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이 의사와 상담을 하러 빠진 사이- 내가 제이미를 찾아갔다-
제이미는 마침내 이 동네에 제 집을 얻은 상태였다.
짐이랄 것도 없지만 정리 도와줄래요? 해서 가는 찰나였다. 어차피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작약은 도와주고 싶어도
몸이 안따라주니 마음만 불편할 테고....
아주 오랫만에 제이미를 만나는 거였다... 이사가 그리 처벌받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다. 원룸은 생각보다 우리 건물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담한 건물의 계단을 오르자-
짙게 다가온 여름의 열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여름이다.... 내가 작약을 알게 되고 나서- 4번째 맞는 여름...
우리 사이의 공백을 더하면.... 벌써 4번째다.... 어느새...
시간이라는 건 내가 미처 적응했다, 내가 이제 몇살이구나- 하고 인지하고 익숙해 질만 하면, 그 숫자를 벗어나
다음 숫자로 향해버린다- 나도 더 이상 어리고- 화장도 못하고- 내내 자신안의 가시에 마음을 다치고
스스로의 모순에 시달리던 , 여자가 아니었다...
성숙해져 있다... 내가 미처 눈치 채기도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 제이미가 문을 열었다- 머릴 짧게 깎은 모습이었다. 내내 덥수룩한 편이었는데
그는 내가 인사하려다 말고 머리로 눈을 돌리자 먼저 말했다.
"여름이 되니까 더워서 , 어쩔수 없이-"
그 말을 하며 장난스래 손가락으로 가위질 흉내를 내 보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준비 해 간 액자를 내 밀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스케치 한 것 중 하나에 채색을 한 것이었다.
거기로 그가 나를 부르러 왔을때..
운명이 나를, 부르러 와 주었을때-
나는 결국에 내 꽃의 곁으로 돌아올수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감사 선물이었다. 제이미는 의미를 안 듯이 웃으며
그걸 받았다.
"고마워요- 집이 좀 휑하죠? 당장 가구같은건 필요 없을것 같아서요-"
있는 거라고는 부억에 있는 수저 달랑 두개- 냄비 하나- 매트리스만 덜렁 바닥에 놓여 있고- 베게 이불- 둘다 하나씩이다-
그리곤 여행가방이 다다... 나는 좀 머쓱했다... 다른거라도 사 왔어야 했나 싶었다..
나는 제이미가 내 주는 방석 귀퉁이에 어색하게 앉았다. 제이미는 작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꺼내서 내게 건내고는
벽에 달린 에어컨을 조절했다.
"원룸 , 안 익숙하죠?... 내내 비싼 집에서만 살았을것 같은 인상인데-"
내가 솔직하게, 묻자 제이미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었다.
"미국에 있을때는 더 지독한 곳에서도 많이 지냈는걸요? 쥐, 바퀴벌레가 득실 거리는 곳에서도 살았어요
거기에 비하면 여긴 성에 가깝죠.... 우리 본가가
돈이 많은거지 저는 , 그 이후엔 집도 절도 없었어요- 이 표현 재밌죠?
아무것도 - 없었어요...
그땐 집에 에어컨도 없고 있는거라곤 라디오와 낡디 낡은 팬 하나가 다였죠 물론 , 여기가 훨씬 덥지만요-"
제이미는 씩 그말을 하고 웃었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 이후로- 잘 지냈어요?"
제이미가 먼저 묻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하민씨 일로 아직도 많이 화가 났을 거라고- 그건 작약도 우려했고
강비서님도 한 말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처벌이.. 여전히 약하다 생각하죠?"
제이미는 잠시 음료를 머금으며- 밖의 밝은 빛과 여전히 드는 매미소릴 잠시 듣다가 내게 말했다.
"..... 모든 일에는 끝이란게 있잖아요?..... 그 댓가를 치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게 싫을 뿐이에요-
댓가를 치른건 미스터 심이죠- .... 그 지견이라는 미스터 심 말고...... 심 지혁, 내가 아는 미스터 심이요..
