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여린잎 다도회
장마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세차게 줄기차게 무섭게
이 비로 인해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슬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칭 걸 크러쉬 순희는 이런 날이면
몹시도 센치해졌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게에 손님도 별로 없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 시간에는 연인들만 몇 팀 있다.
몸의 라인을 최대한 살린 핏의 데이트룩을 입은
여자들은
“음 ~ 마시뚀!”
“짱죠하효!”
“빵두 마싯겟따”
“오빠 술잔이 왜케 쪼꾸매?”
혀짧은 소리로 양양 거린다.
지랄들을 떨어요. 어디서 흉내낼게 없어서 반푼이짓을!
순희는 저 진상들! 하면서 괜히 여자들을 미워하지만
쓸쓸함만 더해졌다. 내가 질투하는 건가? 인정! 혼자서
왔다갔다하는 마음을 즐기고 있는데 비에 홀딱 젖은
민영이 들어왔다.
“야! 이 씨방새야! 약국 문닫을까봐 약팔아 줄라고 작정
했냐? 우산은 엇다 쳐박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야“
순희는 민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비에 젖은 채 민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매니저가 가져온 수건을 주면서 순희가 물었다.
“제주도..”
“형은 만났냐?”
“응”
“근데 왜? 뭐 니가 사랑하는 여자랑 살고 있던?”
갑자기 민수가 동작 그만 하고 얼어 붙었다.
“뭐야? 진짜야? 난 드라마보고 말한건데?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해야 재밌어지잖아“
“그거 아냐!”
민영이 소리를 꽥 질렀다.
“에구! 깜짝이야. 소리지르니까 카리스마 있다야!
짱 멋진데?“
“지금 나 너랑 말장난 하고 싶은 마음 없어”
“알았어. 알았어”
민영이의 진지한 얼굴을 본 순희가 얼른 그를
데리고 밀실로 들어갔다.
“으이그! 이 답답아! 난 그래서 너같이 짱구 굴리는
책상물림이 싫어. 아니 형을 만났으면 얼싸안고
춤을 춰야지. 왜 그냥 오냐고? 정말 이해가 안돼”
민영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순희의 반응이었다.
그래 좋은 소리 못들을 줄 알았다. 그래서 민영은
순희를 찾는다. 마음이 안내키는 어줍잖은 공감이나
이해가 아니라 마음 속 깊숙이에 있는 숨겨진 본능이나
위선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긁어내는 순희를 보고
있으면 속이 뻥 뚫렸다.
“니네 꼰대한테는 뭐라 말할래?”
“아직 민수형인지 확인도 안해봤잖아”
“야 너 당장 내일 뱅기표 끊어. 돈만 아깝게 이게
뭐야. 일타 쌍피는 해야지. 아무리 재벌 아들이래두
돈 아깐줄 알아라. 기름도 안나는 나라에서“
궁시렁 궁시렁 순희의 궁시렁을 듣다가 민영은
그만 잠이 들었다. 이해 못할 일과 이해받지 못할
자신의 이 행동의 저변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모른채.
이해하지 못할 일을 목격한 것은 건수도 마찬가지였다.
20여 년 만에 찾아온 서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어지러운 지하철 노선과 더 바빠 보이는 사람들과
다들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젊어 보이는 사람들
모습을 보다가 건수는 지하철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늙고 초라하고 병든 한 사내가 서있었다.
‘그래도 행복했어‘
건수는 창에 비친 자신에게 말했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건수는 운현궁을 찾아 갔다.
신문기사에서 봤다. 운현궁 찻자리 기사를.
거기가면 김혜령 회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건수는 그런 생각에 서울행을 결심했었다.
운현궁 뜰 앞에는 ‘여린잎 다도회 찻자리’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기품 있는 글씨다. 수많은
세월 동안 연습하고 또 연습한. 그러나 연습만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글씨. 천부적 재능을 가진 서예가의
작품이리라. 현수막 하나에도 공을 들이는 역시 그녀 답다.
건수는 그냥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몸은
운현궁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김혜령 회장은 대청마루에 앉아 찻상을 내오는 회원들
솜씨를 심사하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더 젊어 보이고 멋있어져갔다.
그녀가 최대의 약점이라고 여기는 사각턱은 원만하고
복이 있는 얼굴로 변하였다. 그녀가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건수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가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이 바쁜 와중에 만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건수도 어쩌면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보다
멀리서나마 한번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나 집이
아닌 이곳에 그녀를 만나러 올 이유는 없었다. 찻자리
기사를 봤을 때 아직도 그 행사를 하고 있구나!
그때 그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었다.
언젠가 건수가 장염으로 고생할 때였다.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는 상태였던 그에게 차 한잔을 대접해 주던 그녀.
운현궁 찻자리가 처음 열리던 해. 건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하고 있었다. 김혜령 회장이 건수를 불렀다.
”내가 자네를 위해 끓였네. 이 차 마시면 속이 편안해질거야“
위풍당당해 보이는 커다란 도자기 잔에 진한 갈색 차가 담겨져
있었다. 한약같다고 건수는 생각했다.
”양손으로 잡고 차의 기운을 느끼면서 마셔봐“
그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아! 쓴맛이 아니네요?“
색깔만 보고 건수는 한약이라는 선입견과 쓴맛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는 커피처럼 쓰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부드럽고 편안하게 차가 온몸을
돌자 몸이 따듯해졌다. 아무 맛도 없는 맛이 최고의 맛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차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건수가 묻자 김혜령 회장은 보이차라고 했다.
