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휘가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단조로운 소리를 들으며, 다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어서, 개운한 기분이었다.
다휘는 상체를 침대의 헤드에 몸을 기대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낮에 세 사람 -도담, 연호, 그리고 기준- 이 가져온 음식 카트는 어디론가 사라져있었고, 침대 옆의 협탁에는 자신의 핸드폰과 죽이 담긴 그릇, 약과 물 잔이 있었다.
그리고 죽이 담긴 그릇은 랩으로 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하얀 쪽지가 있었다.
그녀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서 핸드폰과 쪽지를 함께 가져왔다.
이어 핸드폰을 켜서 그 불빛을 쪽지에 비췄고, 그녀는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휘야. 일어나면 데워서 먹고, 약 먹어. 혹시 잠이 안 오면··· 기다릴게.’
누가 적었는지 흔적은 없었지만, ‘그’를 닮아 정갈하고도 글자들의 간격이 좁은 글씨체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휘는 쪽지와 핸드폰을 협탁 위에 다시 두고, 협탁의 옆에 있는 플로어 스탠드의 등을 켰다.
은은하고 어두운 노란 불빛이 들어왔고, 다휘는 빛에 적응하려는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쪽지를 다시 들어, 미소와 함께 글을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다휘는 죽을 들고 방 안에 있는 전자레인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연호의 생각이 가득했다.
* * *
아침이 되었고 주말의 마지막의 날이 밝아야 했지만, 태양은 먹구름의 뒤에 가려져 있었다.
연호는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책상 위의 두꺼운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는 오늘의 날짜의 란에 붉은색 펜으로 무언가가 적힌 걸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이어리를 들어 올렸다.
“아··· 이런.”
며칠 전, 그는 은호에게서 들은 For Luciano의 대외 사업 건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에 blood bones에 협력을 요청했고, 오늘은 그곳에서 나오는 담당자와 만나는 날이었다.
다휘가 엮여있는 것도 그렇고, 최근 자신들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라 꼭 가야만 했다.
연호는 다휘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계획을 미뤄야 할 것 같았다.
하필 다휘가 아플 때라 두고 다녀오기는 미안했지만, 이는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했으니 연호는 꼭 고급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다.
연호는 핸드폰을 들어 간부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 쓴 수건을 빨랫감 바구니로 던졌다.
시간은 6시였고 아직 이르긴 했지만, 미팅을 위해서는 오늘 분의 업무를 미리 해둬야 했다. 연호는 방 안의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넥타이 색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출근하기 전에 다휘의 방에 잠시 들려서 상태를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는 어두운 그린의 넥타이를 들었다. 그리고 창밖을 잠시 바라봤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에도 끊이질 않더니, 정말 다음 주 초까지 내릴 모양이었다.
* * *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나고, 도담은 자신에게 잠깐 들르라는 연호의 말을 상기하면서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는 귀찮다는 듯, 작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간다.” 도담이 말했다.
도담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에 있는 연호와 민환은 꽤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분주하게 서류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담이 형. 그래··. 잠깐만.”
연호는 서류를 분류하다가는 멈칫하고 그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민환은 연호가 분류한 서류를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출장 서류에 연호의 인감을 찍고 있었다.
“형님. 은호의 파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두 번째 책장, 위에서 3번째 장, 오른쪽에.”
민환은 연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파일을 찾았고, 도담은 분주한 두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긴 하품을 했다.
“오늘이 본부에서 나오는 놈 만나는 날이냐?” 도담은 두 사람이 준비하는 서류들을 흘끗 보며 물었다.
연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8시 넘어가네. 여기서 서울 강남까지는 2시간이지? 민환아. 서류 챙겨서 차 앞에 대기시켜줘. 나머진 내가 하고 내려갈게.”
“네, 형님.”
민환은 연호의 지시에 서류 파일 몇 개를 손에 들고, 도담에게 인사하고서 집무실을 도망가듯이 나갔다.
도담은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는 한숨을 내쉬면서 연호의 분류를 돕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할 말 지금 해.” 도담이 말했다.
연호는 그의 빠른 손동작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이따가 오전 중으로 진탁 형한테 출장 다녀온 거 보고하라고 했어. 그리고 내일부터 훈련 시작하니까 우목이랑 선우는 최대한 쉬게 하다가, 저녁에 가볍게 몸 풀어주고.”
“그래. 남호수랑 백기준도 같이 하면 되냐?”
“어. 그리고 아침에 다휘 잠깐 봤는데 밤에 깨서 죽이랑 약 먹고 잔 거 같더라. 오늘도 잘 지켜봐 주고, 은국 형님이 오후 중으로 도착할 거야. 그것도 확인해줘.”
