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집의 옆옆 집에 산다고? 옥 선생이 이 집의 옆옆집에 산다고? 같은 아파트? 같은 층?
" 왜 말을 안했어요? "
설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설희의 질문에 옥 선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난 것 처럼도 보였지만, 곤란해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 그렇게 싫으면, 계약 취소 해도 되요. 계약금 다 돌려줄게요. "
" 아니, 그게 아니라... "
옥 선생이 말을 안한 건데, 옥선생의 계약취소 말에 갑자기 설희가 을이 된 기분이었다. 안돼안돼, 옥선생 페이스에 말려들어가지 말자.
" 왜 말을 안했는데요? "
" 아니 옆집에, 혹은 옆옆집에 누가 사는 지 꼭 알아야 합니까? "
정말 이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절하고 상냥해보였던, 따뜻하게 까지 보인 옥선생이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설희가 알던 그 차갑고 냉정한 옥선생으로 돌아왔다.
" 그런건 아니지만... "
" 동료끼리 같은 오피스텔 살면 좋죠. 같이 출퇴근하면 설희씨 괴롭히는 그 전 남자친구인가 뭔가도 쫓을 수 있고. 뭐 서로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줄 수도 있고. 그리고... "
그리고 그 뒤에 뭐라고 옥선생이 꿍얼거렸지만 너무 작은 소리로 속삭여서 들리지가 않았다.
" 그리고 뭐요? "
설희가 되 묻자, 옥선생이 인상을 찌푸리고 설희에게 툭 뱉었다.
" 어쨌던 여러모로 같은 오피스텔 살면 좋다고요. "
정말 이상했다. 옥 선생의 속 내를 알 수가 없었다.
설희가 방 계약을 하고 나서 주변 시세를 알아보니, 설희가 계약 한 것은 평균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방은 관리도 잘 되어 있고 깨끗했다. 설희가 여기서 살면 설희야 저렴하게 살 수 있었고, 곰곰이도 기를 수 있고, 병원도 가까웠다.
그러나 옥 선생은 이런 거짓말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뭘까? 적은 월세, 개 기르는 세입자, 거기다가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닌 직장 동료.
저렇게 거짓말 해서까지 나를 이 집에 살게 하는 이유가 뭐야?
물어봐야 제대로 답해줄 리가 없다. 뭔가가 찜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를 생각해서라도 계약을 취소 시킬 수도 없었고, 이보다 좋은 시세로 집을 얻는 일은 불가능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병원에 출근 해보니 최 선생님이 먼저 와 있었다. 어제 느낀 의문점을 최 선생님에게 물어보고자 입을 열었다. 최 선생님은 옥 선생의 학교 선배로, 그가 이 병원을 올 때 스카우트 해온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옥 선생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다.
" 선생님. "
" 네? "
" 저, 이상한 것좀 물어봐도 되요? "
최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왜, 옥 선생 일이요? "
옥 선생 일인지 어떻게 알았지. 최 선생의 말에 설희의 눈이 커졌다. 최 선생님은 독심술사인지, 아니면 설희가 알기 쉬운 것인지, 최 선생이 다시 말했다.
" 뻔하죠, 옥 선생 하면 설희씨, 설희씨 하면 옥 선생 아니에요? "
뭔, 뭔 말이지. 설희는 여전히 놀라움에 눈만 깜빡였다. 너무 당황해 하는 설희때문에 최 선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 미안해요, 쓸데없는 말을 했네. 근데 옥 선생이 왜요? "
" 그 지난번에 옥 선생님이 말씀 하신 아는 분이 가지고 계신 오피스텔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그게 사실은 옥 선생님이 집주인이더라구요. 그리고... "
" 옥 선생이 같은 건물에 살죠? "
" 어, 어떻게 아셨어요? "
설희의 질문에 최 선생이 씩 웃었다.
" 그 오피스텔 이사갈 때한번 집들이 했거든요. 근데, 그게 왜요? 불편해서요? "
설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불편한 것도 그렇고... 제가 거기 살게 하는데 월세도 싸게 해주시는데 도대체 옥 선생님이 왜 그렇게 까지 배려해주시나 몰라서 불안해서... "
설희가 망설이면서 말하자 최 선생이 설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설희씨는 모르겠어요? "
모르니까 물어보지...
