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 씨·· 저기, 손수건 감사합니다. 제가 세탁해서 드릴게요··.”
“아니, 됐어. 그냥 줘도 돼.”
“그, 그래도요··”
영화관의 한 상영관 출구에서 도담과 다휘가 잿빛의 손수건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다휘에게서 손수건을 그냥 뺏은 도담은 다시 양복 자켓 안주머니에 넣었다.
다휘는 그런 도담의 행동에 어색하게 그의 벽에 기댄 채 화장실에 간 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담은 다휘가 자신을 어색해하고 이 상황에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마 먼저 말을 걸지는 못해서 미묘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 화장실로 가버린 연호가 미워질 지경이었다.
다휘는 애꿎은 바닥을 구두 끝으로 콕콕 내려치며 어쩐지 무거운 분위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녀는 도담과 둘이 있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그가 워낙에 말수가 적어서, 무언가 벽이 높고 두꺼운 사람 같아 다가가기 힘든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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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손을 씻고 있는 연호.
연호는 자신의 SOS에 대한 은호의 도움으로 차 안에서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심에 도착하고 나서도 괜찮은 자신의 상태에 자신감이 생겨 그의 의견으로 영화를 보러 오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볼 수 있는 시간대에 자리 3개가 이어져 있는 영화가 ‘야쿠자를 울리는 99가지 방법’ 이라는 일본 로맨스 장르였다.
그래서 야쿠자와 어찌 보면 비슷한 자신들, 마피아에 대한 내용인 것 같아 자신이 ‘기다렸다가 다른 영화로 보자’며 제안했다.
그런 자신의 제안에도 다휘는 괜찮다며 재밌을 것 같다고 말해줘서, 결국 영화를 보게 된 세 사람이었다.
그녀가 중앙에 앉고 왼쪽으로는 도담이 오른쪽으로는 연호가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야쿠자가 소재인 것치곤 덜 자극적이었고, 마지막 부분은 오히려 감동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감성이 풍부한 다휘는 남자 주인공인 야쿠자가 일반인 여성과 고생 끝에 재회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녀의 반응을 즉각 눈치 챘던 도담은 당황해하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고, 다휘는 영화의 엔드롤이 올라갈 때까지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참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만 그리던 ‘짝사랑 중인 여자’와의 데이트였다. 물론 둘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피아에게 가족을 잃었음에도,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보며 공감을 하고 남자 주인공의 상황을 이해하는 그녀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는 강한 바람이 나오는 건조기에 손을 대충 말리고서 화장실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다휘야, 담이 형!”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였던 두 사람을 구렁텅이에서 빼내는 연호의 밝은 목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쳐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 도담이 연호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의 물음에 연호는 차마 ‘속을 게워내고 왔어.’ 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다휘의 손을 잡았다.
“다휘야. 이제 선글라스 다시 써. 밖에 나가자.” 연호가 말했다.
다휘는 왜 자꾸 자신에게 선글라스를 쓰게 하는지는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별 뜻 없겠지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블라우스의 넥에 걸어둔 검은 선글라스를 쓰자, 연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영화관의 출구를 찾아 나섰다.
연호가 다휘를 끌고 앞서나가자, 도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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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가 두 사람을 끌고 간 곳은 또 다시 어두운 장소였다.
무엇이 시작되는 지도 모르고 그를 따라온 도담과 다휘는 커다란 무대가 있는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오자, 다휘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무대에는 묵직해 보이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자리가 꽉 차있었던 영화관과는 달리 이곳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
“S열에 7, 8, 9번이니까 여기네. 다휘가 중간에 앉아.” 연호가 말했다.
그들이 앉은 곳은 무대가 곧장 보이는 맨 앞의 자리였다.
그녀가 착석하자, 연호가 그녀의 왼쪽에 앉으며 그녀의 귀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이번에는 울지 않도록 해봐.”
연호가 다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의 속삭임에 다휘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곧 좌석의 곳곳을 비추던 천장의 조명이 꺼지며 공연장은 완전한 암흑에 빠졌다.
이내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헬라를 잃을 수는 없소··. 그녀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오.]
굉장히 쓸쓸한 감정이 담겨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열리며, 그 사이로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빛의 중심에는 회색의 세로 줄무늬가 인상적인 검은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은색의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헬라를 구해야 해. 헬라··.]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대사가 마이크를 통해 극장 전체를 울렸고, 그는 제자리에서 서성이더니 무대의 끝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시작된 연극에 다휘는 굉장한 몰입감을 느끼며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연호와 도담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담이 연호를 향해 ‘지겹지도 않냐?’ 라며 입모양으로 말했고, 연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휘처럼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10번 이상 봐서 이젠 대사까지 다 외울 지경이다, 이놈아.’ 도담이 그 말을 끝내 목 뒤로 삼켰다. 그리고 중절모를 벗어 다리 위에 올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휘를 향했다.
무대에 정신이 팔려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를 보자, 도담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도담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다휘를 보기 바빴다.
