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회장은 차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넌 이리도 애가 정이없어서 어떻하니."
"에이 바빠서 안왔지. 선물 꼬박꼬박 보냈잖아."
"부모마음이 그런게 아니에요 그게."
신회장은 딸의 어깨를 잡고 떼어낸 뒤
두 눈을 본다.
"일 년, 엄마도 이제 늙었어. 뭔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 년은 집밥먹고 집에서 자고 해. 알겠어?"
차라리는 시선을 피한다.
"배우 일이라는게 회사원처럼 출퇴근하면서 하는게 아니라, 오래 달라 붙어있어보려고 노력해 보려고 하긴 해볼께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응?"
"누구닮아서 예쁜데."
"허허, 애인이도 저녁먹고 가."
"네 회장님."
"어째 딸보다 딸매니저가 더 내 딸같아."
세단의 운전석 문이 열린다.
"회장님, 들어가보겠습니다."
김비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김비서도 저녁하고 가지?"
"아, 전 가정이 있는 몸이라. 퇴근시간지났거든요."
"그래 그래 조심해서 가게."
"네. 내일 뵙겠습니다."
김비서가 차를 몰고 떠난다.
세단이 지나가자 그 뒤에서
부녀의 상봉을 지켜보던 관객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면바지를 입고 팝콘 통을 가슴팍에 껴앉은 사내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지 팝콘을 우왁스럽게 씹는다.
아그작아그작.
신회장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반가운듯 입을 동그랗게 말고 웃으며 수면바지 남에게로 다가간다.
'동네친군가.'
아버지가 건너편 길가로 가자
차라리는 이사짐센터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언니, 인사안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뭐, 누군데?"
윤매니저의 말에 차라리가 뒤를 돌아본다.
뭐가 그리 좋은건지, 옆집남자로 추정되는 잠옷바지남과
신회장이 같이 팝콘을 나눠먹으며 웃고있다.
"모르는 사람이야. 냅둬."
"아.. 아닐건데요 언니."
신회장은 기여코 잠옷바지남의 손목을 질질 끌고와서
차라리와 인사시킨다.
'아무리 동네라지만 잠옷바지라니..'
차라리는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와 눈도 마주치지않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
"차라리씨, 이렇게 또 봅니다?"
차라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이 목소리.
이 놈.
몰랐는데, 이 남자.
한국에서는 흔치않은 고깔모양의 수면모자까지 쓰고있다.
고깔의 끄트머리에 하얀색의 털뭉치공이 달려있는 그 모자다.
생글생글 웃고있지만, 차라리는 진심으로 이 남자의 명치를 때리고싶다.
강은로다.
"어,어어,어떻게 여기."
"어떻게는요. 제가 해야 될 질문인데, 제 옆집에 이사하시나보네요."
"뭐야 벌써 둘이 아는 사이야?"
"네 제 회사 소속배웁니다. 아시는 분인가봐요?"
"어? 응? 내 딸인데? 어디 미소엔터? 그게 강동생껀가?"
"네 어쩌다보니, 얼마 안됐습니다. 아 따님이셨구나. 차라리는 그럼 예명인가보네요. 본명이 신라리씨?"
은로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차라리는 안면피부와 안면근육이 따로 놀면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게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차라리가 본명맞아요."
"아 복잡한.."
은로는 신회장에게 시선을 돌린다.
"뭔가? 그 표정? 아닌데?"
"어찌됐건 같은 동네주민됐네요. 반가워요."
은로는 손을 더 높이올려 차라리의 코 앞까지 댄다.
차라리는 어깨를 올려 이상한 자세로 은로의 손을 쥐고 악수한다.
"어~ 이왕지사 이렇게 된거 저녁이나 같이 하지 강동생. 내가 모르는 이야기도 좀 하고,"
"저녁벌써먹었습니다."
"그래요. 아버지 오늘은 가족끼리 식사하고, 다음에 다음에 같이."
"그래도 두 번 먹을 수 있죠. 가실까요."