최 선생님의 웃음 섞인 시선에 왠지 몸둘바를 몰라 초조해졌다. 쑥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지 몰라 초조하기도 했다.
그런 설희를 바라보던 최 선생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곰곰이 때문 아닐까요? 옥 선생이 그렇게 보여도 개들한테는 끔찍하게 하잖아요. 곰곰이 입양하기로 한 설희씨한테 뭐든 해주고 싶었을텐데, 본래 성정이 그렇게 대놓고 잘해주고 그런걸 못하다 보니... "
아, 그래, 곰곰이 때문이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다. 곰곰이를 입양한다고 설희가 그랬을 때, 곰곰이가 제대로 된 집에 분양되는 것을 위해 누구보다 꼼꼼히 설희의 상황을 확인 한 것은 옥 선생이었다.
그 생각을 못했다. 나 때문이 아니었구나.
안도감과 함께 묘한 실망감이 온 몸을 퍼져나갔다. 그렇게 묘한 표정을 짓는 설희와 달리 최선생님은 아주 재밌는 걸 봤다는 듯 싱긋 웃으며 걸어나갔다.
*
토요일 밤, 퇴근후 트렁크 세개에 옷과 책을 넣자 이사 준비가 끝나버렸다. 뭔가 허무했지만, 물건을 많이 사지 않는 설희의 성격 때문에 이것 저것 다 넣어도 이게 전부였다. 부모님 집에서 이사 가는 것이라 가전이나 가구는 다 새로 구입해야 했다. 이사 가는 일요일 아침, 짐을 현관으로 내놓자 엄마가 걱정이 되었는지, 그녀를 복도까지 따라나왔다.
" 정말 엄마 아빠가 안 도와줘도 되겠어? "
" 응, 짐이 이게 단데 뭐. 놓고 간 거 있음 또 가지러 오지 뭐."
개를 키우려고 독립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매일 일이 힘들어 출퇴근 하는 것때문에 병원 근처로 이사 간다고 부모님께는 이야기를 했다. 동물병원을 금방이라도 그만 둘 것 같았던 설희가 열심히 병원을 다닌 다는 것에 감동한 엄마는 설희의 독립을 금방 승인해줬다.
" 병원 수의사 선생님이 차 가지고 와주신 댔으니까, 너무 걱정 마. "
" 어휴, 너무 고맙다 얘. 엄마가 선생님께 인사좀 드려야겠다. "
" 엄마가? "
설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엄마가 옥 선생을 보면 어떻게 반응 할 지 뻔했다. 워낙 얼굴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엄마는 결혼도 잘생기고 능력 없는 아빠와 했다. 텔레비젼을 봐도 정석 미남들이 안 나오면 드라마를 보지 않을 정도로 미남을 좋아했다. 잘 생긴 옥 선생을 보면 엄마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가, 둘이 부딪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 어, 엄마. 그 선생님이 엄청 예민하시고 무섭거든. 인사 할 필요없어, 내가 잘 할게. "
" 그래도 엄마가 되서 어떻게 그래. 이사까지 도와 주신다는데. "
" 아니야, 정말 괜찮아, 엄마. "
안그래도 오늘 하루종일 옥 선생과 밖에서 만나야 하는 것만해도 긴장되는데, 엄마까지 옥 선생을 만나 문제를 확대 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 때, 설희의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집 앞에 도착했다는 옥 선생의 문자였다.
" 엄마, 오셨다니까 나 가볼게. "
" 그래. 에구... 엄마가 들어줄까? "
" 아니야! 내가 끌게. "
엄마가 들어줬다가 그와 만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설희는 작은 몸으로 트렁크 세개를 질질 끌며 집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계속 걱정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엄마를 억지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몰고는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오자, 차를 세우고 차에 기대 서있는 옥 선생이 보였다.
다행이야, 엄마를 못 나오게 해서.
