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이다."
"그러게. 또 앨범 냈나 보네, 활동 뜸하더니."
"영화 찍었댄다."
"아."
진작에 마감한 횟집에서 술잔을 나란히 앞에 두고 앉은 하지와 건식의 시선이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실습이든 아니든 경찰로서 첫 발걸음이니 만큼 거하게 환영회는 못 해줘도 술은 맘껏 먹으라며 하지의 부모님이 일찍 가게 문을 닫은 덕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네 얼굴을 가까이서 보며 살아야 하냐고 푸념을 늘어놓던 하지도 네 덕분에 가게 술을 맘껏 먹는다고 뿌듯해 하고 있었다.
말로는 괜히 지겹다 지겹다 해도 20년을 이어온 친구와 다시 이웃사촌이 되는 게 퍽 반가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영화 못 본 지도 되게 오래됐다."
"그랬겠네. 시험 준비하고 또 바로 경찰학교 가고 그랬으니까."
"시간 될 때 이 한 나온 영화나 보러 가자."
"돈이 썩었냐? 좀 기다리면 VOD로 나올 텐데."
"와, 박하지. 내가 알던 박하지 맞냐? 이야, 횟집 알바생 독하게 돈 모으기로 작정 한 거야? 대박. 변해도 이렇게 변하냐? 야, 그러고 보니까 너 이거, 그거 아니냐?"
휘둥그런 눈을 부라리며 혀를 끌끌 차던 건식의 시선이 하지가 입고 있는 윗옷으로 향했다.
낯이 익은, 꽤 오랫동안 보아 온 것 같은 익숙한 옷.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삼 년 전에 하지는 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저 옷을 들고 건식을 불러내 짜증 섞인 하소연을 한 세 시간쯤 늘어놨었다.
"뭔 소리야. 이거, 그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내가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 되냐?"
"옷 말이야, 옷. 지금 입고 있는 거, 이거, 그 옷 아니냐고. 옛날에, 그거."
"아아, 난 또 뭐라고. 맞아. 콜라 맞은 옷."
"천하에 박하지가 그걸 안 버리고 아직도 입어? 이렇게 얼룩이 심한데?"
"야, 그때 이게 얼마였는데. 그 비싼 돈을 주고 딱 한 번 만에 쓰레기 됐는데 어떻게 버리냐? 약 올라서. 헤져서 걸레가 될 때까지 입을 거다! 그때 세탁비만도 얼마가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게 싸구려 옷들은 얼룩이 잘도 지워지던데 이건 뭔 짓을 해도 얼룩도 안 지고. 암튼 이건 내가 죽어도 못 버려. 어떻게든 뽕 빼고 버릴 거야."
씩씩대며 말을 마친 하지가 입고 있던 카디건의 앞자락을 힘껏 여몄다.
처음엔 검정색이었을 콜라 얼룩이 모진 세월과 독한 세탁을 수백 번 거치며 허여 멀건하게 변해 있었다. 얼핏 보면 원래 카디건 원단의 디자인이 그렇게 생겨 먹었구나 싶을 만큼 자연스런 형태에 건식이 쯧쯧, 혀를 내둘렀다.
어려서부터 오기 하나는 알아주는 하지였는데 그 오기가 이런 데에까지 발동을 하다니. 그 오기로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판검사는 되고도 남았을지 몰랐다.
"대단하다, 진짜."
"짜증나. 잊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술 맛 다 떨어졌어."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이 한 때문이지. 야, 술맛 떨어진 김에 얘기하는데, 그 사람은 잘 살고 있겠지? 그 초딩도 많이 컸겠다."
"뭐, 그 콜라 사기꾼?"
"사기꾼은 아니지. 너 돈 받긴 받았잖아. 그것도 네가 들인 세탁비의 세 배도 넘는다며."
"야, 돈이 다가 아니지. 사과하기로 해 놓고 안 했으면 그것도 사기 친 거지."
"번호까지 줬다며, 사과할 테니까 전화하라고. 지가 안 해 놓고."
"그럼 돈까지 받아놓고 치사하게 전화해서 사과하세요, 이러냐? 그것도 초딩을 상대로?"
