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의 팬 사인회 역시 성황을 이루었다.
세 주인공들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일본인들의 줄이 너무도 길었다.
행사 시간을 고려해 주최 측에서 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원수를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인을 해주는 손들이 점점 지쳐갔다.
이신과 민연이 변함없는 미소로 팬들을 대하는 모습과는 달리 하수진은 점점 웃음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그녀는 사인회 중간쯤에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
민연은 그녀의 빈자리를 알면서도 애써 반응하지 않았고 이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곧이어 사인을 이어갔다.
오전 팬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동경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바로 오사카로 이동하는 스케줄이었다.
대기실에서 주최 측이 준비한 점심을 막 들던 민연은 한참 만에 여진이 돌아오자 식사를 권했다.
"어딜 다녀온 거야? 배고프겠다. 어서 먹어."
"연아, 하수진이 귀국하겠다며 공항으로 갔데. 어제 일로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닐까?"
여진의 말에 소윤과 무영은 놀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훗......"
"연아, 네가 연락을 해보는 게......"
"근성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겠다는 건가? 내가 못할 말 한 건 없어. 먼저 상황을 위태롭게 한건 그 애니까. 사과를 받아도 내가 받을 일이야."
"그래. 그건 알지만 당장 저렇게 돌아가면 남은 행사는 어쩌고......"
"됐어. 철부지 어리광 들어줄 상황 아니야. 힘든 걸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들은 것도 고깝게 생각한다면 프로 근성이 없는 거지. 신경 쓰지 말고 어서들 먹어."
소윤과 무영은 민연의 당찬 모습에 꼼짝 않고 있다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내심 그간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결국 하수진은 고집을 꺾지 못한 채 그대로 귀국했고 오사카에서의 일정은 이신과 민연 투톱으로만 진행하게 되었다.
동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기자 회견과 팬 사인회 그리고 전통의상을 곁들인 <인현왕후>의 밤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행사의 성공은 앞에서 애쓴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번 일을 추진하며 뒤에서 말없이 도왔던 손길들에게도 큰 보람이었다.
주최 측에서 감사의 의미로 저녁 식사를 겸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수고한 이들을 위한 일종의 뒤풀이인 셈이었다.
프로모션에 참여한 양국의 모든 스태프들이 한자리에 모여 긴장을 내려놓고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와 웃음엔 성공적인 행사에 대한 안도와 기쁨이 숨어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스태프들의 이야기에 웃던 이신의 시선이 맞은편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던 민연과 맞닿았다.
순간 그는 웃음을 멈춘 채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식사를 마치고 술이 오가는 중에도 민연은 표정의 변화 없이 앉아 있다가 취기가 오른 스태프들이 가라오케 마이크를 잡고 흥얼거리자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녀의 뒤를 여진이 따라나섰다가 다시 돌아오자 이신은 옆에 앉은 매니저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귓속말을 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로비로 나온 이신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서성이던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매니저에게 우연히 들어 알게 된 민연의 룸 번호를 기억해내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참 만에 수화기 너머로 민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신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가만히 말을 꺼냈다.
"민연 씨, 저에요. 꼭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끊지 말고 잠시 들어줄 수 있나요?"
"........말씀....... 하세요."
"다시는 부담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잊으려고 애써도 잘 되지가 않네요. 막무가내인거 잘 압니다. 그래서 미안하고요.......하지만........ 제 가슴이 자꾸만 당신이라고 하네요. 연이 씨, 제가 싫지 않다면....... 기다려도........ 될까요?"
".......뭐, 뭐라고요?"
"당신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신은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다시 내보였고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어 끊은 줄 만 알았고 실망감이 피어나려던 찰나, 민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언제가 될 지도 모르는 시간을 계속 기다리신다는 건가요?"
"네."
"저, 이신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시간 낭비 마세요."
"제가 느낀 그 느낌을 믿어보려고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민연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이신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물론 그가 소스라치게 싫은 건 아니었다.