그때 이후 ... 그 일 이후 몇년을 슬퍼했는데.... 겨우 7년이라뇨?.... 하지만 , 그 마저도 미스터 심이 원한거란걸
아니까.... 따로 트집을 못 잡겠더라구요-"
제이미는 약간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 하임씨도 지겹게 들었겠지만... 그 하임씨가 없던 2년을 저는 봤잖아요?... 본 입장에서는 지혁씨가 이기적이라고는
절대 말 할수 없어요...
끔찍하도록 마르고 공허해 보이는 그 눈동자... 난 그때 강한척 센척 했지만 얼마나 놀랐었는지 몰라요..
시들어버린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이젠 그러면 안되요....
모든 일에는 끝이 있죠..... 이젠 끝이 나야 할 시간이 온 거에요- 만약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혁씨와
똑같이 잃었대도... 나는 그리 못했을 거에요....
어느정도 후엔 결국 자기 합리화든 뭐든 해서
나 스스로, 그냥 날 구했을 거에요.... 하지만 지혁씬 안 그랬죠-... 자기에게 완전 형벌을 내리는 수준이었거든요.... 말 안할때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런데 그런 표정도 아니었어요...... 아직도 난 가끔 꿈을 꿔요- 지혁씨가 울던 ,
하민이의 장례식을 꿈꿔요.... 그때의 울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도 , 찢어 놓는 울음소리였어요
너무 슬펐죠... "
제이미는 먼 , 곳을 아득히 바라보는 것 같은 눈으로 말하곤 씩 웃었다.
"그러니 그렇게 처벌이란게 떨어지고..... 실제로 그 사람이 하민이에게 미안하길 , 지혁씨는 바란댔지만..
그런게 , 아니라고 해도..... 어쩔수 없죠-... 하민이는 아름다운 애였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았어요-
이 말을 들었으면, 아마 또 웃었을 꺼에요- 장난스럽게-"
그립단 듯한 목소리다, 마치 - 만날수 있는 사람을 이야기 하듯..
"여전히, 가끔은 그립나요?"
내 말에 제이미는 그런 질문은 생각도 못했단 듯이 웃었다.
"그럼요... , 좀 이상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 , 이런 기분이 들까 싶은 .... 그런 기분이에요....
좋았던 기억들이 많죠-
웃기도 하고- 때론 그리워서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그 애는 내 가족이었어요-
내게 용기를 주었고- 내가 나일수 있도록- 힘 있는 손으로 날 도왔죠.... 그러니 , 그 애는 내 가족이었어요-
지금도요"
제이미는 웃었다. 그 미소엔 여러가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툭 이야길 꺼냈다.
"전 하민씨를, 한번 멀리서 본게 전부죠- 더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었어요.... 하지만 - 그 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알것 같아요, 수많은 이야기에서도 들었지만... 그분은 밝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이해심이 넘치고-.... 공정한 사람이었단걸
결국 난 , 지혁씨를 보면서 느끼거든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내 손을 잡아줄때의 얼굴을 보면..
하민씨가 , 그의 이런 부분을 만들어 줬겠구나 끌어내줬겠구나 하는 생각 하거든요....
그러니 , 감사할 거에요-.... 지혁씬 내게 그랬어요... 언제나 , 하민씨를 다 지워내진 못할거라고요..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있을꺼고 때론 추억하고 ,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간직할 거라고요..... 그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나도 그럴꺼에요, 내 안에서도 완전히 지울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젠.... 나도 언제나 고마워 하고-....
그녀가 그가 행복하구나 하고 안심할수 있게... 지혁씨한테 최선을 다 할 거에요-"
그 말에 제이미는 씩 웃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말한다.
"그 애는 , 내게 친구까지 주고 갔잖아요- 그것만 봐도 알수 있죠.... 여기서의 생활, 솔직히 하민이의
고국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했겠죠- 하임씨, 진환씨- 지혁씨... 또 여기서 알게된 모든 이들을 인도한건
결국 하민이니까요-..."
그러곤 곧 다시 말을 잇는다.
"그앤 그런 애에요....... 하여간 쉽게 잊을수 있는 존재는 아니에요- 참"
우린 살짝 같이 웃고- 벽에 내가 가져온 그림을 , 시간을 들여서 걸었다... 제이미는 그림을 보면서 씩 웃었다.