은로는 당당한 걸음으로 신회장의 저택으로 향한다.
차라리는 윤매니저를 돌아본다.
윤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단 듯 고개를 젓는다.
신회장은 이 상황이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며 은로의 뒤를 따라간다.
"딸 두명, 집 가자. 춥다."
신회장은 인부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뭐뭐야? 애인아 너 지금 너 너 지금 이 상황이해돼?"
"언니집 옆집이 강회장님 집이네요."
"너 지금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 변했어 너."
"언니일이면 제 일이죠. 근데 강회장님.. 뭔데 저렇게 돈이 많데요?"
윤매니저가 은로의 거대한 저택을 본다.
그 시선을 따라 차라리도 저택을 본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정원, 그 너머의 하얀 분수와 궁궐같은 저택.
"이런... 집이 이 동네에 있었나..?"
띵, 오븐에서 알람소리가 울린다.
오븐이 열린다. 노릇노릇한 빛깔의 스테이크가 오븐펜에서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고있다.
가정부 두 명이 넓은 주방을 움직이며
한참 요리그릇을 내어낸다.
기다란 연회용식탁에 차라리가족과 윤매니저, 강은로가 둘러앉았다.
신회장 옆의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은로씨 요새 얼굴보기 힘들어요?"
고운 목소리지만, 탄탄한 힘이 느껴진다.
"넌 좀 떨어지고.."
"엄마아. 오랜만에 딸봤는데 너무 차가운거지."
차라리가 여인의 옆구리에 폭 안겨 떨어질 줄 모른다.
상석에 앉은 신회장이 꼭꼭 씹은 음식을 삼켜고 입을 연다.
"그러게 강동생, 갑자기 왠 사업이야? 난 어디 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지."
"누가 부탁해서. 잠시 맡은겁니다."
"재주도 용해요. 아무리 부탁이라도 그렇지. 그 망해가는 회사를 덥썩.."
"어머니, 제 소속사거든요?"
"경영손실이 네 책임이니? 사실관계는 명확히 해야지."
차라리가 엄마의 옆구리에서 떨어진다.
그녀는 강은로를 한 번 째려봤다가 시선을 거둔다.
요리그릇에서 고기를 크게 든다.
"애인아 많이 먹어."
애인의 접시에 고기를 담아주려했으나
이미 접시 위에 음식이 가득 담겨있다.
"이미 많이 먹고 있구나."
차라리는 고기를 다시 요리그릇에 되담는다.
"참 예쁘게 잘 먹어. 참, 애인아, 그럼 황사장은?"
신회장의 물음에 윤매니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아마.. 비영리기업 자문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독일 에버트재단."
은로가 대신 답해준다.
"아, 맞습니다. 독일가셨습니다."
신회장은 만족스럽단 듯 고개를 끄덕인다.
"라리야. 네 엄마가 늘 말했지? 황사장님은 원체 사업체질이 아니라 정치체질이시라구. 올해 딱 예순이시니, 엄마말대로 말년 운세따라 정치하러 가셨잖니, 늘 엄마말만 잘들으라니
까."
"네...네... 아버지."
"신회장님, 정말로 사모님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아, 애인이는 몰랐나?"
신회장이 부인의 손을 꽉 쥐어잡는다.
"우리 장모님이 이북에서 대단한 무녀셨거든. 그래서 그런지 우리 마누라도 촉이 굉장히 굉장해."
부인이 신회장을 바라본다.
"이 이는 그런 이야기를..."
은로가 불쑥 끼어든다.
"재밌네요. 제 할머님도 무당이셨는데."
차라리는 갑작스런 이 초대손님이 마음에 들지않는다.
"식사 끝나고 모여서 굿판이라도 벌이면 되겠네. 설마 저 따라서 이 동네로 이사오신거에요? 정말 소름돋으려고 하거든요?"
"누구? 우리 강동생말하니?"
"그럴 일이 있어요. 아버지. 유명배우가 겪어야하는 고충같은거. 너무 침범해대네요."
