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장 -
위기
[아... 안녕하세요...]
잭 아저씨는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잭 아저씨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여인이었다. '그리팅고흐의 캡슐'에 있는 털복숭이 거인 아저씨와는 딴판인, 아주 예쁜 아가씨였다.
짙은 눈썹, 오똑한 코, 사슴처럼 동그란 눈, 그리고 태양보다도 붉은 입술... 세상 모든 남자의 이상형을 모두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천사 같았다. 잭 아저씨는 그녀를 아예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나도 똑같이 쳐다보고 있었을 테지만, 아주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도와드릴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구름 위에서 연주하는 하프-들어본 적은 없지만- 같았다. 난 여전히 천사에 푹 빠진 얼굴이었을테지만, 잭 아저씨는 아까와는 다른, 약간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늘 먹던 거로 주세요.]
[늘 다른 거 드셨잖아요.]
[어... 그랬나? 어쨋든 그런 것 까지 기억하다니, 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뭐, 그럼 제가 번호 정도는 드릴게요.]
[아니요, 주문 하실거에요?]
[아, 네. 주문해야죠.]
나는 그가 낮게 '젠장' 이라고 말하는 것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햄버거랑... 콜라 주시겠어요?]
[네네, 다른 건 더 필요하신 것 없나요?]
[이왕이면 아가씨 것도 제가 계산해 드리고 싶군요. 그나저나 전보다 조금 통통해지신 것 같은데?]
[그런 말 실례인 건 알아요?]
[어, 그런 뜻은 아니구요... 귀엽기까지 하다는... 일종의 그런...]
[됐구요. 정말 아무것도 더 주문 안 하시게요?]
[음... 그럼 감자튀김 하나 추가요. 케첩 뿌려진 맛으로. 정말 제 번호 안 받으시게요 ?]
그녀는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꼬마 손님 주문하세요.]
잭 아저씨가 옆에서 기분 나쁘게 쿡쿡 웃어댔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꼬마 손님이라고?]
나 역시 그의 말은 무시하는 것이 답인 것을 알 정도의 머리는 되었으므로 그를 무시하고 주문을 했다.
[저는 치킨 너겟 캡슐 5개랑 콘 아이스크림 캡슐 1개랑...]
[어쩌지요?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어요.]
잭 아저씨가 빈정댔다.
[그것도 몰랐냐? 저는 이런 촌놈과 비교가 안되죠. 한 마디로 바보와 멋쟁이. 전 언제든지 아가씨에게 번호를 줄 준비가...]
아가씨는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제발, 아저씨. 헷갈리니까 말 좀 걸지 말아주실래요?]
정말 통쾌한 한방이었다. 잭 아저씨는 여전히 있지도 않은 번호를 아가씨에게 줄 방법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물론 표정은 아주 보기 좋게 썩은 채로.
[어... 그럼 어쩔 수 없죠. 달달한 걸 먹고 싶은데...]
[그럼 게이브(초콜릿 등을 잘게 부셔서 생크림에 섞은 다음 빵에 발라 차갑게 얼린 어린이 인기 간식. 2150년 디저트 개발자인 워링 게이브가 최초로 개발. 이 후 폭발적 인기를 얻어 2156년에는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간식 top 3에 뽑힘)는 어떠세요?]
게이브? 그건 어린애들이나 먹는 거잖아! 저번주 월요일 잭 아저씨가 예쁜 아가씨가 준 50센트로 한 턱 쏜다며 사준 그 느끼한 음식. 그때 잭 아저씨한테 굉장히 짜증을 냈었지, 아마.
[전 그거 정말 맛있던데. 먹어본 적 있어요? 한 입 베었을 때의 그 고소함이란...]
그녀는 고개까지 격렬히 흔들며 그 느낌을 표현했다.
[네, 물론이죠. 저도 그거 정말, 정말로 좋아해요. 그걸로 하나 주세요. 어... 그리고 베리믹스주스 캡슐도 있으면 주세요.]
게이브만 먹으면 느끼해서 치킨 너겟도 못 먹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베리믹스주스 캡슐도 같이 시켰다. 잭 아저씨는 그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잭 아저씨의 눈빛이 날 ' 위선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얼마에요..?]
나는 내가 가진 돈보다 더 나올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치킨너겟 5개면 20센트구요, 어... 아니. 5개 이상이면 5센트 할인이 되니까 15센트, 게이브는 15센트, 베리믹스주스는... 잠시만요. ]
그녀는 허둥대며 가격표를 찾았다. 그 모습마저도 귀엽다니, 정말 천사가 틀림없다.
[15센트네요... 아까 얼마였죠? 아, 15... 15센트 였지. 그렇게 되면 15 더하기 15. 더하기 15니까요... 그러니까... 음...]
[45센트요. ]
배우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답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입에서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나, 혹시 천재?
[아! 그렇지. 네. 45센트에요. 그쪽에 수염난 노인분은 햄버거랑, 콜라랑 해서 40센트에 감자튀김도 시키셨으니깐... 아이, 참, 계산이 안되네. 으음... 55센트...요.]
잭 아저씨는 바짓춤에 꼬깃꼬깃 숨겨놓은 돈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느끼하게 쳐다보았다 .
[노인이라구요? 구스 광장을 지나다니던 여인들은 모두 제게 미남이라고 하던데 말이죠.]
그리고 그는 눈썹을 씰룩씰룩 거렸다. 으웩, 토 나오겠다. 그녀는 우스운 듯이 한번 웃고는 말했다.
[정말요?]
나는 옆에서 열심히 손사래를 쳤지만 잭 아저씨는 아주 당당하게 ' 그럼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번 더 웃고는 갑자기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서는 말했다.
[이런 거짓말쟁이들.]
그녀는 창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이, 아저씨 떄문에 가버렸잖아요!]
