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층의 작은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나잇대에 맞게 저마다 어울려 뛰놀고 있다.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부터, 공 하나에 죽자고 덤벼들어 발길질을 해대는 소년들, 그늘에 배를 깔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녀들까지. 하지만 사람 사는 게 으레 그렇듯 모든 아이들이 함께 노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서는 운동장의 한쪽 구석에서 홀로 근력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아이도 있다.
벤치로 쓰라고 바닥에 박아둔 판자에 손을 짚고 열심히 팔을 굽혔다가 피고 있는 아이는 누군가 듣는다면 기절초풍할 구호를 되뇐다.
“타도, 네프렌카! 섬멸, 천사! 말살, 인간!”
구호는 맹렬하지만, 횟수는 세 개가 한계다. 부들거리는 팔을 차마 펴올리지 못 하고 라일리는 판자 위로 몸을 뉘인다. 잠시의 휴식 후, 판자의 아래 틈에 발을 끼워 넣고 흙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리고는 다시 요상한 구호를 내뱉으며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천국에 죽음을! 인간계에 고통을! 놈들의 영혼에 절망을!"
하지만 여섯 개가 한계다.
숨을 학학거리며 라일리는 고개를 돌려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평소라면 쉬는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귀찮게 했을 남자애들이 가까이 접근조차 않는다. 아마 앨딘의 저 눈 때문이리라.
저 방법을 자주 써먹어야겠다고 라일리는 생각한다. 빠르고, 효과적이고, 뒤탈 없다. 물론 그 뒤탈을 무마하기 위해 누구누구들이 열심히 뛰댕기는 것 같지만 거기까진 관심 없다.
라일리는 자신의 팔뚝을 들어 보인다. 팔굽혀펴기를 세 개나 해낸 자랑스런 팔뚝을. 나, 여덟살 중에선 제일 세지 않을까? 이제 앨딘만 하더라도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앨딘뿐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또래 아이들은 모조리 도륙을 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약골 앨딘도 나이가 들면 제 형처럼 근육이 붙고 힘도 세지겠지. 남자니까. 그래, 그렇기 때문에라도 수련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안 그래도 생리적으로 남자보다 체력도 약하고 불편도 많은 여자의 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패배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다져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할 때, 누군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오랜만이구나, 라일리.”
촌장이다. 라일리는 잠시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뒤진다. 돼지새끼 같은 아들이 하나 있는데 노력은 하나도 안 하면서 사관학교 들어갈 거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녀서 빽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하고 방앗간에 온 아줌마들이 수군대는 걸 자주 들었다. 그게 끝. 그 이상은 알지도 못 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기에 용건이 뭐냐고, 없으면 꺼지라고 차갑게 올려본다.
“잠시 얘기나 좀 하자꾸나.”
하지만 촌장은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러면서 잡고 일어나라는 듯 하얀 나뭇가지를 내민다. 잠시 오지랖 넓은 재수 없는 노인을 노려보다가, 그래도 마을의 우두머리한테 모나게 대하면 피곤해질 거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그 나뭇가지를 잡는다.
푸확,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갑작스레 불타오른다. 라일리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전투 자세를 취한다.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당장이라도 내뻗을 기세로 촌장에게 이를 드러낸다. 그 앙큼한 주먹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촌장은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아아, 미안, 미안하구나 라일리. 그냥 장난감이란다. 너무 딱딱해 보이길래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 가져왔는데...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구나.”
하지만 라일리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한다.
“여, 여기! 너 주려고 간식도 가져왔단다!”
촌장은 서둘러 들고 있던 꾸러미를 풀어서 내민다. 꿀을 바른 빵과 팥을 채워넣은 떡이 모습을 드러내자, 라일리의 눈이 반짝이며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간다.
“일단 앉자꾸나.”
촌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른이 앉기에는 낮고 비좁은 벤치에 간신히 엉덩이를 끼워 넣는다. 라일리는 말없이 촌장의 옆에 털퍽 주저앉으며 빵을 입 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터질 듯이 오물거리는 볼을 보면서 촌장은 천천히 입을 연다.
“라일리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이 할애비는 라일리가 영특한 아이라고 믿고 있단다. 그래서 말인데, 라일리. 혹시 이 할애비가 너에게 추천을 하나 해도 되겠니?”
대답은 없다.
“별 거 아니란다. 조금 멀리 있는 학교지. 하지만 여기보다는 훨씬 좋은 학교란다. 맛있는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고, 무엇보다 매달 돈도 준단다.”
대답은 없다. 간식을 씹는 소리만이 요란하다.
“라훌라도 이제 곧 성인인데 언제까지 교회에 있을 수는 없잖니? 니가 그 학교에 들어간다면 매달 나오는 돈으로 라훌라도 가게를 차리든 뭘하든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단다. 어때, 생각이 있니?”
대답은 없다. 하지만 촌장의 개의치 않는다. 라일리는 원래 그런 아이니까.
“사관학교라는 곳인데, 군인을 성장시키는...”
대답 대신 라일리는 벌레라도 씹은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다. 그 어마어마한 표정에 촌장은 순간 당황하여 말도 잇다 말고 입만 뻐끔거린다.
나보고, 군대를, 다시, 가라고?
그들이 있는 아보레오 마을은 자경단만 있지 군대는커녕 정식 병사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군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는 걸까. 평생 살면서 군인은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텐데. 나름의 이유를 추리해낸 촌장은 서둘러 다시 입을 연다.
“파, 팥이 입에 안 맞았니? 미, 미안하구나. 좋아할 줄 알...”
선생님이 교문을 열고 점심시간이 끝났으니 들어오라고 외친다. 라일리는 미련 없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등을 돌린다. 어느샌가 빵과 떡은 가루만 남기고 사라져 있다. 말이 끊긴 촌장은 입맛을 다시며 라일리의 작은 등을 볼 뿐이다.
“뭐라고 하셨죠, 촌장님?”
교장은 촌장이 쓰레기통에 포장 꾸러미를 버리는 걸 보며 멍하니 되묻는다.
“아이들을 상대로 군사 훈련을 하자구요?”
“예. 군사 훈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조국 티타니아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교장도 최근 국가 정세가 위태롭다는 것은 소문을 통해서 들었다.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적어도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정도의 훈련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일반반의 아이들까지 그 훈련에 포함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학교는 여덟 살부터 열한 살까지의 어린 아이들이 소속되어 있는 일반반과, 열한 살부터 열네 살까지의 소년 소녀들이 소속되어 있는 상급반 두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살과 마법은 나이를 보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이번에 손님이 한 분 오십니다. 부기사단장을 맡고 계신 분이죠. 또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귀한 손님인데 일반반의 아이들도 제대로 한 번 배워봐야지 않겠습니까?”
아들을 사관학교로 보내려고 이용 중이라는 그 인맥인가, 교장은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야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죠.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요?”
“다음 주에 도착한다 하셨으니 그 때로 잡읍시다.”
촌장의 눈이 창 밖 운동장을 향한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씩씩대며 교실 문을 뛰쳐나오는 라일리와 그 뒤를 쫓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촌장의 눈이 라일리를 보며 반달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