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수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의 신용카드가 필요할 터였다. 그렇다면 제일 가까운 누군가는 김대식뿐이라고 생각한 지용운이었다. 송정수가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은 김대식뿐이라고 판단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주효했다. 분명히 김대식은 광역수사대에 버젓이 있음에도 백화점 식당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했다는 내역이 고스란히 컴퓨터에 나타났다. 식사는 2인분이었다. 함께 있다는 뜻이었다. 지용운은 다시 김대식을 다그쳤다.
“김 대식! 자네 옷 벗고 싶지? 이렇게 옷 벗으면 연금도 없어. 알겠어? 지금 자네 신용카드가 사용되었다고 올라왔어. 이래도 송 정수를 안 만났다고 할 거야?”
김대식은 더는 변명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연쇄살인범 도주를 도운 죄로 수갑을 차야 할 판이었다. 의리를 중요시 했지만 자신이 죽을 판에 몰리자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 가정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직장 상사의 부탁이다 보니 달리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 검거하는데 돕는다면 내가 없던 일로 해주지.”
지용운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김대식은 죄인의 틀을 벗어날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한 사람은 범인 은닉죄로 구속이 불가피하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했다. 김대식은 자신이 아는 내용들을 거짓 없이 틀어놓는다.
“군산에서 밀항선을 탄다고?”
“네.”
“그게 언제야?”
“군산에서 연락 오면 내려간답니다.”
“그럼 핸드폰 두 대는 누구명의로 개통시켜 준거야?”
“제 명의로 해줬습니다.”
지용운은 두 사람이 잠적하면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조용히 그들을 행적을 좇기로 하고 두 대의 핸드폰을 도청함과 동시에 소나타를 전국에 수배했다. 김대식의 신용카드는 사용정지를 시키지 않고 그냥 내버려뒀다. 신용카드사용으로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자 했다. 사용중지를 시킨다면 당연히 꼬리가 밟힌 줄 알고 잠적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수사는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군산경찰서의 협조가 필요했다. 즉시 지용운은 광역수사대장에게 보고했고, 수사대장은 군산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산경찰서에서도 즉시 출동할 경찰병력을 중무장을 시킨 채 대기했다. 언제든지 군산항으로 나갈 채비를 해둔 상태였다. 그러면서 송정수가 통화를 한 당사자의 핸드폰도 동시에 도청해두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곽상근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선주한테 전화를 걸었다.
“영감님! 내일 저녁에 가능하답니다. 저짝에도 기별 넣어주십시오. 내일 두 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시간 되면 출발하니까 놓치면 그걸로 끝인겨. 저짝에 연락하는 순간 돈도 건너갈 것잉께.”
“알겠습니다. 내일 출항에만 문제없도록 하십시오.”
통화의 내용이 그대로 감청실에 접수되자 광역수사대는 분주해졌다. 먼저 한 팀을 군산경찰서로 내려 보내서 군산경찰서의 기동병력과 합류하게 하고 나머지는 접선 내용에 따라 움직일 계획이었다. 선발대로 장석태를 포함한 네 명의 수사관이 자동차로 군산으로 먼저 출발했다. 모두 권총을 가슴에 찬 채였다. 상대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에 모두 긴장상태였다.
백화점에서 옷을 가득 사고는 새로 산 트렁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새로 산 옷들도 모두 여자 옷이었다. 곧 닥칠 비극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만큼 죽더라도 여자로 죽고 싶은 나리였다. 그런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청도에 있는 사촌동생에게도 아는 여자라고만 얘기한 정도였다. ‘아는 여자!’ 정수가 아는 여자는 나리뿐이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여자였고, 한 때는 자신이 버린 여자였다. 아내가 첫 사랑의 여자였고, 그 다음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나리였다. ‘나를 배신한 아내, 내가 배신한 나리’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애증이 교차했다. 자신이 배신한 여자를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정수였다. 어떤 고통도 어떤 책임도 자신이 감내해야 한다고 믿는 정수였다. 벼랑 끝에 선 여자를 차마 못 본 척 할 수가 없었다. 벼랑 끝에서 한 포기 풀을 잡고자 손을 내민 그녀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한 포기 풀이되고자 정수는 스스로 자청한 꼴이었다.
정수는 다시 위통이 시작되었다. 이제 위통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은 장소를 망라했다. 하필이면 저녁을 먹는다고 식당에서 주문을 한 후 시작되었다. 숨을 헐떡거릴 만큼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손은 자연스럽게 배 쪽으로 향하고 고개를 숙여 신음을 한다.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송골송골 올라오고 얼굴은 하얗게 창백했다. 정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나리는 깜짝 놀라 정수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정수 씨! 정수 씨! 날 봐요.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위가 아픈 거예요?”
“아... 괜찮아질 거예요. 곧 괜찮아...”
“안되겠어요. 병원으로 가요. 이러다 당신 큰일 나겠어요.”
“안 돼! 병원은 안 돼요. 내일 당신 떠나고 나면... 그때 갈게요. 지금은 안 돼!”
“그럼 일어나요. 호텔에서 좀 쉬어요.”
나리는 정수를 부축했다. 만나는 동안 가끔 위가 아픈 표정을 지어서 아프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처럼 많이 아픈 줄은 모르고 있었던 나리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사코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는 정수를 부축하여 호텔로 향했다. 오후 내내 백화점에 머물던 두 사람은 백화점 옆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나리는 정수를 대신하여 프런트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고 객실 키를 받았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정수가 사용하는 신용카드의 행적을 좇던 광역수사대를 간신히 피한 것이었다. 만일 호텔을 신용카드로 계산했더라면 호텔방에서 꼼짝없이 잡힐 두 사람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을 비껴갔다.
호텔방에 도착한 나리는 정수를 위하여 해줄 일이 없었다. 먹던 약은 이미 떨어졌고, 약국에서 사올만한 약도 없었다. 겨우 약국에서 사온 약이란 것이 진통제였다. 주로 치통과 두통에 먹는 진통제를 사온 것이 다였다. 정수는 진통제 네 알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호텔방에 있던 미니어처 위스키 두 개를 유리잔에 따르고선 벌컥벌컥 마셨다. 빈속에 독한 술과 약이 혼합되어 위안에 녹아들어갔다. 잠시 후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약효가 있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통의 주기표에 따라서 잠시 통증이 줄어든 것이지만 두 사람은 약효라고 믿었다. 정수는 침대에 누웠다. 도저히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당신 나 땜에 배고프겠다.”
“난 괜찮아요. 평소에 많이 먹지도 않는데 뭐”
“그래도...”
“좀 있다가 죽이라도 사올게요. 죽은 그래도 먹을 수 있잖아.”
“미안해. 나 땜에 마음고생 시켜서...”
“이게 뭐라고? 당신은 나 땜에 더한 것도 하면서”
한 시간 후 나리는 호텔 밖에서 죽 두 그릇을 사가지고 왔다. 통증이 덜 하자 정수는 허기진 배를 죽으로 달랬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두 사람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리도 이 남자와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리를 하면 청도로 오겠다고는 했지만 얼마나 무모한 약속인줄 아는 나리였다. 정리라는 것도 쉽지 않아보였고, 국내도 아닌 중국 청도라면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밤이 너무 짧아보였다. 이대로 보내기가 싫었다. 눈을 감아도 정신은 맑았다. 나리는 이런 마음에 잠 못 들었지만 정수는 간간이 오는 위통으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 정수였다. 두 사람이 잠 못 드는 이유는 달라지만 그렇게 짧은 밤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