[어차피 다시 올거야. 그리고, 그게 왜 나 때문이냐? 니가 싫어서겠지. 너랑 같이 온 오늘 아가씨가 갑자기 계산도 잘 못하고 말이야.]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였다.
[너 때문에 긴장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억지도 이런 억지가..]
혹여나 들을까 우리는 숨죽여 싸웠다. 그 때 창고 문이 열렸다. 우리는 둘 다 우스꽝스러운 차렷 자세가 된 채로 굳어버렸다 . 그녀는 캡슐 11개를 쟁반에 올려들고 왔다. '게이브랑 음료 캡슐들은 '그리팅고흐의 캡슐'처럼 얼음 물에 띄워져 있지 않고, 얼음 속에 들어있어서 빼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이쪽 7개는 꼬마 손님이 시킨 거, 이쪽 4개는 노인분이 시키신 거에요.]
[전 분명히 3개 시켰습니다만 .]
[ 아, 한개는 덤이에요 . 그건 조리 없이도 먹을 수 있는거죠.]
나는 그가 부러워서 물었다.
[덤은 왜 받는 거죠? 50센트 이상이면 주는건가요 ? 그럼 저도 더 살래요 !]
[왜 받긴, 짜아식. 원래 나처럼 멋진 사람은 이런 덤을 받는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캡슐을 입에 던져 넣었다.
[에이, 설마요. 아니에요, 꼬마 손님. 저건 글루아르 껌이랍니다. 헛소리 하는 사람들의 입을 닫아주죠.]
[읍!읍!]
정말 그는 입이 꼭 닫힌 채로 버둥대고 있었다.
[그럼 저기 가서 식사하시면 됩니다. 캡슐 조리기는 오른쪽 끝에 있어요.]
그녀가 무릎을 꿇고 읍읍대고 있는 잭 아저씨를 외면하며 가려고 했다. 잭 아저씨가 그녀를 붙잡고 입 좀 떼어달라는 듯이 몸짓을 했다. 손도 파리처럼 싹싹 빌며 말했다. 그녀는 그를 한 번 슥 내려다 보더니, 창고로 들어가서 스프레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그의 입에 한 번 뿌렸다. 그가 입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은,
[친절하시군요, 아가씨.]
라는 느끼한 말이었다. 그녀는
[천만에요.]
라는 말과 함께 그 스프레이를 잭 아저씨의 눈에 한 번 뿌리고는 가게 출입문 반대편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그 스프레이를 나에게 주고갔는데, 알고 보니 '치한 꺼져' 스프레이였다. 잭 아저씨는 세상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나를 싫어할 수가 있지?]
그는 캡슐 조리기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갔다. 그가 햄버거 캡슐 조리 방법을 보는 동안 나는 항상 치킨 너겟을 먹어왔기 때문에 바로 조리기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잭 아저씨가 내 손을 쳐내고 자신의 캡슐을 조리기에 넣었다. 그 바람에 내 치킨 너겟 캡슐 하나가 떨어지더니.. 그대로 깨져버렸다. 그러자 초록색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우웩. 원래 캡슐이 이런거야? 다시는 캡슐 음식 못 먹겠네. 아니면 예쁜 아가씨가 너한테 '독약 캡슐'을 준 걸지도!]
[굳이 이런 상황에서 아저씨의 희망 사항을 밝혀야만 했나요?]
[뭐, 그냥, 아가씨가 널 무척 싫어해서... 날 싫어하는 척하면서 널 죽이려고 했던거야..]
[오, 제발.]
그때 조리기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다 조리되지 않은 햄버거 캡슐이 밖으로 나왔다 . 아저씨가 의아한 얼굴로 그 캡슐을 잡자마자 그것마저 터져버렸다. 역시나 초록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아오...이건 너무 아프잖아! 너무너무 슬프지만 역시 날 더 싫어했나봐! 더 고통스럽게 하려고 했던 걸 보면!]
[아가씨 의심은 그만두구요...]
[장난이야, 장난. 근데 지금 내 손은 장난이 아닌걸!]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을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액체가 묻은 곳마다 피부가 벗겨지면서 빨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액체가 내 신발 쪽으로 흐르자 잭 아저씨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넘어질 뻔 하다가 테이블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것은... 거울을 통해 우릴 지켜보고 있는 한 여자였다. 바로, 바로... 이 가게의 주인... 그 아가씨였다! 잭 아저씨의 농담이 사실이 된 것이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너무나도 소름끼치게 무서운 미소였다. 그녀는 사이코패스가 틀림없었다. 나를 보고 손까지 흔들었으니 말이다. 살아서 나간다면 , 내 손으로 잭 아저씨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이런 위험한 곳에 날 데려오다니! 죽을 위험은 혼자서 겪으라지! 어쨌든 원망은 나중으로 미루고, 즉시 난 잭 아저씨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맞았어요. 가게 아가씨가 꾸민 짓이에요. 저 문 밖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어요!]
[뭐...뭐? 와...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완전 백프로 믿었다면 그런 어줍짢은 농담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만. 허, 참. 이제부터 내 말이나 잘 들으라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그 여자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네, 콜록콜록. 그런데, 콜록콜록. 어떻게 잡을거죠? 콜록콜록...]
이 악취가 내가 입을 열자 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온 몸이 싸해지면서 굳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마른 기침이 났다. 그건 잭 아저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몸으로 말하려는지, 입을 가리키고는 손으로 X 자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말을 하지 말라는 건가? 나는 그의 말을 전달 받았았다는 신호를 보내려고, 입모양으로 '네'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목이 미치도록 따가웠다. 눈 앞이 노랗게, 그 다음에는 뿌옇게 보였다. 뭔가가 걸린 듯이 목구멍이 답답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잭 아저씨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