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봐,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기억을 더 잘하시네?”
영채가 대신 받아쳤다. 순정은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괜히 쑥스러운 듯 연신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고 있었다.
“한때 거의 맨날 왔었거든. 혼자서.”
“네. 맞아요. 이 근처에서 일 할 때였는데 거의 맨날 왔었어요. 국밥이 맛있어서.”
“많이 묵거라. 오늘도 지난번 맹키로 어디 떠나기 전에 온 거 아이제?”
할머니가 테이블 위에 국밥을 하나씩 얹어주며 말했다.
“네. 한동안 멀리 갈 일 없어요. 잘 먹겠습니다.”
“묵고 모자라면 얘기 하거라. 우리 영채 친구니까 특별히 서비스 더 줘야제.”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둘이는 어떻게 아는 사이고?”
할머니가 영채와 도하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밥을 뜨던 영채의 숟가락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아, 그러니까… 제 친한 동생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 동생의 친구거든요, 영채씨가. 하하.”
“아, 그래? 니가 오빠가?”
“네. 제가 오빠.”
“그래, 그래. 많이 무라. 모자란 거 있으면 더 갖다줄꾸마.”
“네.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다시 주방으로 갔다.
배가 안 고프던 사람도 배가 고파질 만큼 도하는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네요. 엄청 맛있게 드시네.”
영채가 말했다.
“오랜만에 와서 더 맛있네요.”
도하가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그 처자는 누구예요?”
영채가 새침스럽게 물었다. 영채의 질문에 도하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순정도 뜨끔해서 영채를 쳐다보았다.
“글…글쎄요.”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할머니는 뚜렷이 기억하시던데?”
“그러게요. 몰랐는데 제가 그때 이후로 기억 몇 개를 날려버렸나 봐요.”
“그때라면…”
“그 무병…낫고 나서.”
“아…….”
“근데 내가 아는 처자가 있었나? 누구지.”
도하가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순정이 긴장한 얼굴로 도하의 표저응ㄹ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영채는 피식 하고 몰래 웃음을 지었다.
식사를 끝낸 뒤 도하가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자 할머니가 그의 손을 극구 막았다.
“돈은 됐다, 고마.”
“아니에요, 할머니.”
“우리 영채 친구 아이가. 어째 돈을 받노? 가라 고마.”
“에이, 그래도 받으셔야죠.”
“그래. 받아, 할머니. 손님도 별로 없는 거 같구만?”
“됐다, 됐다. 그 돈으로 밖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묵거라.”
할머니가 강경하게 영채와 도하의 등을 떠밀었고 도하와 영채는 이미 국밥집 문밖으로 나가 있었다.
“그럼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땐 꼭 돈 받으세요.”
“오냐, 오냐. 가거라. 영채 니는 10시다이!!”
“알았어.”
이내 국밥집 문이 ‘탁’하고 닫혔다. 영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못말린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도하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맥주 한잔 할래요? 국밥 얻어먹었으니까 제가 쏠게요.”
“좋아요. 콜!”
영채가 밝게 대답했다. 도하도 그런 영채를 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국밥도 맛있고 할머니도 되게 친절하신데 그에 비해 손님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SNS에 올려본 적 있어요?”
“전에 해봤는데 별 효과는 없었어요. 제가 SNS에 친구도 별로 없고.”
“제가 나중에 시간 나면 홍보 영상 하나 만들어드릴게요.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와. 진짜요?”
“네. 영상 만들어지면 SNS랑 블로그에 올려 봐요. 저도 올려볼게요.”
“그래준다면 저는 고맙죠.”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은 시장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뒤에서 순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영채가 몇 걸음 걷다가 순정이 오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가. 나 어디 좀 들렸다가 집으로 갈게.”
순정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디에 들를 데가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하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영채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다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영채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순정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순정을 뒤로 한 채 도하와 함께 시장 길을 걸어 나갔다.
맥주 집에서 영채와 도하가 마주 앉았다. 맥주 한잔씩을 주문한 뒤에 도하가 말했다.
“나 다음 주부터 학교 가요.”
“아, 맞네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평일에 하던 일은 다 정리하셨어요?”
“네. 오랜만에 학교 갈 생각하니까 좀 설레요.”
“그럴 거 같아요. 나도 졸업한지 꽤 됐잖아요. 가끔 캠퍼스 안 걷거나 학식 먹던 게 그리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럼 나중에 학교 한번 놀러 와요. 캠퍼스 안도 걸어보고 학교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게.”
“네. 그럴게요.”
“구직은 잘 돼가요?”
“오빠가 전에 말했던 이벤트 회사랑 실용음악학원에 어제 지원해놨어요. 일단 기다려보려고요.”
“아, 그랬구나. 잘 될 거예요.”
“고마워요. 오빠도 학교생활 파이팅!”
영채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그런 영채를 보며 도하는 소리를 내어 하하 하고 웃었다. 도하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 영채도 덩달아 웃었다.
잔을 비우고 난 뒤 몇 번이나 맥주를 더 주문했다. 연거푸 마시니 곧 취기가 올랐고 영채는 기분이 들떴다. 귀신이 곁에 없이 홀몸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간이 꿈만 같았다.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지만 영채에게는 오랜만에 가져보는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이었다.
취기가 오른 영채는 평소보다도 더 많이 웃었다. 혼자서도 싱글싱글 잘 웃는 영채에게 도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채가 웃는 모습을 보며 도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영채의 통금 시간 때문에 밤 아홉시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기 아쉬웠지만 뭐, 또 만나면 되니까 라고 도하는 생각했다.
영채의 집 앞까지 도하는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밤공기가 피부에 선선하게 닿으며 기분까지 시원해지는 듯했다. 영채는 까만 하늘을 쳐다보며 여전히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 도하와 눈을 마주친 채 웃음을 짓기도 하고 깔깔깔 소리 내 웃기도 했다.
술기운에 영채가 비틀거리면서 영채와 도하의 몸이 자주 맞부딪혔다. 영채가 한 번씩 다리를 휘청거릴 때마다 도하는 넘어지지 않게 영채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술의 힘 때문일까. 어색하지 않았다. 맞잡은 두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영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잡았던 손을 놓고 마주 섰다.
“들어가요. 문자할게요.”
도하가 말했고 영채는 대답 없이 미소를 띤 채 도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하는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영채와 눈이 마주친 상태로 도하가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이에 영채의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순식간에 도하의 가슴팍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쿵쾅쿵쾅’
도하의 심장소리가 영채의 귀로 직접 전해졌다. 영채가 살짝 몸을 일으키며 도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그 순간에 도하는 영채의 얼굴을 살피려고 머리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좀 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도하의 발그레한 두 볼이 영채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귀여워……”
작정한 행동은 아니었다. 상상을 해본 일도 아니었다. 어디서 흘러온 용기였을까. 영채의 입술이 도하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급하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입술이 닿자마자 온몸으로 그의 온기가 전해오는 듯했다. 전깃줄에 닿은 것처럼 몸이 찌릿해오는 것을 느끼며 영채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도하가 다소 놀란 얼굴로 영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채는 도하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번에는 도하가 먼저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영채의 입술을 덮었다. 그의 두 팔이 포근하게 영채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영채의 두 손바닥이 자연스레 도하의 등을 감쌌다. 눈을 감은 채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은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
아침이 밝았을 때 영채는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보니 시계는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도하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속은 좀 괜찮아요?
도하의 이름을 보는 순간 영채는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뭔가 스멀스멀 떠오르려 하는데 꿈인지 실제의 기억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영채의 시선에 순정의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순정은 침대 옆에 선 채로 영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