"여기에 하임씨가 있었죠?...."
"네..."
제이미는 살짝 찡그리듯 웃으며 , 그림을 바라보면서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안 묻네요- 그날 같이 온 사람이 누군지...?"
"알것 같지만, 물어도 되요?"
내 말에 제이미가 웃었다.
"그래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순순히 나온 그말에 내가 고갤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조심 스러운 사람인지 몰라요.... 어쩌면 내가 그런 걸지도 모르죠...
모두가 템포가 다르잖아요? 하지만 그도 날 좋아한단거 정돈 알죠...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하다. 그리 생각해요..... 나 때문에 물들였다고 , 그리 생각하진 않아요 예전같았음 그리 생각했을 거에요,
만약 지혁씨가 아니었다면,"
그 의아한 말에 내가 살짝 고갤 갸웃거리자 그가 말했다.
"지혁씨가 내게 가장 자주 해 줬던 이야기가 뭔지 알아요?..... 사랑을 피한다고 피할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거에요-
사랑이면.... 자신이 부정하고 도망가도- 몇번이나 알게 될 거라고 했죠... 그와 만나기 전엔 난 사랑이 우연이 계속 일어나서
일어나는 ...그런 , 일이지 .... 그게 운명이라고 믿지 않았거든요 , 운명같은건 사람들이 편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했죠"
제이미는 방 안의 공기를 한번 들이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 아니더라고요... 마음에 , 그 생각이 한번 들고 나니까, 맙소사- 정말 나가질 않더군요...
그제야 지혁씨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았죠-...
피한다고 피할수 있는게 아니라던 그 말이 맞았죠
그런걸 '필연' 이라고 한다면서요?..... 한글엔 참 , 연 이라는 글자에도 많은 의미가 담기잖아요-
인연, 필연, 우연, 또 연인도... 그렇구요.. 같은 한자인가요?"
제이미는 즐겁단 듯이 재잘거린다. 난 씩 웃고 만다.....
제이미의 미소는, 참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어쩔수 없이 그리 웃게 된다.
"지혁씨는 이제 하임씨 없으면 안되요, 하임씨도 알듯이.... 제가 , 그냥 생각하기엔, 하민이가 하임씨를
지혁씨에게 보낸게 아닌가 싶을때도 있어요.... 지혁씨가 굳어서 동상 처럼 있을 때.... 난 정말 두려웠어요
공포가 맞죠, 무서웠어요.
하민이에게 , 지혁씨가 , 이러다가 가게 될 까봐서-.. 내 인생에서 또 친구를 잃고 후회하는 일이 또 일어날 까봐서
저는 정말로 , 두려웠어요- ...
하민이가 그런걸 원할거라고는 생각치 않았거든요 ... 그 애는
남의 아픈 사정에도 어김없이 눈물 흘리는 애였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고통스럽길
원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임씨가 오고 나서... 드디어 지혁씨가 움직였잖아요-.....
꽁꽁 얼었던 사람이 녹듯이 그랬죠... 제 말도 부모님 말도 의사의 말도, 하다못해 진환씨의 말도
듣는거 같지도 들리는지도, 몰랐다니깐요... 귀 검사를 몇번이나 한줄 알아요? 뭐라 말이 있어야 .. 사고때문에
귀까지 , 그렇게... 뭐라고 하죠? 안들리는게 아닌가 할 정도였는데.... 하임씨는 온지 이틀만인가.... 그 사람을 말하게 했죠..
그런게 기적이지 , 다른게 기적인가요? 그런게 사랑이죠-.... 그런게 운명이고 , 그런게 필연이고-
그런게 연인이죠"
제이미는 여전히 말을 잘 한다-
나는 씩 웃는다. 물론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그와 지내는 내내
나는 지나칠 정도로 내내 설레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더 한걸 바라지 않았다. 그게 좀 답답하기도 했으나
사상이 조선시대 선비와 비슷한걸 고려해 그냥 , 단순하게 발 맞추기로 했다고나 할까... 적어도 예전에 유진이랑 고민했던
유치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자다 깼을때 이 사람이 , 생전 정 자세로 미라마냥 드라큘라마냥 정자세로 잠들던 이사람이
요즈음엔 나를 뒤에서 꼭 안고 있을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아침인데도 주책맞게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모른다..