“알았다. 서류 급한 건 이쪽이냐?”
“응··. 부탁할게.”
도담은 다 분류된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고, 연호는 서둘러 남은 파일들을 챙기면서 서랍에서 그의 새하얀 피스톨을 꺼내들었다.
“·· 가져가게?” 도담이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러자 연호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 응.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본부 사람들은 믿어선 안 돼. 형도 본부에서 있다가 와서 알잖아.”
“·· 그래. 알았다. 조심히 다녀와라.”
연호는 도담의 말에 피스톨을 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소파에 걸쳐둔 검은 정장 자켓을 챙기면서 집무실을 나갔다.
도담은 급한 서류들과 연호의 인감을 챙기려고 하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연호의 집무실 한쪽에 비치된 커피 바(bar)로 향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그라인더에 로빈이 선물로 가져온 원두를 넣고, 핸들을 돌렸다. 곧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커피 머신에 넣어서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뽑아냈다.
한 잔은 에스프레소 잔에 따랐고, 다른 잔은 머그잔에 물과 함께 따랐다.
순간, 아픈 사람이 커피를 마셔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죽기라도 하겠냐는 생각에 그는 커피 두 잔과 서류들을 작은 카트에 실었다.
카트를 끌면서 연호의 집무실을 나가며, 도담은 본관에서 간부의 숙소로 곧장 갈 수 있는 지하통로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도담은 다휘의 방 문을 두드렸다.
연호의 집무실을 노크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이번엔 따뜻한 커피를 생각하여 얼마 망설이지 않았던 건지, 문을 두드리는 모양이 조금 거칠었다.
다휘가 혹여 깨 있을까봐, 조금 기다리니 문 너머로 다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담은 웅웅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질세라, 문을 열고 카트를 밀며 들어갔다.
“어··· 도담 씨.”
다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도담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카트를 방 안에 들여보낸 후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린 도담은 다휘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았다.
그는 다휘의 밝은 표정을 마주하자, 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중절모를 벗어 -일요일이지만, 도담은 일하는 날이다- 카트 위에 두면서 카트를 방의 중앙으로 끌었다.
“우와. 커피 냄새···.”
침대의 헤드에 몸을 기대고 이불을 덮고 있던 다휘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그녀가 두 눈을 빛내자, 도담이 가벼운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오라며 손짓했다.
다휘는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고 조심스레 중앙의 탁자로 향했다. 도담은 탁자의 의자에 걸린 담요를 그녀에게 건넸고, 다휘는 담요를 펼쳐 어깨에 두르면서 의자에 앉았다.
“너, 아침은?” 도담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온 아메리카노 잔을 내밀기는 하지만, 빈속에 카페인이 들어가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아침에 연호 오빠가 다녀가신 후로, 주방장께서 죽 가져다주셨어요.”
다휘는 도담의 눈치를 살피며, 배시시 웃었다.
두 손으로 머그잔을 잡아들자,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다휘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마시고 있어. 나는 서류 좀 할 테니까.”
“네. 오늘도 많이 바쁘세요?”
“차연호, 서민환이 급하게 출장 갔어. 그 녀석들의 일이야.”
“아아··. 그럼 전 조용히 구경만 할게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다휘는 신기한지, 도담이 보고 있는 서류를 함께 보았다.
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가 졸리면, 여기서 자지 말고 침대로 가.”
“네에.”
도담이 별안간 다휘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곧 사라진 미소는 그조차도 모를, 아주 깊은 본능이었다.
도담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 * *
서울 강남, blood bones의 지하 본부의 어느 사무실.
“··· 네. 그랬다고요. 음·· 알겠습니다. 네. ·· 네? 흐음, 그럼 요원 배치는 3명 정도로 할까요.”
한 남자가 책상에 몸을 걸쳐서 서 있었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있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서 책상 위로 가볍게 핸드폰을 던졌다.
그의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서류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 그 파일에는 bloody ellipse의 간부들의 사진과 함께 정보가 쓰여 있었다.
남자는 그의 오랜 습관인 듯, 서류 파일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만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두 자루의 피스톨을 챙기면서 다시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들으셨나요? 처분 명령입니다. ··· 아뇨, 그건 아니고. 세대교체를 하라네요. ·· 네. 10시 30분에, 네. 이쪽은 저까지 4명 배치됩니다. ··· 킥킥. 그것도 재밌겠군요. 이따 뵙지요.”
그는 이내 전화를 끊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어두운 집무실은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져 갔다.
그의 사무실 문의 팻말에는 ‘Hugh Silvers / 휴 실버스’라고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