"그런거 아닌데.. 이 동네로 침범한건 차라리씨 쪽이죠."
"희한하네. 둘이 처음보나? 강동생 이 동네 산지 꽤 됀걸로 아는데.."
"십년넘으셨죠?"
"십년이요?"
"그치, 너 독립하기 전에도 옆집살았던걸로 기억하는데, 어째 둘이 초면이지?"
"제가 이래저래 바빠서."
은로는 묵묵히 고기를 씹는다.
"강동생, 우리딸 처음보나?"
"글쎄요. 티비에서는 많이 봤는데, 기억력이 안좋아서."
"아빤 왜 계속 동생동생거려요? 아들뻘인데, 아빠도 이상해."
"호형호제하기로 했다. 앞으로 네 삼촌이야 응? 잘 모셔라."
"이런 급작스런 전개. 마음에 들지않네요. 아버지, 강사장님. 두 분의 친목은 두 분 사이에서만 다루세요. 저까지 끼어들게 하지마시고, 예상보다 빨리 집 나가야겠네요."
웃음소리가 들린다.
"엄마, 딸이 집나간다는게 재밌어요?"
"그냥. 집이 시끄러워서. 오랜만에. 웃기잖아."
부인이 입을 가리고 본격적으로 웃기 시작하자,
신회장도 그 모습을 보고 덩달아 크게 웃는다.
씁쓸한걸 씹는 표정의 차라리만 빼고,
윤매니저와 강은로도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어느새, 도시에 어둠이 내린다.
가로등 불빛이 샛노랗게 거리를 색입히고,
초봄의 풀벌레들이 길가의 풀숲에 몸을 숨기고 노래한다.
은로의 정원에서는 풀벌레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일찍 깬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사가 끝났는지,
이삿짐차량들로 꽉 막혔던 동네길이 휭하다.
깨끗한 길 위에 군데군데 테이프조각이 붙어있다.
잠옷차림의 은로가 담벼락에 쪼그려앉아
테이프조각을 줍는다.
따라나온 차라리는 가벼운 옷차림에 기다란 가디건으로 몸을 여미고 있다.
"강사장님."
"네"
"윤매니저한테 들었어요."
"네"
"이렇게 저렇게 오해한건 죄송하게 됐어요."
"오해하실만했죠. 충분한 설명도 없이 그런 행동을 했으니."
"그래도 사람 감정이라는게 쉽게 왔다갔다하는게 아니라. 아직 강사장님이 좋다고는 말씀못드려요."
"이해합니다."
"저 그렇게 나쁜사람도 아니구요."
"압니다."
"회사건 동네건. 생활반경이 많이 겹치는데. 오며가며 서로 불편한 표정은 안지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차라리가 손을 내민다.
쭈그려앉아있던 은로가 그녀를 올려다본다.
"잘 지내봐요."
은로가 무릎을 탈탈 털며 일어난다.
차라리의 손바닥에 이질적인 감각이 든다.
은로가 주운 테이프조각뭉치를 차라리의 손에 건내줬기 때문이다.
차라리는 손바닥에 붙은 테이프조각뭉치를 떼어낸다.
이미 은로는 길건너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잘 안지낼거에요?"
차라리가 은로의 뒷통수에 대고 소리지른다.
약간은 약이 올라있다.
은로가 자신의 저택 대문 앞에 선다.
끼이잉 텅텅,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은로는 그제서야 차라리를 본다.
손을 흔드는 남자.
잠옷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남자.
고깔모자를 쓴 남자.
남자가 싱그럽게 웃는다.
봄풀의 싱그러운 향기가 밤공기를 가득채운다.
"저 차라리씨 좋아해요."
남자는 고백을 남기고 담벼락너머로 사라진다.
"아.. 그러시겠죠."
차라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손에 거머쥔 테이프조각뭉치를 쥐었다폈다한다.
그녀는 이 밤의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편안한 집, 편안한 동네.
이사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