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검은 천의 한복을 입은 다휘가 마지막 조문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다휘 양, 힘내요.”
부모님인 주혁과 백연의 지인이었다.
계획되어있던 장례식의 마지막 날의 마지막손님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대부분 우진이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진은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간 잘 못 쉬었는데, 일단 여기 정리하면 집으로 데려다 줄게요.” 우진이 말했다.
다휘는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3일 내내 급한 회사 일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같이 있어준 그가 고마웠다.
“대표님. 정말·· 감사해요. 계속 자리 지켜주셔서···,”
“··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우진은 다휘의 인사에 고개를 저으며, 장례식을 마무리 짓기 위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휘는 그간 계속 울었음에도 또 다시 나오려고 느껴지는 눈물을 겨우 삼켰다.
그녀는 네 사람의 영정사진을 마주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
‘··· 이젠 더 할 말도 없네요. 사랑해요.’
다휘는 미소를 지었다.
붉은 눈가와 코끝은 행복해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미소만큼은 행복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비롯해, 3일 내도록 울고 있는 다휘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던 우진은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무슨 사고를 당했냐고 물어봐도 미소로 일관하며 대답을 회피하고, 결혼식이 끝난 직후에는 왜 연락이 되지 않았냐고 물어봐도 우진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다휘는 이내 다시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우진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며,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bloody ellipse 본부.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할 겸, 본관 밖으로 나온 도담은 며칠 전부터 자신의 자켓의 주머니에 다시 자리 잡은 담배 곽을 꺼냈다.
은호에게 흡연 장면을 보일 때 마다 잔소리를 잔뜩 들으며 혼쭐이 났지만, 그래도 금연을 그만 둔 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슬슬 긴 옷은 힘들겠군.”
도담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5월 중순인데다 해가 진 시간인데도 느껴지는 답답함에,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후···.”
다휘가 자리를 비운지 4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연호는 그녀의 빈자리를 톡톡히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언가 하나씩 빼먹는 일처리에 어딘가 혼이 빠진 듯 멍한 표정, 회의 중에도 곧잘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드는 그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고작 여자 한 명에 차연호가 쩔쩔매다니.”
도담이 허공으로 시선을 두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더불어 어제 이탈리아에 가있는 우목과 영상 통화를 하며 회의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휘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일체 연락이 오가지도 않았고, 연호의 연락처를 주고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그에 인상 좋고 성격이 평탄하기로 소문난 우목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며, ‘그게 현답이었냐’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우목의 반응에 아무도 섣불리 반응하지도 못했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담배를 태우고 있는 도담의 뒤로 은호가 나타났다.
식사 속도가 느려 가장 마지막에 나온 건지, 그녀는 은국과 함께 본관에서 나왔다.
그녀의 눈에 도담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에게서 알싸한 담배의 냄새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도담 님!! 또 담배 피우시는 거죠?! 딱 걸렸어. 안 봐드려요!”
“··· 젠장.”
“어딜 도망가세요!! 거기 서라구요!!”
도담을 발견하자마자 구두를 신은 다리로 잘도 뛰어가는 은호를 보며, 은국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야에서 도담과 은호가 사라지자마자, 자켓 속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들었다.
은호는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도담을 잡기 위해 어느새 힐을 벗고 달리고 있었다. 도담은 정말 끈질긴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리를 멈추지는 않았다.
* * *
다휘는 우진의 차를 타고 집 앞에 내렸다.
장례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준 그가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할 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다휘. 들어가요. 회사는 자택근무로 변경했으니까, 일은 기한이 이번 주까지 인 것만 마무리 부탁하겠습니다.”
“아, 네··. 대표님. 저기, 정말 감사해요.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 지··.”
다휘가 조수석의 손잡이를 잡고 우진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우진은 그런 다휘를 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서 쉬어요. 정리 되면 나랑 밥이나 먹어요.” 우진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다정한 말과 표정에 다휘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를 다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우진의 그런 모습에서 어쩐지 연호가 떠올랐다.
잠시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다가는, 자신이 그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다휘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정말 감사했어요. 일 많이 바쁠 시기인데 배려 많이 해주시고··. 다음에 제가 식사 대접 할게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봐요.”
다휘는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들어가려다, 뒤를 돌아 우진의 차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차 안의 우진은 진한 미소를 짓다가는 차를 움직여 골목을 나갔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3일 만에 돌아온 집을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자신의 집을 보며 건물로 향했다.
건물의 건너편 상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로.
.
.
다휘는 어두웠던 방 안의 불을 켰다.
익숙하게 거실의 커다란 창문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휘원과 가족이 된 은편의 재산들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은편은 고아로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그런 은편을 안타깝게 여긴 다휘의 부모님은 은편과 휘원이 연애할 때부터 딸자식처럼 돌보곤 했다.
“할 게 산더미네··.”
다휘는 이번 주 내로 끝내야 하는 작곡 작업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책상 위로 치우지 못한 연호의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든지 연락 줘···.”
연호의 메시지를 되뇌며 들고 있는 펜을 괜히 딸깍거렸다.
왼쪽에 둔 핸드폰을 들었다.
연호들과의 유일한 끈이었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
다휘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들고 망설였다. 어느새 키패드로 연호의 번호도 입력했다.
전화를 걸 것인지 걸지 않을 것인지, 손가락은 수화기 모양의 아이콘 앞에서 공중에 떠 있었다.
그래.
그들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 잠시 떨어진 것이다.
다휘는 이내 핸드폰을 뒤집어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낯선 방문객이 그녀의 집 앞에 당도했다.
딩동-
“어·· 누구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초인종이 울렸다. 다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 밖의 상대를 볼 수 있는 인터폰을 향했다.
“···?”
그러나 화면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장난인가 싶어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딩동-
“···.”
다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인터폰의 화면을 향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 누구세요?”
다휘는 문 너머의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다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등을 돌렸다.
딩동-
네 번째 벨이 울렸다.
다휘는 문을 열어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조금은 거칠게 현관문을 향했다.
철컥거리며 그녀는 잠금장치를 풀어냈다.
“누구세요?”
확-
* * *
쿵쿵!!
“보스! 진정해요!”
“연호야! 다휘가 뭐? 말을 제대로 해봐!”
연호의 행동을 모두가 저지하고 있었다.
연호는 다휘에게 붙여둔 경호원들에게서 연락을 받자마자 분개하여 무기를 챙기고 혼자 본관을 나가고 있었다.
마침 모여 있던 다른 간부들에게 발견 되었지만.
“다휘가 납치됐다고! 가야 돼!”
그의 외침에 모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녀를 납치했단 말인가? 연호의 실력 좋은 경호원들을 제치고.
“잠시만! 상황 파악은 제대로 해야지! 너 지금 너무 흥분했잖아.”
진탁이 연호의 어깨를 잡으며 큰 소리로 호통 쳤다.
그의 말에 연호의 다급했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은호와 진탁, 은국, 민환에 모두의 모임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도담과 로이드에 선우까지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래,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연호는 새삼 현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다휘 소속사 대표가 다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데, 차 속도를 못 따라잡아서 붙여놓은 애들이 늦게 도착했대. 그런데 누가 다휘를 업고 차에 태워서 이동하는 걸 봤대. 차 번호판은 가려져 있어서 안 보였고, 다휘가 핸드폰도 두고 가서 위치추적도 불가능해.”
연호가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히는 데도 없어서 더 막막했다.
“어···. 그럼 저한테 방법이 있는데, 일단 상황실로 가요.” 모두의 침묵 속에 은호가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그녀의 말에 연호는 방법부터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분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