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산기슭에 간신히 목만 걸쳐 있는 시간, 라훌라는 라일리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우리 라일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하긴, 우리한테 선택지가 어디 있겠냐. 차려 주시는 거 먹는 거지.”
“......”
“그래도 걱정 마. 월급 타면 한 번은 외식할 수 있을 테니까.”
사이좋은 대화를 나누는 남매 앞으로 일련의 무리가 길을 막아선다.
“야 라훌라!”
그 중 가장 앞에 있는 덩치 큰 소년, 앨런이 앞으로 나서며 외친다.
“니 동생이 내 동생을 눈탱이밤탱이로 만들어 놨어!”
앨런은 곁에 서 있는 앨딘의 눈을 가리킨다. 눈이 푸르죽죽한 보랏빛으로 물든 작은 소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라일리를 노려보고 있다.
“오늘 니네 둘 다 뒤질 줄 알아!”
라훌라는 라일리를 내려다본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자신에게 맞은 소년을 바라보던 라일리는 오빠의 시선을 느끼고 라훌라를 마주 올려본다. 라훌라는 피식,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맞고 다니는 것보다는 때리고 다니는 게 낫지.
“야, 앨런! 시비 붙은 건 너랑 앨딘인데 왜 다른 놈들도 껴 있냐?”
“다들 너한테 원한이 있는 놈들이지!”
“니들이 먼저 시비 걸어놓고 원한이냐?”
“니 동생이 먼저 난리를 쳤다니까?”
“니들이 내 동생한테 먼저 집적거렸잖아?”
앨런을 비롯한 소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사실이니까. 라일리는 마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소녀다. 고아라는 꼬리표가 무색해질 정도로 어여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렇다. 그리고 그렇기에 소년들은 더욱 그 오빠인 라일리에게 덤빈다. 수호기사를 꺾어야 공주에게 인사를 하든 키스를 하든 가능할 테니까.
앨런이 불타는 눈빛으로 뒤의 소년들을 향해 입을 연다.
“니들, 오늘이야말로 저 방앗간의 괴물을 무너뜨리는 거다. 우리가 언제까지 고아새끼한테 밀려 살 수는 없잖아?”
물론, 단순한 소년으로써의 호승심도 있다. 반쯤 마을 소년들의 짱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고아를 꼭 한 번 밟아주고 싶다는 호승심. 하지만 라훌라는 수많은 소년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그의 여동생이 있으니까.
꼬옥, 라훌라를 잡은 라일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라훌라는 여동생을 내려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그 눈빛에 들어 있는 이기라는 메시지를 라훌라는 놓치지 않는다.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그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고 라훌라는 느낀다. 가족의 정이라는 걸까. 진심된 걱정? 혹은 사랑? 라훌라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앞의 소년들을 바라본다. 여전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라훌라는 소년들을 휩쓴다. 말그대로 압도적으로 때려눕힌다. 라일리는 그런 광경을 보다가 지루하다는 듯 자신의 손으로 눈을 돌린다. 라훌라가 질 리가 없다. 그야, 마왕의 힘을 불어넣었으니까. 라일리는 아까 라훌라의 몸에 자신의 힘의 극히 일부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소년끼리의 싸움에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라일리의 힘은 남에게 부여했을 때 그 파워가 몇 배는 뛰니까.
어렴풋이 환생 직전 네프렌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 대화라고 부르기 힘들었던 것을 어렴풋이나마 되짚어보자면, 세 가지 패널티라고 했었다. 라일리는 이 때까지 스스로 추리해낸 세 가지 패널티들을 곱씹어 본다.
그 중 첫 번째는 성별이 뒤집힌 환생이다. 마왕까지 갈 것도 없이 세상을 부수는 여정에 남성의 몸보다 여성의 몸이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두 번째는 이 힘의 불온전성. 처음부터 온전히 주어지지 않고 나이를 먹을수록 힘을 되찾게 만든 이 번거로움이 두 번째다. 세 번째는 이 힘의 불포화적인 속성. 남에게 부여했을 때에 비해서 스스로가 품고 있을 때는 제대로 소화 안 된 음식마냥 본래 힘의 반의반도 나오지 않는 이 비효용성.
하지만 그럼에도 남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다는 부분은 꽤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지금처럼 시선이 다른 이에게 쏠리게 하면서 귀찮은 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라일리는 이 ‘오빠’라는 인간이 필요하다. 가끔 대해오는 태도가 역겹고 짜증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불편을 모두 뒤덮을 정도로 방패로써의 효용가치는 충분하고도 넘치니까.