항상 신중하고 젠틀한 모습은 어느 누구에게나 호감과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쉽게 허락하기엔 자꾸만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번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좀처럼 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닫혀버린 문을 그는 용기 있게 다가와 자꾸만 두드렸다.
"연이 씨?"
"....... 언제라고는 말 못해요. 장담할 수도 없고 스캔들 나는 것도 싫어요. 그래도 좋다면.........뜻대로......하세요."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신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당연히 거절이 들려올 거라 생각했고 그녀를 또다시 불쾌하게 만들까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신에게 그것은 분명 긍정의 의미였다.
기뻤다. 아니, 말로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행복했다.
이신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쩌지 못한 듯, 이미 끊어진 수화기를 손에 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지? 내가....왜.....그렇게 말을 했을까.........’
스스로 내뱉은 말의 근원을 찾지 못한 민연의 가슴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이 그녀다운 처신이었고 차라리 깔끔할지 몰랐다.
자꾸만 다가서려는 이신의 마음을 알면서 그를 막아내지 못하고 여지를 준 것은 제 마음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상했다.
민연은 스스로의 변화를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정할 수 없었다.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한 이후,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매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수야. 그래, 실수였어. 기다림을 자청한 건 그였잖아. 시간이 길어진다면 견디지 못하고 떠날 거야.’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귀국길에 오르게 된 민연 일행이 로비에 나타났다.
“리오 커피”의 CF 촬영 스케줄 때문이었다.
소윤이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무영과 다른 스태프들은 짐을 싣느라 분주했고 민연과 여진은 소파에 앉아 귀국 후의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여진 누나, 지금 가시는 거예요?"
이신의 매니저가 생글거리며 다가오자 그 뒤로 겸연쩍은 얼굴의 이신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응, 범승아. 수고 많았어. 이신씨도 애썼어요. 저희 먼저 가게 되어 아쉽네요."
"그러게요. 실장님, 수고 많으셨어요. .......민연 씨도요......"
여진의 말에 이신이 웃으며 대답했지만 민연은 짙은 선글라스 뒤로 표정을 감춘 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민망함을 느낀 여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신 씨는 하루 더 머문다고 했죠?"
"네, 바쁜 스케줄이 없어서 좀 여유 있게 잡았습니다."
"그래요, 차기작 들어가기 전에 여유 갖는 것도 나쁘진 않죠."
"참, 민연 누나는 왜 <미설화> 거절하셨어요? 감독님이 애가 타시던데요?"
범승의 돌직구에 이신의 눈이 순식간에 빛났다.
최근, 그에게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가끔은 철없고 솔직한 면이 도드라져 너털웃음을 유발하곤 했던 범승이 대신 물어봐 주자 그는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여진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캐릭터가 너무 굳어지니까 단조롭기도 하고 연달아 사극을 하기엔..... . 어멋, 신이 씨한테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오해하지 않을 거죠?"
아무 생각 없이 지껄였다고 생각한 여진이 멈칫하자 이신이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각자 생각과 계획은 다르니까요."
소윤이 체크아웃을 마치고 돌아오자 조용히 앉아 있던 민연이 일어섰다.
"누님들, 조심해서 가시고 서울에서 또 만나면 좋겠어요."
"그래. 범승아, 또 보자. 이신 씨, 먼저 갈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이신이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자 민연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더니 곧바로 차에 올랐다.
전날의 통화 이후, 그는 그녀의 눈빛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사람의 눈엔 진심이 담기기 마련이었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 건 설레는 일이 분명했지만 이신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눈빛으로 증명 받고 싶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희망찬 기다림이 될는지...... 그녀의 대답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그저 따스한 눈빛이면 족했다.
하지만 민연은 끝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차창너머로 자신을 잠시 바라봐 준 게 전부였다.
이신은 멀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지만 한편으론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허락을 받은 것만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지만 생각지 못한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신에겐 벅찬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