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여백으로 가득한 공간. 마치 우주가 하얗게 칠해진 듯 끝없이 펼쳐져있는 이곳에 목도를 든 사내가 발을 들였다.
뚜벅 뚜벅
발자국소리가 빠르게 퍼지면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무한한 공간을 수색해야했기에 돌아와 보고를 하는 법은 없었다.
발소리가 전부인 공간에서 연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찾아온 걸 알 텐데 아직 감감무소식인걸 보니 그냥은 안 나오려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주인장한테는 생각을 고쳐먹을 계기가 필요해보였다. 연하는 손에 쥔 목도를 쳐들었다.
“천박한 자로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하거늘.”
연하가 이 일대를 박살내려고 할 때였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손님이 왔는데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그러면서 연하는 바뀐 환경을 살펴봤다. 어느 샌가 일대는 신전으로 변해있었다. 그것도 고대 거인의 신전으로.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은 하나하나가 잭이 심은 콩나무처럼 높고 거대했고, 양쪽으로 열을 맞춰 서있는 조각상은 한눈으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웅장함이 신전을 가득 메운 존재감의 주인은 아니었다.
신전의 끝에 놓인 백색의 화려한 의자. 평범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의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원인은 거기에 앉아 있는 자였다.
은빛 장발에 왼쪽 눈을 검은색 안대로 가린 남자. 고고한 붉은 눈을 통해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신이었다.
“기어이 나에게 송곳니를 들이미는구나.”
“저번에 말했잖아. 목 잘 닦아두라고.”
육안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먼 거리였지만 둘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연하는 가장 존엄한 존재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는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만큼 약하지도 않았고.
“하찮은 인간이여. 진정 네게 승산이 있다고 보느냐?”
“승산이야 없으면 만들어야지. 잘 봐, 기적을 보여줄 테니.”
“네가 이곳에 있는 것부터가 기적이다. 그 이상의 기적은 없어.”
“어디 두고 보자고.”
연하의 검은 머리가 금색으로 변하면서 백색 빛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날개가 등에서 돋아났다. 그 모습은 천사와 같았다.
“천사의 힘인가. 제법 그럴듯하다만... 그래봤자 흉내 내기다.”
턱을 괴고 지켜보던 신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신의 등에서는 백색이 아닌 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났다. 자그마치 여덟 장이나.
날개의 수는 힘을 가늠하는 척도. 다시 말해 둘 사이에 날개 여섯 장만큼의 힘의 격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연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오너라. 내 직접 네 힘을 거두어주마.”
드디어!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연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올라오기까지 있었던 약속과 맹세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목도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탓!
연하가 물수제비처럼 신을 향해 쏘아졌다.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이 된다. 그것이 그가, 그리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이 된 악마와 악마를 죽이고 신이 되려는 인간. 신이 죽은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결전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