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방 빼.”
“왜? 어디로?”
“건넌방 있잖아? 최대한 빠르게 옮겼으면 좋겠는데.”
아침부터 이건 무슨 날벼락이야.
그러니까, 처음으로 네 사람이 앉아 있는 아침 밥상이었는데. 엄마의 갑작스런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목소리만 내용에 안 어울리게 엄청 다정하다. 내가 방을 옮기는 게 이미 상의된 일이기라도 한 듯.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반박도 못 하고 잠자코 있었다.
“건넌방? 옷 방이잖아. 빛도 하나도 안 들고 좁아 터졌는데. 아니, 근데 왜?”
“저 출근 준비해야 돼서 먼저 일어날게요.” 내가 따지기 시작하자 언니는 벌떡 일어나서 자기 그릇을 개수대에 갖다놓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치사하긴.
“이 사람 작업실로 쓰게.”
어머? 헛웃음이 나왔다.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져서 엄마 옆자리에 앉은 신우진 씨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게 싫어서 오래도 안 봤지만. 사실 원래 같았으면 이쯤에서 ‘네’하고 져줬을 텐데, 그러기가 싫었다. 그냥,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다.
“옷이 한 가득인데 그건 다 어디로 옮겨?”
“엄마 옷 방에 자리 많으니까 거기 넣어줄게. 그럼 되겠지?”
“작업실이면…엄마 서재도 있잖아?”
“거기는 엄마가 주로 쓰니까. 작가는 퇴근 시간 없이 일하는데 둘이 쓸 수도 없고. 불편하잖니.”
“왜 하필 내 방이야?”
“거기가 2층이라 조용하고, 채광도 좋고 딱이라서 그래. 작가는 환경이 중요하잖아. 일 하는 사람한테 배려를 해줘야지.” 엄마는 아랑곳 않고 타이르듯 말한다.
“대단한 예술가 납셨네.” 차마 크게는 말 못하고 벙긋거리며 의도적으로 그 남자를 쏘아보았다.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데도 한 마디도 안 한다.
“어쨌든. 가구랑 이것저것 새로 들일 것도 있으니까 월요일 전까지 다 옮겨주렴. 알아들었지, 딸?”
오늘 내일 안에 다 해결하라는 소리다. 고분고분 ‘알았습니다-’하기도 싫어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일어섰다.
방으로 올라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치 없게 찬란한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내 방과 옷 방은 올라오는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언니와 내 옷이 잔뜩인데 언제 다 치우지? 또 가구는 어쩌고?
“너, 짐만 챙겨! 가구는 사람 부를게! 오후에 오라고 할 테니까 그 전에 정리해두면 좋겠지?”
아래층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그렇군.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군.
오전에는 모든 옷가지와 행거를 빼서 엄마의 옷 방으로 옮기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다 갔다. 언니 것까지 챙기느라 일거리가 두 배였는데. 출근하기 전에 언니가 슬쩍 용돈을 쥐어주고 가서 참는다. 막상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남자는 무슨 미팅이 있다며 엄마가 데리고 나갔다.
“젠장.”
마지막으로 무거운 겨울 코트와 패딩을 꾸역꾸역 행거에 걸면서 중얼거린다. 이게 생각보다 중노동이라 가을인데도 등에 땀이 났다. 겨우 끝냈구나. 그러나 숨 돌리는 것도 잠시. 오후에 가구를 빼러 온다고 하니 쉴 새 없이 방에 있는 것들을 챙기러 가야만 했다.
“젠장. 젠장.”
막 방에서 나와 올라가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뭐야. 벌써 사람이 온 거야? 아직 짐은 못 쌌는데? 걸음을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넘기며 허겁지겁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아아.”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문 밖에 서 있던 것은 신우진 씨였다. 가구 옮기는 사람일 줄로만 생각했다가 예상치 못 한 얼굴을 보고 몹시도 당황해버렸고. 나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눈에 왜인지 압도된다.
“…현관 비밀번호, 모르시나 봐요?”