[보스! 너무 위험합니다. 그들은 헬라 님을 이미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조용히 해! 썩을 놈.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갈 거야.]
[보스! 보스!]
[함께 가지 않을 놈들은 신경 꺼! 나 혼자서라도 갈 테니까!]
헬라의 이름을 부르던 남자는 다른 이들을 외면하고서 다시 무대 밖으로 나갔다.
그가 퇴장하자, 그의 부하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속닥이며 말했다.
[일레입스 헬라! 그 여자는 보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즉에 몰래 처리했어야 했는데!]
[보스가 미련한 거지. 적진 한 가운데에 있다가 우리에게 온 여자라고! 당연히 의심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그 놈의 첫사랑이 뭐라고!]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야? 보스가 움직인 이상, 진짜 단신으로 쳐들어 갈 거라고.]
[지르헨은? 제일 빠른 놈이라면 걔 밖에 없지.]
[그 놈이랑 같이 다니는 코르데한테 물어보면 돼. 아까 로비에서 봤는데! 내가 가 볼 테니, 너희는 특수 부대에게 연락 해!]
그리고 모두가 갈라져 무대 밖으로 사라지면서 커튼이 쳐졌다.
커튼 뒤로 바스락거리며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후, 무대가 다시 열렸다.
천장에서 내려온 빛줄기의 주인공은 굉장히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옆에는 키가 큰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잡은 채 서 있었다.
[베르뷔, 레치오는 굉장히 잔인한 남자에요. 당신이··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헬라··. 일레입스 헬라. 그대는 나를 과소평가 하고 있소. 오늘에야말로 그 놈과의 결착을 내겠소.]
[안 돼요. 레치오의 손에 모두가 죽을 거라고요!]
[·· 입 다물어. 나와의 사랑을 맹세했다면, 그 놈의 이름을 부르지도, 떠올리지도 마.]
금발의 미녀, 헬라가 베르뷔의 팔을 잡으며 슬픈 시선으로 그를 말렸다.
그러나 베르뷔는 헬라의 손길을 내치며 매서운 눈으로 째려봤다.
이내 헬라를 무대 위에 혼자 두고, 그는 정장 자켓 속에서 검은 피스톨을 꺼내며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헬라는 베르뷔가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지켜보더니 이내 주저앉으며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미안해요, 레치오··. 제 욕심이··· 결국 두 사람을 모두·· 나락으로···]
그녀는 이내 얼굴을 가리며 울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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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약 1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흘렀다.
연호는 도담의 말대로 몇 번이나 본 이야기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다휘를 살폈다.
다휘는 여전히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1시간이 지나도록 무대에서 떠날 일이 없었다.
연호는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이 다휘를 따스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느꼈다.
그의 은밀한 시선 끝에는 도담이 있었다.
도담은 언제부터 다휘를 보고 있었던 건지, 그의 시선은 다휘에게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호는 이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지금 자신이 잘못 본 건가?
도담이 왜 다휘를 보고 있지?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담을 바라봤다.
도담은 웃고 있었다.
미미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고, 그의 칠흑 같은 두 눈동자는 다휘에게 줄곧 향해 있었다.
연호는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연호는 더 이상 연극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도담과 다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연극이 절정에 치닫자 다휘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고, 도담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나 연호는 그 장면조차 지켜볼 수 없었다.
이상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와서 그의 기분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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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난 후, 세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다휘는 연극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감상을 연호에게 재잘거리며 얘기했다.
하지만 연호는 웃음으로 일관하거나 간단한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차로 돌아왔다.
연호는 피곤해 보이는 다휘를 뒷좌석에 태웠고, 운전석에는 도담이, 자신은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도심을 뜬 지 10분이 지나자, 침묵 속에서 다휘는 결국 잠들었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연호는 입을 열었다.
“·· 담이 형.”
“왜.”
도담은 운전 중이기도 해서 연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며 출발하고 나서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연극이 끝난 후로 연호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알았고, 다휘가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뭐라 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차에 타서도 조용하던 연호가 꽤 미묘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어쩐지 불안한 직감이 그를 강타했다.
“··· 형이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2년 전에 의뢰 본부에 그 여자지?”
“·· 어. 왜.”
왜 자신의 마지막 연애를 물어보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연호의 물음에 짧게 대답했고, 연호는 이어 말했다.
“형, 알고 있었지? 나 2년 전부터 다휘·· 좋아하는 거.”
도담의 표정이 한순간 싸늘해졌지만, 그는 자신이 운전 중이란 것을 인지하며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휘원이 자신들을 포함한 간부들에게 다휘의 얘기를 할 때마다 -휘원은 굉장한 시스터 콤플렉스였다- 연호가 특출 나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 휘원의 결혼식에 For Luciano가 관여하는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뛰쳐나간 놈인데. 모를 리가 없지.
“그런데?”
“··· 진심으로 다가설 거야. 다휘도 나를 좋아하도록.”
도담이 순간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고, 차체가 앞으로 쏠리며 급정거했다.
연호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눈동자가 도담과 공중에서 마주쳤다.
급정거한 승용차 안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침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