역겨운 인간들의 뒤에 숨어서 살아가야 하는 마왕이라니... 조그마한 입에서 한숨이 폭, 하고 새어나온다.
“미안해하는 거야? 괜찮아. 오빠인데 여동생을 위해 싸우는 것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어느샌가 소년들을 다 쓰러뜨리고 돌아온 라훌라는 그 한숨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라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굳이 방패의 오해를 풀어줄 정도로 그녀는 친절하지 않으니까.
“또 싸웠다면서요?”
식사 시간. 조용히 빵을 뜯어 수프에 적시던 파비앙 목사가 입을 연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라훌라의 손이 멈칫한다. 그리고 살며시 파비앙의 눈치를 살핀다.
“그게... 하하하. 그렇게 됐네요.”
라훌라는 멋쩍게 웃으며 재빨리 손에 들린 빵을 입에 넣는다.
“또 라일리 때문인가요?”
“아뇨, 다른 놈들 때문입니다.”
반사적으로 울컥해서 말을 뱉는 라훌라. 목사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라훌라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해요. 여동생과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울컥하고 보는 그 버릇. 물론 그 소년들의 잘못도 있겠죠.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라일리의 잘못이 아무것도 없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라훌라는 불만어린 목소리로 툴툴거린다.
“애초에 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아이를 상대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부터가 그 놈들이 글러먹은...”
“라훌라.”
“아니, 목사님. 여자를 지키는 것은 기사도 이전에 인간...”
억울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리던 라훌라는 파비앙의 엄한 눈빛에 재빨리 입을 닫는다. 파비앙은 한 층 부드러운 눈매로 라일리에게 묻는다.
“라일리.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빵을 오물거리던 라일리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연다.
“...앨딘이 내 몸에 손을 댔어.”
쾅. 라훌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런 개X끼를 찢어 죽...!”
“라훌라! 말조심 하세요! 여긴 교회에요!”
앤 수녀님이 엄한 눈으로 라훌라를 꾸짖는다.
“교회니까 오히려 이런 것에 더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정 하세요, 라훌라.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상황이 심각하다면 제가 앨딘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파비앙의 만류에 라훌라는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라일리. 찬찬히 얘기를 해보세요. 혹시 불편하다면 앤과 단 둘이 이야기해보겠어요?”
라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을 연다.
“남자애들이 가위바위보를 했어. 진 애가 나한테 와서 손을 잡았어. 또 가위바위보를 했어. 이번에는 볼에 입을 댔어. 또 가위바위보를 했어. 앨딘이 와서 내 엉덩이에 손을...”
큰 소리를 내며 라훌라가 식탁을 내려친다. 그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음... 라일리. 그래서 그 직후에 앨딘을 때린 건가요.”
“난 장난감이 아니야.”
야무지게 말을 마치고 라일리는 빵을 마저 입에 넣는다. 파비앙과 앤은 미묘한 눈빛을 교환한다. 여덟 살 나잇대의 소년들이라면 가능한 짓궂은 장난이다. 물론 여동생을 둔 오빠의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목사님! 앨딘네 가서 한 마디 해주실 거죠?”
“아... 물론이죠. 그래야죠.”
그렇기에 파비앙은 라훌라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식사 후, 사과도 받고 사과도 할 겸 찾아간 앨런의 집에서, 파비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예? 뭐라구요?”
“겨우 그 정도 말에 라일리가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한 건지를 모르겠다구요.”
“아니 애들끼리 그러고 놀 수도 있지 그거로 애 눈을 저렇게 만들어놓습니까? 게다가 우리 첫째까지 저렇게 두드려 패놓다니요? 안 그래도 이 문제로 목사님을 한 번 뵈러 가려 했었습니다.”
잔뜩 성난 눈으로 파비앙을 노려보는 앨런의 부모. 아무리 파비앙이 목사고 교회가 마을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사는 고아들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책임은 파비앙에게 물을 수밖에 없기에 부부는 눈에 들어간 힘을 빼지 않는다.
“아니, 그러니까... 자제분이 라일리에게 뭐라고 했었다고요?”
앨런의 부모는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다시 파비앙을 향해 입을 연다.
“듣고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나랑 결혼해줘, 아이 다섯 낳고 행복하게 살게 해 줄게’ 라고 말했더니 대답으로 주먹이 날아왔다던데요.”
“......”
“저희도 에반, 리리 부부의 친구였습니다. 저희도 라훌라랑 라일리를 아껴요. 하지만... 가끔 그 아이들이 너무 막나간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목사님. 지금 그 두 아이 때문에 다쳐오는 마을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이 다들 단단히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는 걸 촌장님이 간신히 말리고 있습니다.”
파비앙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