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자친구랑 실랑이를 하고 있으면, 옥 선생이 와서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옥 선생이 건넨 말은 따스한 한마디였다.
" 저런 놈이랑 만나지 마요. "
평소의 뾰족한 잔소리가 아닌, 그녀를 진심으로 신경써서 해주는 말이었다. 어깨 위에 올려진 그의 손에서 부터 은근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너무 진심으로 말해서, 설희는 뭐라고 대답해야할 지 고민했다. ' 헤어질 수가 없어요, 이미 헤어졌거든요. ' ' 미쳤다고 다시 만나요? '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저... 헤어졌어요. "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설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예전에, 아주 예전에. 병원 들어오기도 전에 헤어졌어요. "
그렇게 말하자 옥 선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 그럼 저 놈은 왜 저렇게 군 겁니까? "
화를 내며 찬정오빠가 사라진 쪽으로 옥 선생이 눈을 부라리자, 그런 그가 고마워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베어나왔다
" 모르겠어요. 미쳤나봐요. "
설희의 웃음에 옥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설희를 노려보았다.
" 유설희씨, 웃을 때가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데이트 폭력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아요? 지난 주에도 텔레비젼에서 스토커에게 공격 당한 여자에 대한 뉴스가 있었잖아요. "
그러더니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리고 설희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 앞으로 유설희씨는 당분간, 나랑 퇴근 합시다. "
설희가 그의 말에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 그러실 필요까지는... "
"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싫으면 제 말대로 하세요. "
평소의 단호한 말투에 설희는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는 옥선생이 미웠지만, 이번 만큼은 설희를 위해 해준 말이라 조금 고맙기까지 했다.
" 근데, 퇴근 안하세요? "
설희가 옥 선생의 하얀 가운을 바라보자, 옥선생이 그제서야 용건을 떠올린 듯 얼굴을 붉혔다.
" 설희씨가 들어갈 방의 세입자가 방을 뺐으니, 내일 시간되면 같이 방 상태 보러 갈래요? 도배는 다시 할 건데,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알아둬야 하니까. "
옥 선생의 제안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켰다. 옥 선생이랑 또 둘이 움직여야 한다니. 주말에도 만난 다는 것이 왠지 꺼려졌다. 오늘 일이 있어서 창피하기도 했고.
거절 하고 싶었지만, 이사 가기 위해서는 집을 한번 더 봐야 해야겠지.
다음 날, 병원 근처의 역에서 옥 선생과 그녀는 만났다. 약속시간을 정해서 만난 것은 처음이라,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뛰어가는데, 천천히 오라며 손을 젓는 그를 보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데이트 같아.
문득 든 생각에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서 집까지는 5분 거리였는데, 얼마나 어색한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바닥만 보고 걸었다. 전날의 추태를 보인 것이 아직도 쑥스러웠다.
" 옥 선생님은... 대단하시네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신데 오피스텔도 가지고 계시고. "
" 병원만 왔다 갔다 하니 돈 쓸 데도 별로 없고. 그냥 저축 개념이죠. "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설희의 눈은 바닥만 보고 그에게서는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대화 내용도 키스한 날의 이야기나, 둘 사이의 감정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하릴 없는 말을 하며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방안이 눈에 들어왔다. 불이 없어 캄캄한 방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둡고 닫힌 방에 옥 선생과 둘이. 설희가 자세를 고쳐 잡고 옥 선생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나 왜 이러지? 옥 선생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나만 하나하나 신경 쓰는 느낌.
그런 자신이 싫었다. 한숨을 쉬는 사이 옥 선생이 방의 불을 켰다. 밤의 형광등 불 아래서 보는 방도 상당히 깨끗했다. 도배만 하면 거의 새 집느낌이 될 것 같았다.
여기가 내 집이구나.
내 첫 집.
대학교도 부모님 집에서 다녀서 그 흔한 자취한번 못해봤다. 방을 꾸미고 싶어도 엄마 잔소리에 꾸밀 수가 없었다.
어떻게 꾸밀까?
" 이미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기본 가전은 빌트인이니까, 다른 것만 사면 되겠네요. "
옥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침대랑 서랍장이랑 책상 의자정도만 사면 될것 같아요. 그리고 애견 용품도... "
방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니 그나마 옥 선생을 덜 신경쓸 수 있었다. 사야할 목록을 핸드폰에 적으며, 방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 가구는 어디서 살 거예요? "
" 그... 조립하는 그 가구점 있잖아요. 거기서 사서 해보게요. "
사실 이사하는 게 정해지고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봤는데 그 가구집이 예쁘기도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혼자 살기 시작할 때 딱 좋을 것 같았다. 벌써 사고 싶어서 모델명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다.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 가구 조립 해봤어요? "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
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블로그 보니 다 혼자 하던데. 나도 할 수 있겠지,뭐.
" 본인이 만들 거예요? "
옥 선생의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그럴 건데요 "
" 언제 사러 갈거예요? "
" 일요일 날 이사 아침에 이사 하니까... 사실 짐도 별로 없고 그래서 가방 몇 개만 가져오고 그리고 나서 오후에 가게요. "
" 흠. "
옥 선생이 설희의 말에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저 자세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데.
왠지 불안했다. 생각에 빠졌던 옥 선생은 잠시 그렇게 멈춰있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일요일 날 이사 내가 도와줄게요. 그리고 나서 같이 그 가구집 가서 사오죠. 전 전동 드릴도 있으니 내가 하면 금방 조립이 끝날 거예요. "
"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
그 말에 설희가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옥 선생이랑 함께 있는 게 어색했는데, 일요일날 하루종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 설희씨 차 없잖아요. "
" 네? 어, 없지만. "
" 이사할 때 내 차로 짐 옮기면 되니까 그렇게 하고, 가구도 차로 사오죠. 못 옮기는 것들은 배달시켜야 겠지만. "
" 아니에요, 옥 선생님도 주말에 바쁘시고 저, 그리고 ... "
설희가 놀라 손을 젓자,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 내가 도와주는 게 싫습니까? "
" 네, 아... "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건 정말 아니지만, 긴장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그 앞에 있다 보면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꾸만 자신이 옥 선생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까봐 그게 싫었다.
" 싫은건 아닌데... "
" 아니면 다른사람이 와서 도와주기로 했습니까? "
" 아니요, 절대 그건 아닌데."
" 그럼 내가 도와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
설희가 멈칫했다.
당신만 보면, 내가 너무 긴장하니까?
그렇게는 말 못하지. 설희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자 옥 선생이 씩 웃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를 보고 설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웃지? 떨리게.
" 그럼 내가 오면 되겠네요.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괜찮습니다. 집주인이기도 하고, 그날 원래 이사오는 거 보려고 했으니까 겸사겸사. "
" 정,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
설희의 집에는 차가 없었다. 용달을 부를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택시타고 올 생각이었다. 사실 옥 선생이 차가 있어서 도와준다고 하면 편하기는 편했다.
몸은 편해지겠지만,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겠지..
" 괜찮다니까요. "
" 옥 선생님 멀리서 오시는 거 아니세요? 집이 머신데 일부러 오시는 거면. "
그렇게 설희가 말하자 옥 선생이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왜요? "
" 음. "
옥 선생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 설희씨 한테 말 안한 게 있는데. "
" 뭐요? "
가슴이 두근거렸다. 뭘 또 속였길래. 불안했다.
" 저도 사실 이 건물 삽니다. 이 집의 옆옆집... "
옥 선생의 깜짝 발언에, 설희의 입이 딱 벌어졌다.
“ 우리 옆옆집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