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이 안 좋은 날인 줄 알았는데, 푸하하. 완전 운 튼 날이었던거 있지!"
화통한 하지의 웃음에 마주앉은 건식의 표정이 반쯤 일그러졌다.
"너 그거 청소년 보호법 위반 아니냐?"
"무식한 소리 하고 앉아있네. 경찰 맞냐? 청소년 보호법 위반은 개뿔, 그 꼬맹이가 영세상인 보호법 위반한 거거든!"
"어휴. 말을 말자. 그래서 그게, 그러니까 그 꼬맹이 알바시키는 게 왜 운이 튼 건데?"
"우리 주말에 엄청 바쁘잖아. 나 주말에 쉬기로 했는데 맨날 불려 내려가고. 걔가 있으니까 나는 당분간 자유란 소리지. 푸하하."
"그게 다야?"
"그게 다지, 그럼 뭐 또 있어야 되?"
"너 대신 그 중학생 가게에 세워 놓으면 너는 방에서 쉬어도 된다고 누가그래? 더 불안할걸? 어머니도 절대 허락 안 하실거고."
"그래, 까짓거 나 자유 아닌거 인정. 그래도 일손 하나 더 늘어서 서비스의 질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울엄마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지. 그럼 내 말대로 알바 한 명 더 구할거고."
"글쎄.. 그 중학생이 사고나 안치면 다행일 것 같은데.."
"악담하냐? 그 꼬맹이가 사고치면 걔네 오빠가 해결할거야. 그 남매 래퍼토리거든. 꼬맹이가 사고치고 오빠가 해결하고."
"그 정점엔 항상 니가 있고."
날씨가 차갑든 말든 커피는 항상 아이스만을 부르짖는 건식이 눈 앞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와드득 와드득 입 안 가득 얼음을 넣고 씹어대는 통에 카페 안이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언제부터 일 하는데, 걔는?"
"당장 이번주부터."
"걔네 집이 이 근처야? 어린애 혼자 여기까지 왔다갔다 하는 거 괜찮을까? 요새 해도 짧아졌는데."
"별 걱정을 다 해. 니가 걔네 오빠냐? 지 오빠가 있는데, 뭘? 그 꼬맹이 오빠도 지 동생 혼자 여기까지 왔다갔다 하는 꼴은 못 볼거다, 아마. 걔네 오빠가 출퇴근 시켜줄 거야. 뭐라더라, 출항이랑 겹치지만 않으면 항상 온다고 비상시에는 어쩌구, 입항인지 뭔지 하게 될 때까지 배려 좀 해달라는데 뭔소린지 몰라서 그냥 알았다고 했어."
"그럼 꼬맹이 오는 날은 그 남자도 무조건 오는 거네?"
"그렇겠지. 그 남자가 보호자니까."
"그렇지, 이거지."
"뭐?"
"니가 왜 운이 텄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다고."
"뭐라는 거야, 또 헛소리 시동거네."
"나 간다, 이 시려서."
남은 얼음을 또 한 번 입 속에 털어넣은 건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 안 가득한 얼음 때문일까. 몸이 으슬으슬 한 게 이 카페는 난방이 제대로 안되는 건지 뭔지.
"간다고? 갑자기? 술 한 잔 하자며?"
"오늘은 됐다. 그냥 갈래, 이가 시려."
"얼음 미친듯이 쳐 먹더니. 가라, 가! 잘가라!"
무슨 대단한 얘길 해줄 것처럼 설레발을 치길래 관심 좀 가져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고됐던 야간근무를 끝내고 잠 시간도 줄여가며 왔건만 하지의 입에서 또 나오는 그 사람 얘기에 건식은 맥이 풀렸다.
그 때 그 압구정에서 콜라를 뒤집어 썼을 때도 만나기만 하면 지겹도록 그 사람 얘기더니, 지난번에 우연히 마주친 후론 또 시작이었다.
재미없다.
그 땐 하지가 욕하고 건식은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어찌어찌 잘 지나갔는데, 요즘은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했다.
오늘 근무할 때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진짜 얼마나 회의감들고 힘들었는지, 박하지랑 술이나 한 잔 하며 힐링 좀 해볼까 했는데 김샜다.
커피가 아니라 술을 앞에 두고는 그 사람 얘기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하지였다.
표현이 좀 거칠고 틱틱거려서 그렇지 제 방식대로 열심히 건식의 마음을 위로해주던 옛날의 하지가 그리웠다.