내가 조금만 꿈지럭거려도 그는 반사적으로 나를 꽉 안는다... 아주, 이만큼이나 가까워 졌으니..
점점 더 그리 될수 있겠지 그리 믿을 뿐...
"하임씨 얼굴이 발그레 해 지는걸 보니- 다행이네요- 다리때문에 고생 많다던데.. 지혁씬 좀 괜찮아요?"
그 동안 보러 한번 오지 않아- 작약도 제이미가 화가 난 건가 했었는데....
"그럼 한번 보러 오지 그랬어요?... 지혁씨가 오해해요, 제이미가 화 났다고.."
"...음... 화난게 아니라- 그냥,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저는 하민이를 생각나게 만드는 존재잖아요?
저도 느끼거든요- 말 할때 템포가 비슷해요- ... 좀 지혁씨가 그런걸 빠르게 캐치하는 법이니까.....
지금은 좀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나를 나만으로 볼수 있음 보러 갈려고 했죠-"
말하자면 '배려' 였으려나.......
나는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전에 떠나기 전의 연애에서 , 경주에서 까지만 해도-
작약이 , 나를 하민씨 자리에 앉힌게 아니라... 그의 반대 쪽 손에 하민씨의 손이 있단 걸 알기에 좀
마음이 , 옹졸하지만 무척이나 불편했다.... 저 사람과 공존해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 인정할수 없는 마음이
들끓을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 그가 너무 좋아서 포기하지 못했다... 그가 좋으니까 ,
그의 결점까지 다 포용해야지 그랬는데..
그는 , 굳히 하민씨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2년 사이에 천천히 그리고 최근에서는 완전히
마음의 방을 비우고- 그녀를 추억의 한 장으로 앨범에 끼웠다.
그리곤 내게 그 방을 주었다- 그 방의 창에선 가끔 하민씨가 보일지도 모른단걸 나도 알지만
이젠 그때처럼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방 안에 있는건 나이고-
그 옆에 그는 두손으로 나를 꽉 붙들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하다...
"지혁씨는 이제, 제이미를 제이미로 볼 거에요, 말 안해도 많이 걱정해요-"
제이미는 그 말에 , 환하게 웃곤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요?.. 그렇죠 지혁씨가 내색 안해서 그렇지, 은근히 다정하죠?"
"에- 아닌데.. 원래도 다정해요-.. 괜히 틱틱 거리는 건- 쑥스러울때만 그래요"
그 말에 제이미가 밝게 웃는다. 나도 그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우리는 다시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되었고
이제 나의 연인, 나의 유일한 연인인 그를 떠올렸다. 살짝 더 짙은 주황빛을 띄는 해 사이로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스며들고- ... 나는 빨리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내 맘이 들키고 말았는지- 그는 씩 나를 보면서 웃었다.
-
오늘로 5번째 재활-
두번째 수술은 하임씨와 사모님을 앞에 두고서 잘 끝났고... 퇴원은 생각보다 빨랐지만 , 재활은 더디기만 했다.
미리 경고하신 바였다. 재활에 익숙해 지기 전까진 하임씨는 오지 못하게 하기로-
또.... 작가님은 내게도 미리, 말했다.
고통스러울 거다.. 슬플거고 힘들거다- 그러니 너도 견디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도 다른데 가 있거나 해라
버티지 못하면서 버틸 필요 없다고 - 몇번이나 이르짚으셨지만 난 떠날수가 없었다.
의사의 말은 이때는 정확히 맞았다.
일그러진 뼈와 쇠들을 제자리에 다시 박아 넣으려고 하니 , 작가님은 처음엔 이를 너무 악무셔서 나와서 침을 뱉으면 피가 가득할 정도였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라는 재활 지도사의 권고에 따라 작가님은 소리를 쳐 댔는데... 듣고 있자니 고통스러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내색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
전엔 소리 한번 안 냈댔다.... 그게 , 이제야 얼마나 무서웠을지 알 만하다..
