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은 마녀의 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기분이었다. 나오자마자 단골 대리기사를 불렀다. 과외시간이 지나면 혈중 알콜도 얼추 분해될테니 린이네 가는 동안만 부탁하기로 했다. 금방 도착한 기사 덕분에 바로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 기분...뭐지?’
뭐라 설명해야할까. 싫지는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고, 암튼 묘했다. 그러다 그는 이내 잠에 빠져버렸다. 린이네 집에 가는 십몇분 동안 그는 꿈을 꾸었다.
야자수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머리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래섬이었다. 원색의 해먹이 군데군데 메어져있는 해변에는 원주민과 백인의 유전자가 섞인 묘한 매력의 남국 사람들이 그늘 아래 자유롭게 누워있었다. 석양에 비친 바다는 넘실거리는 붉은 혓바닥처럼 보였다. 이러다 금세 밤이 올 것이고 불빛이 많이 없는 이 섬은 곧 별빛에 휩싸일 것이다. 그럼 여기저기 기타를 치며 밤의 유흥을 느끼는 사람들 틈으로 파티가 이루어질 것이고 서로 얼굴도 모르던 남녀들이 추파를 던지며 어색한 첫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러다 눈이 맞으면 오늘밤, 하완이 그려준 몸 속 숨겨둔 타투를 침실에서 서로 확인하게 될 커플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와 의뢰인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문양을 말이다. 그때 멀리서 뗏목 하나 해변으로 실려오는 게 보였다. 그가 뗏목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헐...헬로우? 아 유 오케이?"
그때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사람을 보고 그는 놀랐다.
"어, 넌?"
그제야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교복임을 알았다.
"아, 여긴 어디래?"
"야, 너 뭐야? 설마 이걸 타고 온 거야?"
입에 들러붙은 긴 머리를 그녀가 손으로 갈래갈래 분리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국말? 누구세요? 절 아세요?"
그녀는 시아였지만 하완을 몰라보는 듯 했다. 문득 그때 뇌진탕 때문에 애가 바보가 된 건 아닌가 싶어 그는 뜨끔했다.
"헐...나 몰라?"
"네. 모르겠는데요?"
그러고보니 자신이 겪었던 단기기억상실이 이런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차를 어디에 뒀는지 몰라 며칠을 고민했던 그날의 오토바이 사고가 떠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그와 그녀는 공평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건가 싶어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난 널 알아.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 지는 나중에 듣고...일단 가자. 여기 이러고 있다간 사람들이 널 구경하러 몰려들 테니까."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녀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가게로 들어갔다. 그 사이 해는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듬성듬성한 알전구를 켠 실내는 아늑했다. 그가 따뜻한 차를 컵에 부어 왔다. 그녀는 타투를 받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표류한 거야? 어떻게 그런 배를 혼자 타고 있는 거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그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걸 하완이 보았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바닷물에 젖어 있었다.
"야, 감기 걸리겠다. 이 가운으로 갈아입어. 마를 때까지."
그가 손님들에게 입히는 가운을 그녀에게 주었다. 머리칼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추위 때문인 듯 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순종적인 모습의 시아라니 참 이상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때 사람은 가장 연약해지는 것인가 싶었다. 그 역시 자신이 누군지 알기까지 얼마나 두려운 나날을 보냈던가. 무얼 해야할지, 뭘 잘 하는 지도 모른 채 시선에 끌려만 다녔던 한국에서의 삶은 얼마나 불행했나. 그때 허름한 나무 문 틈으로 그녀가 옷 단추를 푸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이 오두막은 듬성듬성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작고 허름한 작업실이었으므로 완전 밀폐된 곳이란 없었다. 아무리 다른 것에 집중하려 해도 그녀가 뭘 하고 있는 지 알고 있는 이상 틈틈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위산이 역류하는 것처럼 가슴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찬 물을 벌컥 벌컥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켜도 뱃속에서 일어나는 불은 소화되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나왔다.
"제 이름 혹시 아세요?"
"어."
"그럼 제 몸에 새겨주세요. 전 기억이 안 나요. 또 기억이 안 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그는 칼과 펜을 들었다. 그리고 소독을 마친 후 그녀가 내민 하얀 어깨 위로 다가갔다. 속살이 더없이 뽀얬다.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힌 운동장처럼. 그가 이름을 새겼다. 그녀는 따가운듯 잠깐 잠깐 이마를 찡그렸다. 짧은 시술이 끝나고 그가 깨끗한 천으로 피부를 닦아냈다. 그리고 돌아선 그녀 몰래 이름에 입을 맞췄다.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그녀는 그의 입술을 느끼지 못했다.
"끝났어."
그가 그녀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시아가 어깨를 돌려 거울을 통해 새겨진 이름을 조용히 읽었다.
"하완. 하완..."
그녀가 새겨진 이름을 읖조리는 그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그녀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그에게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호소로 들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가운의 다른 어깨를 그가 손으로 스르륵 내렸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긴 머리칼만이 그녀의 두 가슴을 덮고 있었다. 육지로 올라온 한 마리 순진한 인어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가 그녀의 양 어깨를 누르며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녀를 눕히고 얼굴을 들여다봤던 그 때,
"엥? 로사샘?"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그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건 다름 아닌 로사가 아닌가.
"헐, 죄송해요."
하고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때 로사의 두 팔이 문어의 빨판처럼 그의 머리를 휘감았다.
"으악!"
"다 왔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자마자 대리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그새 주무셨어요? 여기 네비에 찍힌 주소대로 왔습니다. 이 아파트 아닌가요?"
잠에서 깬 하완은 그제야 그게 꿈이었음을 알고 안도했다.
"네,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사를 보내고 그가 한동안 좌석에 앉아있었다.
"아, 이게 무슨 개꿈이야? 그동안 내가 너무 금욕생활을 했나보다. 미성년자 교복을 벗기질 않나...그런데 왜 여기에 대리로 온 건지?"
오늘 일이 그는 기억 나지 않았다.
"아...왜 머리는 아픈 거야? 술이라도 먹은 건가? 아, 골 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