보이차 그날의 그 차의 맛과 따뜻함은 건수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그림이다. 나중에 그 찻값을 알고난 다음에
건수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렇게 비싼 차가 있다니!!
차만 비싼 것은 아니였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하는
차호와 찻잔들과 온갖 차도구들은 또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건수는 지난날의 그 추억을 떠올리면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정재계의 내노라하는 부인들이었다.
여린잎 다도회는 원래 김혜령 회장이 도예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만들었다. 다도를 활성화시키면
찻잔이나 차호 등 도자기를 살 것이고 그러면 가난한
작가가 작품 활동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회사 이미지도 높이고 여러모로 윈윈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거기에 정재계 안방마님들이
드나들면서 하나의 사교모임 조직이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줄을 대는 사람들이 생겼고,
파워도 생겼다.
김혜령 회장이 찻자리를 둘러보고 있는데 백설희가
들어왔다. 좀 천해보이고 싸구려로 보이지만 나름
고상해 보일려고 엄청 신경쓴 차림새다.
“어서와”
김혜령은 백설희를 옆에 앉게 했다.
“누굴 줄까? 자네가 좀 찝어봐”
“네 회장님~~~”
백설희는 김혜령을 평상시에는 언니라고 부르지만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어디 요년들 날 조금이라도 깔본 년들은
다 떨어뜨려 버릴거야. 언년인가 보자.
백설희는 이런 더러운 속마음이 들킬까 힘껏
우아하고 공정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찻자리 상을 심사했다.
“이명희 주세요. 남편이 곧 장관자리 앉을 거예요”
김혜령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찻자리란게 다 거기서 거기다. 보는 사람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데도 이짓을 한다.
이 때 뽑히느냐 마느냐는 남편의 흥망성쇠에 따라
정해진다. 차?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이딴 짓 왜 하냐?
배 부른 짓거리다. 백설희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다방커피가 제일 맛있더구만. 그래도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포석정까지 만들어 근사하게
찻자리를 했다. 모두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우 찻자리였다.
다도회 회원들은 백설희의 입에 의해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알아서
설설기였다. 백설희는 이 도도한 여자들 무릎을 꿇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인생 뭐 있어?
눈 한번 질끈 감고 한방 날리면 흥하거나 망하거나
하는 거지. 그것도 못하는 것들은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다 죽는 거지 뭐.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지도
모른채. 그녀는 이렇게 도박을 하듯이 인생을 살았다.
지금까지는 모두 잭팟을 터트렸다.
그녀의 첫 번째 잭팟은 여린잎 다도회였다.
여린잎 다도회. 모든 일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정재계 사모님들이 회원이라는 ‘여린잎 다도회’에
들어가기 위해 그녀는 다도라는 것을 배웠다.
참 저 쬐그만 찻주전자 하나가 백만원이라고?
미쳤구만. 마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더 비싼 것 없나? 유명작가 것 없나 하는 표정으로
관리를 하면서 김혜령 회장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아킬레스건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손녀 딸
애나가 마약쟁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남들은 모르는 가족의 아픔이 있다.
남들한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가족사를 털어 놓는
사이라면 많은 것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김혜령 회장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은 무속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백설희와 김혜령 회장 고향은 바닷가 항구도시였다.
바닷가 사람들은 무속신앙과 가까웠다.
예측불가능한 자연의 횡포 앞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약한 마음은 신을 찾았다.
신에게 노여움을 푸시라고 빌고,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와
빌고, 빌고 빌다보니 절대 신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신의 대리인 무당에게 가서
매달렸다. 그때마다 신은 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알려준대로 하면 일이 잘 풀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업에서는 척척 잘 풀렸다. 그러다보니 무당의 말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인생이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또 재미있기도
하다. 삶이 예측가능한 것이라면 희망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고 살려고 아등바등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백설희는 그렇게해서 김혜령 회장의 취약점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그녀를 요리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김혜령이 갑이고 백설희가 을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백설희가 갑이고 김혜령이
을이였다. 천하를 호령하는 그녀를 지배하는 백설희는
2인자의 삶을 잘 누리고 있었다.
다도회 회원들은 애타게 자기 차를 와서 마셔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건수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 있는
찻자리에 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중앙에 있는 찻자리에서 큰소리가 났다.
“이봐요! 차를 그렇게 마시면 어떡해요! 지금
이 자리가 뭡니까? 예의를 차리셔야죠. 회장님 머리에
차를 떨어뜨렸으면 사과를 하셔야지. 뭘 잘했다고
큰소리입니까?”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그쪽을 바라보았다. 건수도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
듣고 있던 여자도 질세라 맞소리 지르고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새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점잖게 생긴 남자가 비서진들을 우! 몰고
그쪽으로 왔다.
그 남자를 보자 모두들 굽신거리면서 인사를 했다.
남자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큰소리 치던 백설희가
얼른 수습하면서 인사를 했다.
“어머나! 장관님 안녕하세요?”
건수는 그때서야 백설희의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설희 아냐?’ 건수가 백설희를 보았다. 백설희 맞았다.
그리고 그 옆에 김혜령 회장의 모습이 보이고
김회장 옆에 있는 젊은 여자는 장미란이였다.
백설희는 김혜령 회장과 미란이를
그 장관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김혜령 회장님이시고 이분은 회장님 손녀
애니 아가씨 앞으로 로즈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
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말로만 듣던 재벌 상속녀시네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미란이가 생글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건수는 ‘이게 뭐지? 왜 미란이를 애니라고 하지?’
내가 잘못 들었나?‘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제 1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