작가님은 땀, 눈물이 범벅된 눈으로 독기를 가득 품고 재활을 하신다.... 보조 기구를 차고도 걷는데는 , 한걸음에도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작가님의 숨소리가 듣기 힘들만큼 색색 , 폐를 힘겹게 빠져 나오는게 느껴진다..
의자 앞에 앉아서... 나는 작가님의 충고를 듣는게 좋았겠다- 싶었다가도 - 마칠 즈음에 땀 범벅이 되어 있는
작가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곤 했다...
작가님은 한참의 재활이 드디어 끝 난 듯- 휠체어로 다시 털썩 앉으셨고-
다리를 고정하는 기구를 제 손으로 푸시곤- 수술 후에 받은 묶는 다리 보호대를 알아서 다리에 매신다.
그리고서야 내게 눈이 닿고 나는 수건을 건내 드린다.... 언제나 옷이 등까지 쫄딱 젖고- 녹초가 되신다..
"......."
얼굴에 가득 맺힌 물을 닦고선 작가님은 , 하도 소리를 참고 억누르며 질러 대서 까칠하게 쉰 목소리로 내게 물으신다.
"또, 앞에 있었어?"
"..."
난 그냥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작가님이 미간을 찌푸리신다... 목소리가 거칠어서- 작가님이 화가 난것 같지만
이건 화내시는게 아니다.
"야.... 듣고 고통스럽고 왜 , 쓸데없이 스스로를 고문해?.. 의사가 말한 내용이었잖아.. 아파야 내 꺼 된다고 말 했었잖아..
안 그럼 그냥 다리에 달려 있을 뿐이야.. 아파서 , 훈련해야 내꺼 된다구... 근데 그때마다 울면 어떻게 해"
"안울었어요."
난 반사적으로 말을 꺼냈지만 작가님이 내 눈을 보곤 흥 하고 숨을 내쉬신다.
"눈 빨개-.... 다음부턴 아예 혼자, 택시 타고 올까?"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아뇨,!!! 아뇨... 아니에요... 진짜 , 울진 않았어요"
"속상하긴 했단 말이네- 그렇지?"
작가님이 내가 미는걸 마다하고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덧붙이신다..
"그렇지만요.... 혼자 계시게 두고 싶지 않은 걸요.."
내 머뭇대는 말에 , 작가님은 아까의 악이 믿기지 않을 만큼 픽 하고 웃으신다.
"나 때문에 총각으로 늙어 죽을래?.. 원래도 니가 하는 연애 오래 안가는 건 알았지만 누구라도 소개라도 좀 받아-! 좀 사귀어...
나한테 메여서 좋은 청춘 다 날릴래?"
작가님은 가벼이 말 하시지만- 아까 내가 문틈으로 들은 소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늠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 아무것도 못 알아챈척 웃었다...
작가님이 재활을 하신 날 만 , 집 안까지 데려다 드리는데
문을 열었더니 하임씨는 아주머니와 같이 테라스 창을 닦고 계셨다... 날이 더운데- 둘다 얼굴이 발갛다-
"아- 오셨어요?"
아주머니는 , 그 이후 아예 간병인은 그만 두셨다.
내게 말씀하셨다. 내내 간병인을 해 왔고 수없이 많은 이별을 보았지만..
이번일을 겪고 나니.. 또 다른 이별을 볼 엄두가 안 나노라고.... 그래서 아주머니를 작가님은 자신을 도와 달라고
고민없이 부탁 드렸고 오늘까지도 그러하다- 하임씨는 싹싹해서 아주머니와 아주 살갑게 지내고- 최근엔 요리도
배우시는 참이었다.
두사람은 벌써 친해졌다. 하임씨가 격의 없이 말을 건내고 싹싹하게 구니까- 친해 질 밖에...
작가님에게 자연스레 다가오는 하임씨는 오늘 힘들었어요?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묻고 , 작가님은
고갤 , 마치 봄처럼 웃으며 젓는다... 안 힘들었다고?! 그 거짓말에 나는 흠칫 놀라지만 , 아닌 척 , 못 본 척 한다.
작가님이 샤워하러 방으로 들어가시고 나서야 하임씨가 내게 다시 묻는다.