모르는 남자였으면 설희조차 한눈에 반했을 것이다. 너무 잘생겨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는데도 옷빨이 좋은 건지, 아니면 얼굴의 문제인지 눈이 부셨다. 휴일의 옥 선생은 처음이었다. 늘 단정한 느낌의 하얀 가운 차림만 보다가, 일요일의 옥 선생은 뭔가가 달랐다. 표정 조차 온화했다.
" 그렇게 짐이 많은데 택시를 타려고 했어요? "
옥 선생이 집에서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 나오는 설희를 향해 다가오며 웃었다.
웃, 웃지마. 이 사람은 옥 선생이야. 나한테 맨날 잔 소리하는 옥 선생. 정신 차리자. 정신 놓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옥 선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그가 다가와 설희의 손에 들린 두개의 캐리어를 들고 갔다. 그가 짐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엄마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 어머, 설희야! "
아, 망했다. 결국은 엄마가 나왔구나. 그러면 그렇지.
몸을 돌려 보니 엄마뿐만 아니라, 늘 방에서 텔레비전만 보시는 아빠까지 왠일인지 나와있었다. 아파트 현관을 뛰쳐나오는 엄마와 그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시는 아빠를 보고 설희는 이를 악물었다.
" 이거 식탁 위에 놓고 갔잖아. "
엄마의 손에는 설희의 지갑이 들려있었다. 어휴, 정신이 나갔구나,아주. 안그래도 나와서 구경하고 싶어서 근질거려 했던 엄마에게 핑계거리를 설희 제 손으로 던져준 격이었다.
" 어, 엄마, 아빠. "
엄마의 눈이 옥 선생을 탐색하고 있었다. 곧 한결 더 높아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분이 수의사 선생님이야? "
마음 같아서는 모르는 채하며 도망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엄마가 옥 선생을 발견하고, 옥 선생 조차 엄마의 목소리에 몸을 돌린 이상 소개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 어? 어어. 옥 선생님, 저... 이쪽은 저희 부모님이세요. "
설희의 말에 엄마가 한달음에 옥 선생의 곁까지 뛰어왔다. 심지어 늘 무표정인 아버지까지 온화한 표정으로 옥 선생에게 인사를 했다.
옥 선생은 늘 보호자들에게 보여주는 근사한 미소를 띄며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 안녕하세요, 옥은우라고 합니다. "
" 어머어머, 너무 고마워요. 선생님, 바쁘실 텐데 이사까지 도와주시고. "
엄마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 뭘요. 설희씨가 늘 저를 도와주는 데요. 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거짓말. 맨날 도움이 하나도 안된다면서 잔소리만 하면서.
설희는 자신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옥 선생의 친절한 모습을 보며 짜증이 나 눈을 얇게 떠서 그를 흘겨보았다.
" 제가 설희 엄마입니다. 그리고 돌마래 원장이 저희 오빠여요. "
" 그러셨군요, 늘 원장 선생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
엄마가 몸을 꽈베기 처럼 베베 꼬고 있었다. 옥 선생이 맘에 든게 틀림 없었다.
" 설희야아. "
설희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한껏 달콤했다.
" 선생님 잘생기셨다고 왜 말 안했어? 기집애. "
' 엄마가 이런 반응 보일까봐. ' 라는 말이 목구멍 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겨우 꿀꺽 삼켰다. 심지어 아빠까지도 엄마를 거들었다.
" 정말 훤칠하시네. "
부모님의 칭찬에, 옥 선생이 웃었다.
" 잘생기긴요. "
" 남자인 내가 봐도 잘 생기셨는데. "
아빠까지 계속 말을 하니 짜증이 났다. 남의 외모 칭찬은 왜 저렇게 하는 거야? 엄마 아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설희는 짐들을 차에 실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도망가야 했다. 그 것이 지옥에서 탈 출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뒤에서는 끝도 없는 옥 선생 칭찬 릴레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못말려. 얼른 짐을 정리하고 가야겠다 싶어 서둘러 짐을 옮기고 있는데, 엄마가 옥 선생에게 질문을 했다.
" 그런데 선생님은 결혼 하셨어요? "
설희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 엄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