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택의 시간
의기양양,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 웃는 염라대왕과 아닌 척 하지만 궁금해 보이는 안내인 아저씨(?), 그리고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인 저승사자 박겸. 그 세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자니 괜히 죄인된 심정이 든다. 더불어 염라대왕과 마주한 갓 죽은 영혼이라는 게 소문이 났는지 원래 그런건지 주위에 돌아다니던 경호원들이며 저승인들이 흘깃흘깃 보는 걸 넘어 아예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이라 한층 더 부담스러워진다.
‘할머니. 좀 더 착하게 살 걸 그랬나봐요. 왜 죽어서까지 이런 시련이.’
또르륵. 은라는 괜히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원래의 삶, 이은라로서 살아왔던 지난 시간이 아깝고 자신의 죽음이 슬펐다. 할 수만 있다면야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요, 라는 자신의 한 마디가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면 차마 입을 열 용기가 안 났다. 단란한 일가족의 행복을 깨트린다고 생각하니 자기가 어렸을 적 할머니 손에 혼자 키워지면서 겪었던 설움이 생각났다. 할머니도 엄마와 아빠의 빈자리에 늘 채워지지 않는 슬픔을 느끼며 살다 가셨다. 자신의 선택에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다니. 그 중압감은 평생 선량하게 살아온 은라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우물쭈물. 서류봉투를 껴안고서 땀만 삐질삐질, 눈만 뎅구르르 굴리는 은라와 그런 은라를 바라보며 무작정 기다리는 세 남자의 풍경. 그렇게 넷이서 얼마나 있었을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 싶었는지 안내인이 슬슬 염라대왕을 빤히 쳐다보며 눈치를 주는 듯 했다. 염라대왕이 흐음- 하면서 지긋이 은라를 쳐다보다가 허리를 쭈욱 늘리며 말했다.
“이러고 있다간 저승 해가 다 지도록 서서 기다려야될 노릇이군. 내 알았으니 그만 눈치주시지, 문 보좌관.”
“알아차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대왕.”
지금껏 안내인으로만 생각했던 그 분이 ‘문 보좌관’이라는 직책이 있는 분이란 걸 알자 은라는 한층 더 부담이 커졌다. 한편으론 정말 조선시대 내시같은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하도 말을 안 해서 그런지, 생각하는 시간을 주겠다는 것인지 염라대왕은 아예 몸을 뒤로 돌아 다시 꽃구경을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하루 정도 고민할 시간을 주면 충분할 테지. 문 보좌관, 하루동안 머물 곳을 마련해주게. 원한다면 식사도 준비해주라 하고.”
앗싸. 시간 벌었다! 은라는 후유, 하고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왕. 바로 안내하지요.”
“감사합니다, 대왕님!!”
당장의 위기를 넘겼단 생각에 앗싸리하고 신이 난 은라는 냉큼 대답을 했다. 문 보좌관은 곧바로 은라에게 “자, 이쪽으로.” 하며 또다시 안내인 노릇을 했고 은라는 열심히 문 보좌관을 따라갔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박겸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홀로 염라대왕을 마주한 채 그는 비로소 신입답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박겸은 저승사자로서 특이한 상황에 놓인 이 영혼을 떠맡았기에 이승으로 다시 가든 아니면 이대로 저승행을 하게 되든 따라다니며 확실히 마무리를 짓고 서류 작업을 책임져야 하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판결을 내릴 줄 알았던 염라대왕이 무려 선택할 기회를 주며 하루라는 시간까지 주어버린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가롭게 꽃구경에 한창인 염라대왕의 뒤통수만 바라보던 박겸은, 이미 문 보좌관을 따라 졸졸 가며 자신따윈 망각해버린 듯한 이은라에게도 황당함을 느꼈다. 그러다 큰 마음을 먹고 염라대왕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대왕, 저는 이 영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
“아직 안 갔느냐?”
“예?”
시큰둥한 저 표정. 어째 이은라가 있을 때와 표정이며 분위기며 말투며 확 온도차이가 난다. 냉랭한 분위기에 익숙한 저승사자 박겸도 왠지 간이 쪼그라든다.
“그럼 자네도 선택하거라.”
“무엇을 말입니까, 대왕?”
이은라처럼 다시 태어날지, 말지 정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이미 저승에서 저승사자로 살고 있는데 그 말씀은 말대꾸를 했다고 절 죽이시겠다는 것인지요? 박겸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나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저승사자라서 그런 것일까. 염라대왕은 이은라를 대할 때처럼 상냥하지도 굳이 고민할 시간을 줄만큼 상냥하지도 않았다.