"오늘도 , 당연하게, 많이 힘들었죠?"
난 그저 대답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작가님이 저 있는 것도 불편하시데요... 그런데 뭐 어떻게 해요- 익숙하신 것 처럼 그래요 , 아파야
자신의 것이 되신다고..."
".... 수술 자국 아직도 선명한데- 벌써 부터 저렇게 재활하는게 맞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하임씨는 낮게 한숨을 쉬신다- 퍼프소매 블라우스 위의 작은 얼굴은 - 예전과는 또 다르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보다 슬슬, 하임씨 부모님께 말씀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하임씨 여기 온지 벌써 8개월이 다 지나가는데.. 작가님 걱정하세요,"
그 말에 하임씨가 고갤 갸웃거리고 난 말실수 했다 싶다.. 작가님은 프러포즈에 대해선 일언 반구 말도 하지 말라 하셨는데..
"아... 오래 거짓말한거 아시면, 하임씨가 곤란하실까봐서.. 걱정하시는거 같아요-"
내가 둘러 대자 하임씨는 씩 웃고 만다.
"괜찮아요.... 세진이가 말 하진 않았을 테고...원래도 가 있을 때도 일년에 한번도 연락 잘 안하셨는걸요...
물론 , 이제 차일 피일 미룰 일만은 아니니까.. 이야길 하긴 해야 하지만요... 이젠 저 사람 나 없이 좀 잘 지내는 편이니까..
옆집도 정리를 하긴 해야 할 텐데요-.... "
"잘 ...지내신다고요?"
내가 의아한 듯 되 묻자.. 하임씨도 헷갈린 다는 듯 고갤 갸웃거리신다..
"아- 강비서님 생각엔 아직은 아닌가요?"
그래, 내 생각엔 아직은 아니었다...
사모님, 회장님, 또 다리가 불편한 작가님도 아득 바득, 그 쓰레기를 위해 면회를 차례대로 가셨다.
이사는 생각보다 멀쩡하다- 거기에 거친 사람들이 워낙 많은지라 지내기 힘들거라 그리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쩡하게 잘 지낸다고 그랬다.
다 나쁜 사람만 있는건 아니더라고- .. 그리 말했다고 말하던 작가님의 표정은
미묘했다.
죄책감이 가장 크게 보였지만 - 이사는 오히려 원망보다는 다른 생각에 바빠보였다고 했다....
이제서야 김희영에 대해 다시금 알아가는 중이라면서 , 작가님에게 웃으며 그 말을 했다고 했다.
하임씨가 책장에서 빼냈던 그 성경에는 , 가족 사진이 끼여 있었다. 처음 면회를 갔을때 작가님은
그걸 이사님께 드렸고 , 종교는 커녕 선한 마음도 없던 이사는 그 성경을 매일같이 읽는다고 그랬다. 그게
아마도- 김희영씨의 어머니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이사가 알지는 모른다... 그 장례식 이후, 김희영씨는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이사는 그 곳을 방문하지 않고 , 감옥에 간 것을 간혹 후회한단 이야길
작가님에게 한것 같았다. 작가님은 , 마음을 써서 그곳에도 가끔 꽃을 보내고 이따금은 찾아 가기도 하셨다...
내가 이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 작가님은 그 말을 듣고는 쓸쓸히 웃으실 뿐이었다.
"상대가 죽고 나서 배우는 사랑도 있는 법이야.. 나도 그랬으니까... 시간이 필요한거야,
마치 애기가 처음 말하는거 배우는 거 , 처음 글 쓰는거 배우는 거랑 비슷해... 완전 처음이니까... 그냥 모르고 생소하니까-
계속 이야기 하게 되는 거 뿐이니까.. 괜찮다고-"
정말 이사는, 그리 김희영을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님 사랑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단순한 모면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을...
정말 작가님이 읽으시는 데로 , 처음 배우고 있는 것일까-....
그때 작가님이 샤워를 끝내신듯 나오셨고 하임씨는 웃으며 그 곳으로 달려가셨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걸었다-
늦은 오후- 아직도 해가 뜨거워- 걷은 양복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