“모른다는 것도 방금 알았어.”
“0526이에요. 금동이 생일.”
“그렇군. 들어가도 되나?”
생각해보니 문은 열어 놓고 내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서둘러 비켰다.
“엄마는요?”
“미팅 끝나고 일이 있대서. 중간에 헤어졌어.”
“아.”
그는 들어오면서 재킷을 벗었다.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고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왜요?”
“단추 풀렸어.”
단추? 그 말에 뜨거운 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깜짝 놀라서 옷을 봤다. 먼지 쓸 걸 생각해서 낡은 체크무늬 셔츠를 꺼내 입고 있었는데, 두 개만 풀었던 단추가 하나 더 풀려서 가슴팍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볼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그리고 저 인간은, 못 본 척이나 해주지, 민망하게! 서둘러 단추를 목까지 잠그는데 귓불이 화끈해졌다.
“여자애 혼자 있는데 이삿짐센터 남자들 들락거리면 위험하니까 온 거야.”
나를 잔뜩 당황시켜놓곤, 자기는 감정이라곤 없는 말투로 그렇게 말한다. 옷 갈아입고 방에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라고 하고는 쑥 들어갔다. 젠장. 젠장. 젠장. 문 열어줄 때 속옷이라도 보인 건 아닌지.
생각보다 많이 늦은 ‘오후’에 도착한 사람들은 내가 내내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침대며 책상이며 화장대 같은 것을 건넌방으로 옮겨놓고 떠났다. 그 동안 신우진 씨는 계단 난간 쪽에 서서 줄곧 자리를 지켰다. 솔직히 말하면 이삿짐센터의 남자들보다도 이 사람이 더 낯설고 불편한데도.
군더더기 없고 프로페셔널했던 사람들이 사라진 후 텅 비어버린 내 방-이제는 나의 옛 방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모아두었던 책이나 이불 같은 것들을 싸들고 건넌방-이제부터 내 방에 들어왔다.
다소 좁고, 어두컴컴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벽. 그래도 어쩌겠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제일 먼저, 원래 방에서 떼어온 남자친구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침대 머리맡에 붙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버릴 것 버리고 싹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스탠드 조명을 켜고 바닥에 앉아 책상 서랍을 모두 빼냈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 한참 뒤였다. 이상한 기운에 돌아보자 신우진 씨가 문간에 서 있었다.
“제발, 노크라도 해주시면 안 돼요?”
“방금 왔어.”
“들어오세요.”
아침부터 노동을 하느라 상대해줄 여력이 없었기에 그냥 앉아서 서랍 속에 있는 물건들을 분류했다. 방을 뺏은 격이 돼서 미안하다는 그 남자. 이렇게 감정 없는 사과는 처음 받아본다.
“작가님이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어차피 엄마가 결정한 건데요.”
나도 건성으로 받아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런데 또
“남자친구가 잘 해주나?”
아하. 그 대사를 듣자 신경에 날이 서서 돌아보니 그가 벽에 붙여놓은 사진들 앞에 서 있었다. 한 장이 떨어졌는지 뜯었는지 어쨌는지 손에 들려 있었다. 벌떡 일어서서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 사진을 뺏었다. 내가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는데도 표정은 꿈쩍도 않는다.
“엄마랑 결혼하셨다고 해도, 아직 가족이라곤 생각 안 해요. 이런 건 간섭 안 하고…그냥 지냈으면 좋겠어요.”
내가 계속 노려보자 서서히, 아무것도 없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웃는 거야? 또 한 번 향수 냄새가 덮쳐온다.
“그럴게.”
조금도 상하지 않은, 가벼운 말투. 오히려 내가 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방해 안 할 테니 마저 정리하라며 돌아섰다. 방을 나서면서 뭔가 말하려는 듯 멈춰서더니 이내 그냥 나가버렸다. 맥이 탁 풀려버리고,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했었던가. 뒷골이 당겨서 목 언저리를 주무르다가 알았다. 또 단추가 가슴팍까지 풀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