"그러니까 그 사람은 사기꾼 아니라고. 암튼 그게 언제 적이냐, 그 초딩도 중학생은 됐겠다."
"중학생이 됐던지 말던지 내 알 바 아니고, 짜증 나니까 너 일어나서 소주나 더 갖고 와."
하지의 말에 건식이 말없이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하지의 부모님이 마음껏 마시라고 혀락을 하긴 했으나 진짜 이렇게 마음껏 마셔도 되는 걸까 싶어 잠시 망설였지만 저보다는 하지가 더 마음껏 마시고 있으니 뭐.
"이건 비밀인데."
건식이 가져온 소주를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어 벌컥벌컥 마셔대던 하지가 게슴츠레한 눈을 번뜩이며 건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취했다는 증거였다.
소주를 두 세 병쯤은 거뜬하게 마셔대다가도 마지막 딱 한 잔에 정신줄을 확 놓아버리는 하지였다. 그러곤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비밀 하나 말해줄까?’ 하고 되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
그 비밀이라는 건 이를테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연예인 커플의 열애 소식이나 어제 먹은 스파게티가 드럽게 맛 없었다는 것 정도.
"어. 말해 봐."
술자리가 종료됐음을 깨달은 건식이 주섬주섬 테이블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 취했어, 하는 신호를 끝으로 하지가 헤롱대기 시작하면 나머지 뒤처리는 죄다 건식의 몫이었다.
취한 하지를 집까지 완벽히 들여보내는 것도, 어쩌다 택시에서 토하기라도 하면 기사님의 욕과 시트 세탁비를 모조리 물어내는 일도.
제발 이 천둥 망나니같은 하지에게 남자친구가 생겨 고된 뒤치다꺼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까지 생각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결국 그 뒤치다꺼리가 그리워 하지와 가까운 곳으로 다시 컴백한 거긴 하지만.
내가 미쳤지.
술자리를 주섬 주섬 정리하며 건식이 혼잣말을 지껄였다. '이건 비밀인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저 바가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전화하면 바로 내려와 뒤치다꺼리를 해 주실 하지의 부모님이 3분거리에 계시다는 것 정도랄까.
"개잘생겼드라."
"뭐? 걔? 누구?"
"이건 비밀인데, 개잘생겼다고."
"아, 그래그래. 이 한 잘생겼지."
"아니, 이 한 말고. 그 사기꾼. 개잘생겼어. 푸하하. 이건 비밀인데, 개잘생겼어. 푸하하. 너만 알고 있어."
개잘생겼음을 수도 없이 반복해대던 하지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고꾸라졌다. 그제서야 그 '개'가 '걔'가 아님을 깨달은 건식이 휴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밀 좋아하네. 너 술만 취하면 그 얘기 백 번도 넘게 했거든."
고꾸라져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식이 또다시 휴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차지하고 앉았던 테이블은 소주병과 매운탕 등으로 어지러웠고 그걸 치울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걸 아는 터라, 밀려 오는 울화통에 말 없이 매운탕만 휘휘 저어댈 뿐이었다.
문득, 식어 빠진 매운탕에 남아 있는 생선 뼈가 덩그라니 외로워 보여 건식은 생선뼈를 건져냈다.
"지가 끓였다고 생선 뼈까지 남기지 말고 먹으라더니."
가게가 바쁠 땐 한 번씩 주방일도 돕는다더니 그래서인지 제법 맛있었던 매운탕이었다. 박하지랑 벌써 수십, 아니 수백 수천 번도 넘게 가진 술자리지만 하지의 음식을 먹어본 건 난생 처음이라 왠지 새로웠다.
회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그렇다고 얼큰한 매운탕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박하지의 매운탕은 제법 자주 먹게 될 것 같아 건식은 말없이 술상을 정리했다.
**
"오늘 또 나가십니까?"
"어."
"집에?"
"어."
"지금?"
"어. 근데 계속 말이 짧다?"
"지금 말이 짧은 게 문젭니까? 선배님 진짜 수상하십니다. 지난번 휴가 나가셨을 때 본가 쪽에 여자친구 만들어 놓고 오신 거 아닙니까?"
