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향이 느껴지자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지는 그에게서 두어 발 뒷걸음 쳤다.
“제 목걸이 어디에 있죠?”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있어. 근데 궁금한 게 한가지 있어. 아가씨 이름은 차수지인데 여기 이니셜은 왜 TY인거지?“
“아~~! 원래 이 목걸이는 돌아가신 엄마 거예요.
아빠가 엄마에게 주신 선물인데 엄마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새겼다고 들었어요."
“그렇군..."
실망한 표정이 그에게서 비쳤다.
“이 목걸이 쉽게 풀리는 고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설마 다시 여기 오고 싶어 일부러 빼 놓고 간건 아니겠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
순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런, 이런. 내가 농담이 심했나? 농담이었어.. 하 하 그렇게 정색 할 필요는 없잖아.”
그가 그녀 코앞에까지 바짝 다가섰다.
'무슨 짓이지?'
수지는 당황스러운 듯 두어 발 뒷걸음 쳤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녀에게서 약간 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 대답 없이 그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목뒤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그녀의 하얀 긴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의 심장이 멈는 듯 했다. 그를 밀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목 주위에 그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망설이듯 스쳐지나갔다.
그를 밀쳐내고 싶지만 몸이 너무 나른해져 손가락에 힘이 하나씩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탐하듯 그의 손길이 계속 목 주위를 맴 돌았다. 주위가 너무 조용한 탓인지 누군가의 빨리 뛰는 심장소리가 서로의 귓가를 울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수지는 정신을 차린 듯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
“오해하지 마. 혼자서 이 목걸이를 차기에 어려울 것 같아 내가 도와준 거니,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군. 그 목걸이.."
그는 무심한 듯 말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 좀 마실래? 요즘 국화차가 향이 참 좋은데."
그는 찻잔에 연 노란 국화차를 붓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태연한 그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 향기 좋은 차, 댁 혼자서 많이 드세요.”
그녀는 토라져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그럼 나 혼자 즐기지 뭐.”
수지는 이 상황이 너무 모욕적이라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듯 부끄러워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수지 아가씨..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드시고 가시죠?” 영감이 서재로 들어왔다.
“아니요, 저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도련님 보고 실컷 배부르게 먹어라 하세요.”그녀는 소리를 빽 지르고 옆에 놓여 있는 가방을 홱 집어 들고는 성큼 성큼 문을 나갔다.
“도련님, 수지 아가씨가 갑자기 왜 저러십니까? 두 분 싸우셨습니까?”
“하하.. 내가 저 아가씨랑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 나도 지금은 저녁 생각이 없어."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수지는 씩씩 거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저녁 약속 같은 건 없다. 그 집에 가기 전 한 시간 동안 이 옷 저 옷으로 갈아입고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고 간 자신이 마치 들킨 것 같아 자존심이 너무 상한 것이다.
“차수지.. 뭐 했던 거야? 그때 그의 손길을 뿌리쳐야지. 왜 가만히 있었어?"
좀 전의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온몸이 다시 찌릿 하는 듯 했다.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있음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차 수 지~~!!"
고개를 베개에 파 묻으며 탄식하듯 소리를 지른다.
"지잉잉~ 지잉잉."
“ 여보세요?”
“기집애야, 불금인데 벌써 자는거니? 오늘 마징가 클럽에 댄스 파티한데. 1등이 50만원이야. 잼 날것 같아. 스트레스도 날릴겸 빨리 나와. 그리고 오늘 여기 물 좋아. 흐 흐. 부킹 해야지."
베프인 소연이다. 벌써 약간 술 취한 듯 소연이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몇달전 실연을 당한 소연이는 요즘 금요일마다 클럽을 가자고 조른다.
“너 안 나오면 내가 집 앞 까지 쳐들어 갈 거야. 빨랑 나와.. 오늘 물 좋단 말야. 앙~." 소연이는 앙탈을 부렸다.
“응, 알았어.”
지금 소연이가 오빠를 잊기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기에 수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지와는 달리 소연이는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어한다.
근데 5년을 사겼던 태수 오빠랑 몇 달전 헤어지고 나서 소연이는 괜찮다고 말 하지만 아직도 오빠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태수 오빠는 소연이랑 헤어지고 한달 후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 소문에 따르면 상대는 엄청 부잣집 아가씨.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태수오빠에게는 당연한 선택인지 모른다.
오빠 결혼 소식을 들은 소연이는 그 당시 거의 미친여자 수준이었다.
너무 괴로워하는 소연이는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수지는 그런 소연이를 보면서 결심했다.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시후...시후.. 김시후...갑자기 그 남자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지금 그 남자는 뭐 하고 있을까..?
“차수지... 정신 차려.. 바람둥이 날라리처럼 생긴데다, 어마하게 돈도 많은 재벌집 아들에게는 진심이라고 없어. 널 좋아할 일이 없다고. 그냥 널 좀 갖고 놀고 싶어 했던 거야.”
수지는 자신이 한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제 그 남자 얼굴 볼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괜찮아. 오늘 물 좋다고? 그래 즐기는 거야.. 이 미모에 내가 뭐가 아쉬워서.“
수지는 어깨를 으쓱 거렸다.
"지이잉 지이잉"
모르는 번호~? 누구지?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