'야, 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다. 아주 배가 불렀지? 그 옷 입고 싶어서 몇 년씩 바쳐가며 공부하는 청춘들이 쌔고 쌨다더라! 그딴 주정뱅이들 땜에 힘들어할거면 차라리 그 옷 벗어서 다른 사람한테 갖다줘! 남들은 입고 싶어도 못 입는구만 회의감은 개뿔. 정신차려라, 한건식!'
귓가에 뼈를 때리는 하지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그래, 이게 박하지식 위로법이지.
제 얘기는 들을 생각도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그 사람 얘기뿐인 박하지는 이제 재미없다.
이런날은 혼술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달래야하는 법이다.
하지네 튀김집이 마감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잠시 들렀던 카페에서 얼음만 잔뜩 먹고 혼자 나온 건식이 옆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 동네에서 혼자 갈 만한 술집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에서 혼자 청승 떨며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가볍게 한잔 하기에는 편의점 앞 테이블만한 곳이 없다.
비록 하지네 가게가 코 앞에 보이고, 곧 씩씩대며 카페에서 나올 하지의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긴 했지만.
"상관없어, 뭐. 내가 지 눈치 봐가면서 술 먹어야 되나?"
괜히 혼자 투덜거린 건식이 사발면 한개와 맥주 두 캔을 사서 테이블에 자리를 폈다.
"좀 추운가?"
늦가을의 바닷바람이 따뜻할리는 없으니 좀 추운 거, 까짓 거 그것도 괜찮다. 술 마시면 더워지는 법이니까.
"지랄하네. 얼음 쳐먹고 이 시려서 치과라도 간 줄 알았더니."
톡 쏘는 하지의 목소리가 들린 건 앞에 놓인 사발면이 익었을까, 올려둔 젓가락을 치우고 뚜껑을 슬며시 열어보려던 찰나였다.
"이 시려서 뜨거운 국물 좀 먹을라 그런다, 왜."
"뜨거운 국물 쳐먹다 입 돌아가기 전에 가게로 들어가라, 후회한다."
"입이 왜 돌아가냐? 겨우 이 날씨에."
"겨우? 너 늦가을의 오밤중 바닷가 추위를 안 겪어봐서 그러냐? 잔소리 말고 빨랑 와. 손님 뜸 할 시간이야. 가게 가서 먹자."
"나 딱 맥주 두 캔에 라면 이거 하나만 먹고 갈라그랬어.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들어가."
"으유, 삐돌이새끼, 삐져가지고."
쯧쯧, 혀를 두어 번 찬 하지가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건식이 호로록 면발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뜨거운 면발이 건식의 입으로 직행하기 직전 차가운 공기를 맛본 터라 더없이 탱글탱글하고 쫄깃했다.
역시 사발면은 편의점 앞 테이블 자리에서 먹는 게 진리다.
"캬. 죽이네."
라면 한 젓갈에 국물까지 들이킨 건식이 만족스런 얼굴로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이 타이밍에 시원한 맥주까지 들어가면 더이상 바랄 게 없다.
"이거나 더 쳐먹어."
꿀꺽꿀꺽 입도 안 떼고 맥주를 들이키던 건식의 앞에 하지가 털썩 앉으며 비닐 봉투 꾸러미를 내밀었다.
소주 한 병, 맥주 다섯 캔, 편의점 용 김치 한 팩이랑 국물 어묵탕, 과자 두어 봉지, 그리고 편의점 술자리에 빠지면 섭섭한 오징어랑 캔땅콩까지.
"작정했냐? 나 이거 여기서 다 먹고 입 돌아가라고?"
"멍청하기는."
그리고 핫팩 두 개랑 서비스차원에서 대여해주는 편의점 무릎담요 두 개도.
"이왕 먹는 거 부실하게 쳐먹고 후회하지 말고 제대로 먹으라고. 가게 싫으면 여기서. 자, 말해 봐. 무슨 일인데?"
"뭐가. 뭐가 무슨 일이야?"
"으유 삐돌이. 너 근무시간에 술 한 잔 하자고 연락했잖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까부터 표정도 구리고. 빨리 말해, 뭔 일인지. 왜? 너 일 못해서 실습이고 뭐고 경찰 그만두래?"
"악담을 해라."
"그러니까 빨리 말 하라니까. 너 할 말 있어서 온 건데 내가 딴소리만 하니까 그래서 삐진거잖아. 아니야? 맞지?"