"어, 아니야."
"아니 그럼 비번 때마다 숙소에 쳐박혀 운동만 하시던 분이 지난번에 본가 다녀오신 이후로는 주말마다 외출이십니다, 어째?"
"그런 게 있다."
"혼자 몰래 여자친구 만들어서 숨겨놓으신 거면 배신입니다."
중헌이 혼자 떠들거나 말거나 짐이라고는 챙길 것도 없이 핸드폰만 달랑 챙긴 도연이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외로운 놈 마음은 외로운 놈이 채워줘야 한다며 엎어지면 코 닿을 본가에 가지도 않고 주말이며 쉬는 날마다 중헌과 함께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는데, 요즘들어 부쩍 이상해진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여자가 생긴 게 틀림없다는 결론이었다. 여자친구를 숨겨 두지 않고서야 비번, 오프 때도 모자라 주말마다 본가로 출근 도장을 찍을 일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없었다.
"그래, 가라, 가."
이미 도연은 나가고 없는 빈 현관문을 향해 발길질을 해댄 중헌이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말은 유난히 길 것 같은 슬픈 예감은 아마 틀리지 않을 테지.
.
.
.
여자친구 같은 소리 하네.
팔자 좋은 중헌의 말이 떠올라 도연은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지금 도연에게 중요한 건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어떤 놈팽이의 여자친구가 되어 버릴 이연이를 지키는 것, 그 놈팽이가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놈팽이인지 확인하는 것, 그래서 이제 겨우 열 여섯, 하나뿐인 제 여동생이 상처받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지금 도연에겐 제일 중요한 임무였다.
비록 부모님으로부터 또 왔냐는 귀찮음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지만 그건 기꺼이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이연이만 지켜낸다면.
-아들, 엄마는 아빠랑 모임 가야 되니까 가스 렌지에 국 데워서 먹고 이따 이연이 저녁이나 좀 챙겨줘. 너 근데 이렇게 자꾸 나와도 되? 천하의 강도연도 군대 전역하더니 군기 다 빠졌네.
비어버린 집, 차게 식은 된장국이 가스렌지 위에서 따뜻해질 즈음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는 주말마다 오는 아들이 퍽 반갑지만은 않은 뼈아픈 모정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어딜 나갔는지 폭격 맞은 꼴을 해 놓은 이연이의 방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도연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뜩이나 까칠한 여중생, 이유 없이 전화하면 욕이나 들어먹을 게 뻔해 그럴싸한 구실을 찾는 중이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도연이 마침내 밝아진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눌러댔다.
그럴싸한 이유는 아니지만 그럭 저럭 괜찮은 핑계 거리가 생각난 덕분이었다.
-왜.
"어디야?"
-학원. 왜 전화했는데?
"너 아직 이 한 좋아하지? 오빠 영화표 생겼는데 오빠랑 영화 안 볼래?"
-대박. 오빠 또 집이야? 또 나온 거야?
"응. 그게, 저기 요즘 좀 한가해서. 너는 언제 끝나?"
-곧 끝나. 오빠, 일단 영화표 가지고 학원으로 와. 어딘지 알지? 지금 와, 얼른 와!
군복 입고 와!
전화가 막 끊어지려던 찰나에 다급하게 덧붙인 이연이의 마지막 말이 묘하게 불길해 도연은 주섬주섬 군복을 챙겨 입었다.
굳이 군복을 입지 않아도 얼굴이며 몸에 '나 특수부대 출신 해경 특공대 대원이요' 라고 써 있는데, 콕 찝어서 군복을 입고 오라고 하는 걸 보면 이유는 딱 하나일 게 분명했다.
김하준.
하아. 군복 단추를 잠그다 말고 도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 무서운 줄 모르고 쯧쯧.
도연의 경험에 의하면 남자는 어리든 늙었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그냥 다 늑대였다. 그것도 아주 응큼한. 약간씩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랄까.
순수하고 착해 빠진 이연이가 감당할 수 있는 늑대인지는 혹독한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그게 매주 운동과 자기관리를 게을리 하면서까지 바른 생활 사나이를 집돌이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울을 보며 군복 매무새를 살피는 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