“저 영혼처럼 여기 하루 더 있든지 아니면 그냥 가든지. 니가 안하고 그냥 가겠다면야 대충 다른 여기서 다른 저승사자를 임명해서 붙이든지 하면 되겠지. 넌 골치아픈 일 하나 더는 것이니 좋지 않으냐?”
게다가 말하는 걸 보면 차라리 저 영혼을 포기하고 아예 나가 버리라는 투였다. 다신 저 영혼을 맡지 말라는 듯한 모습. 그러길 바라는 듯한 모습. 이건 내 착각일까? 설마, 대왕께서 오늘 처음 봤을 저 영혼을 알기라도 하시는 걸까? 잠깐 든 가망성 없는 생각에 스스로도 당황했던 박겸은 그 생각을 휘휘 날려버렸다. 그리곤 이내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저는 한 번 맡은 이상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왕. 저 영혼을 제가 데리고 왔으니 나갈 때도 제가 데리고 가서 어떤 선택을 하든 마무리되는 모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호라. 생긴 건 날라리 한량같더니만 고집은 꽤나 있도다.”
들으라는 듯,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혼잣말이라는 듯 염라대왕이 툴툴 거리듯 말했다. 그 말에 박겸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아니 하지 말아야 하고 아주 잠깐 혼란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염라대왕이 말했다.
“그럼 너도 방 하나 줄테니 하루 있다 가거라.”
“예? 저도요?”
“그럼 여기에 이은라를 바락바락 쫓아가겠다 하는 저승사자가 너 말고 또 있더냐? 길 잃어버리기 전에 어서 문 보조관이나 쫓아 가거라. 걸음이 빨라 벌써 많이도 갔도다.”
그 말에 뒤를 돌아보는 박겸. 정말 언제 그렇게 빨리 간건지 문보좌관과 이은라가 손바닥만하게 보인다.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대왕.”
“어허. 빨리 가래도.”
“예, 대왕.”
그리곤 부리나케 저승사자가 저승가기 싫다는 영혼들 잡으러 이승을 뛰어다니던 실력으로 재빨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암만 걸음이 빠르다고 해도 뛰는 것보다야 못하고 거기다 체력 좋기로 유명한 저승사자가 맘먹고 뛰니 금방 따라잡는다.
“어? 왜 왔어요?”
“염라대왕께서 저도 하루 같이 머물라 하셨습니다, 보좌관님.”
“으음, 그럼 방을 2개 마련해야겠군요. 방이 있으려나.”
“아, 저는 아무 방이나 주셔도 됩니다. 창고도 괜찮습니다.”
“허허. 어쨌든 이 궁에 찾아온 손님이니 그리 홀대하지 않을 겁니다.”
“보좌관님, 여기는 밥 언제 먹어요?”
“아아. 방을 먼저 정한 뒤 사람을 보내지요. 먹고 싶은 것이 따로 있습니까, 처자?”
“으음. 이 곳 음식 먹고 싶어요! 이곳 음식! 특산물!”
“허허. 주방 사람들에게 물어보지요.”
“앗싸!”
“그럼, 저승사자께서는 뭘 드시겠습니까?”
“앗. 저도 챙겨주시는 겁니까?”
“이유야 어찌됐든 머물게 된 손님이면 제대로 대접해야 맞지요.”
“이은라씨와 같은 것으로 주십시오. 두 번 일 하지 마시고요.”
“일이야 내가 하나. 주방 사람들이 하지요. 부담없이 부탁해도 될 것을. 어쨌건, 두 분 모두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방이..... .”
세 사람이 만나 이내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염라대왕이 중얼거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만에 맞는 손님이라 그런지 문 보좌관도 안내인 노릇을 하는 것에 제법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염라대왕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뒤 염라대왕은 가만히 아까 하던 모습 그대로, 아무도 다녀간 적 없다는 듯 꽃구경을 즐겼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염라대왕의 옷자락이 살랑 나부꼈다. 그 바람에 묻어온 어떤 향기를 맡으며 염라대왕은 눈을 감았다. 그리운 뭔가를 생각하듯, 추억하는 듯한 그윽한 눈빛. 염라대왕이 머무는 궁의 넓은 정원과 그 정원을 감싼 높은 담벼락, 그 담벼락 너머 그 어딘가에서 여기까지 흘러오는 어떤 향. 그 향을 만들어 바람결에 실어보내는 이를 생각하며 염라대왕이 사박사박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염라대왕의 뒤를 바람같이 날쎈 경호원 사내들이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