역시 박하지만큼 절 잘 아는 인간은 없음에 건식은 혀를 내둘렀다. 이게 바로 20년, 아니 25년지기의 척하면 척인 우정인가보다.
"한젓갈만 줘."
건식의 앞에 놓인 사발면을 홀랑 집어다 제 앞에 놓은 하지가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었다. 빨랑 말 해보라니깐? 눈으로 연신 건식을 재촉하면서.
.
.
.
.
소주는 참 오묘했다.
어떤 날은 쓰고, 어떤 날은 달고, 또 어떤 날은 마치 물인양 아무맛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떤 맛인데?"
"맹 맛."
맹 맛. 오늘은 맹 맛이었다.
맥주 다섯 캔, 아니 건식이 미리 사다놓은 것까지 총 일곱캔을 다 마시고도 안주가 남아 하지는 아껴뒀던 소주를 꺼내들었다.
섞어 마시면 뒤 끝이 안좋다고들 하지만 맥주 먼저 먹고 그리고 나서 먹는 거니까 섞어 마시는 건 아니라는, 하지만의 법칙이었다.
"인생이 쓰면 술 맛도 쓰고, 인생이 달면 술 맛도 달댔어. 맹 맛인 거 보니까 뭐 그렇게 나쁜 하루도 아니었겠구만."
"그래, 알아서 해석해라."
응, 어떤 또라이새끼가 술 쳐먹고 나를 들이받았어.
라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지질 않아 건식은 맹 맛인 소주만 연거푸 비워냈다.
그래도 술기운에 아까보다 기분이 더럽진 않으니 이 정도면 박하지표 힐링이 효과를 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은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대. 내공이 팍팍 쌓이는 거라고."
"너는 그런 말을 어디서 자꾸 주워듣고 와서 나한테 흘리는 거야?"
"주워듣기는, 다 우리 할머니가 하신 귀한 말씀이다. 대대로 대명항의 큰 손 집안이 되는 게 꿈이셨던 우리 외할머니!"
"어쩌냐. 할머니 꿈은 커녕 하나뿐인 손녀가 장사보다 엉뚱한 데 관심이 더 있으니."
"엉뚱한 데라니?"
"다 마셨지? 그만 일어나자. 춥다."
콜라남인지 뭔지 그 사람한테 정신 팔려 있는 거 아니었냐?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를 날려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건식이 주섬주섬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추운 데 제법 오래 있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입이 돌아갈 것 같은 매서운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뭔 말을 하다 말아? 넌 그게 문제야. 그래놓고 지는 입 무겁고 과묵한 남잔 줄 알겠지? 말 하다 마는 게 수다쟁이 보다 더 싫거든?"
"너 먹은 거 그거 쓰레기나 정리해. 아니다, 이리 줘 봐. 분리수거 해 놓게."
웃기고 있네, 니가 다 치워라, 어쩌구 하며 떠들어대는 하지 목소리를 애써 흘려 들으며 건식은 손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원래부터 박하지와의 술자리 뒷정리는 건식 몫이었으므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몇 년 전이던가?
하지가 이렇게 낯선 사람에게 정신 팔려있던 적이 한 번 있긴 있었다.
매 번 예약시간을 안 지킨다며 진상 중의 진상이라고 건식 앞에서 욕을 욕을 하더니 점점 그 사람 얘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뜸하면 뜸하다고 난리, 자주 오면 자주 온다고 난리, 피곤하리만치 얘길 해대는 하지 덕분에 건식은 그 사람의 병원 방문기를 줄줄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으론 뭐 딱히 이상한 놈은 아닌 것 같아 잘해보라며 형식적인 응원 몇 마디 해준 게 사단이었다.
그 사람의 능수능란한 어장관리에 제대로 당한 하지의 상처는 애먼 건식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왔고, 거의 1년을 '똑같은 놈' 취급을 받아야 했다.
"내가 다시는 네 연애상담에 입이라도 뻥긋 하나봐라."
바득바득 이를 갈았고, 또 한편으론 좀 더 성의있게 알아봐 줄 걸 하며 미안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상처받고 다 쓰러져가는 하지가 딱하기도 했다.
꼭 그 때 이 느낌이었다.
스산한 계절, 입만 열면 나오는 그 사람 얘기, 이상하리만치 자꾸 겹쳐지는 우연, 한번씩 설레임이 비치는 하지의 표정까지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