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생님, 오랜 만에 만나니 반갑네요. 다음 주 개학이지요? 정선생님 실어다 주니까 진짜 방학이 끝났는가베요. 하하하. 우리 집 새끼 방학 숙제 한다고 난리드만. 숙제 안 해도 좀 봐주이소. 하하하.”
동해랑도행 여객선에서 내려서 작은 배로 갈아타니 벌써부터 환영의 인사가 빗발쳤다.
해랑도의 깨끗한 바다를 보니 진짜 개학이 실감났다.
이제 한 학기만 더 하면 섬생활도 끝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끝을 생각하니 벌써 아쉬움이 밀려왔다.
시인은 1주일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가게 오빠들이 아버지가 만든 특식을 갖다 날랐고 피에 좋다는 온갖 보양식을 먹어야 했다.
영양제를 맞고 병원에서 계속 쉬니 혈소판 수치가 곧 정상을 되찾았다.
몸에 멍도 거의 사라져서 다시 맑은 피부색을 되찾았다.
다만 빈혈이 있으니 계속 철분제 복용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동원은 서울에 갔다가 또 시간을 내어 시인을 보러 왔다.
시인의 피검사 결과를 듣고 다행이라며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정선수가 보고 왜 니가 내보다 더 걱정을 하냐며 이상한 논리를 펴서 다들 이마를 짚었었다.
해랑도에 오니 동원이 더 보고 싶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시인이 다시 3킬로그램 더 살을 찌울 때까지 금주령을 내렸고 시인은 이제 가게에서도 술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작가님이랑 몰래 마셔야지. 크크크.’
"아이구, 근데 선생님, 무슨 짐이 이래 많습니까? 처음 보다 더 많네예? 나중에 기다리이소. 집까지 들어다 드리야 되겠구만."
이 선장이 시인의 큰 캐리어를 보고 마음을 썼다.
"아닙니다. 바퀴 달려 있으니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시인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온갖 영양제에, 이장님댁 드릴 음식에..
시인의 아버지가 얼마나 많이 쌌는지 겨울옷은 채 가져오지도 못했다.
“어? 지원이 아니가? 이야! 니 진짜 오랜만이다.”
“아저씨는 진짜 그대로네요. 우와. 오빠 없을 때 나도 집 좀 쓰려구요. 아저씨 저 생선 좀 많이 주세요. 하하하.”
조금 통통한 몸집에 츄리닝을 입은 여자가 마을 사람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자가 시인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 뵙는데 들어보니 선생님이세요? 저는 이지원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네! 반갑습니다! 정시인입니다. 마을에 놀러 오시나봐요?”
“제가 만화가라서 하하하. 작품 활동 좀 하러 왔죠. 만화 좋아하세요?”
“우와! 완전요! 우와! 저 진짜 만화책 좋아해요. 어떤 만화 그리셨어요?”
“헤.. 아직 아무 작품도요. 계속 공모전에 내 보는 데 결과가.. 이번에는 대박을 터뜨릴까 생각중이예요. 하하하.”
지원은 살짝 체격을 좀 컸지만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스타일이었다.
“저는 스물일곱인데요. 선생님은 몇 살이세요?”
“어머, 완전 동안이시네요. 스물하나, 둘 정도로 보여요. 저는 스물여덟이네요. 호호호.”
“언니라 불러도 돼요? 섬에 젊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요. 우리 한 번씩 같이 놀아요.”
“호호호. 그럼요. 그리신 만화 보여주세요. 제가 좋은 독자 해 드릴게요.”
시인은 너무 즐거웠다.
처음에 올 때는 드라마작가를 만나더니 지금은 만화작가였다.
해랑도에 올 때마다 생기는 인연들이 너무 신기했다.
파견 기간이 끝나도 종종 다니러 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선착장에 내린 둘은 나란히 길을 올라왔다.
이장님댁에서 인사를 하고 지원은 산을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시인은 의아해했다.
‘산 뒤쪽에는 작가님 집 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아.. 그 옆에 조그만 집이 하나 더 있었지?’
시인은 대문을 들어가며 이장님 내외와 반갑게 인사했다.
아직 개학은 나흘 남았지만 또 2학기를 준비하려면 남은 나흘이 무척 바쁠 것 같았다.
경철 어머니가 깨끗이 치워 놓았는지 방은 마치 어제까지 시인이 생활한 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 때 동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인씨, 잘 도착했어요?”
“네. 방금 방에 들어왔어요. 안 바쁘세요?”
“이제 탈고 했어요. 하하하. 16부작중에 14회 찍기 시작하니까 곧 해랑도 내려갈 수 있을 거예요. 보고 싶네요. 몸은 괜찮죠?"
"그럼요! 완전 괜찮아요. 아빠랑 오빠들이 먹을 걸 얼마나 많이 싸줬는지.. 어휴.. 작가님이 이 짐을 보셔야 해요."
"동원씨? 와서 이것 좀 봐줄래요?"
전화기 너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시인씨, 나 일 하는 중이라 가봐야겠어요. 나중에 또 전화 할게요."
"네. 드라마 대박 날 거예요! 아자 아자!"
"하하하하. 고마워요. 끊어요."
시인은 폰을 끄려다가 동원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다시 동원을 불렀다.
"작가님!"
“어때요? 저 잘 나왔어요?”
동원의 목소리 대신 여자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전화를 끊어야 할까?
시인은 잠시 망설였다.
"이 장면에서 은유림씨 잘 나왔습니다. 이 애드립은 대본보다 더 잘하신 것 같네요."
"어머, 작가님 칭찬 받으니 너무 좋네요."
유림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아직도 통화중인 동원의 폰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가 안 끊어졌다?
"작가님, 지난번에 데려다 주셨던 거....“
동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유림을 쳐다보았다.
“그 때 호텔에 업어 주셨잖아요?”
시인은 놀래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유림의 시선이 동원의 휴대폰을 향했다.
화면에 빛이 들어오며 통화가 종료되는 것이 보였다.
“감사했다고요. 호호호.”
동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보다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님이 은유림을 업어줬다고? 그것도 호텔에?
둘만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작가님이 왜 굳이..
설마 둘만 있었어? 왜?
아니야,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이런 걸로 오해하면 내가 더 이상하다.
시인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지만 우울해지는 기분은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게 연예인과 경쟁하며 싸우고 토라지는 커플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일이 되고 보니, 아니 동원에게는 단지 ‘연예인’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으므로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갑자기 영현과 은화의 온갖 시나리오들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더 나빠지고 있었다.
“이장님? 안녕하세요? 하하하. 경철이 진짜 많이 컸네. 하하하. 네. 여기 선생님이랑 잠시 놀다 가려구요. 네? 배에서 만났죠. 하하하. 네.”
마당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시인의 방문에 누가 노크를 했다.
“시인언니? 안에 있어요?”
“네? 누구세요?”
시인이 문을 열고 놀랐다.
낮에 봤던 지원이었다.
“저 완전 민폐 캐릭터죠. 하하하. 죄송해요. 방에서 잠시 놀다가도 되나요? 맛있는 커피를 사왔는데 혼자 먹으려니 좀 그래서요.”
“네? 아.. 그..그럼요. 얼른 들어와요.”
시인은 조금 당황했지만 지원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감사합니다.”
지원은 더치커피라며 병에 든 커피를 잔에 따라 주었다.
어디서 사왔는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도 꺼내어 놓았다.
시인은 특별히 대접할 게 없어서 손이 부끄러웠다.
“미안해요. 하숙하는 신세라 대접할 게 없네요.”
“그럼요 그럼요. 첫 만남에 집까지 쳐들어와서 제가 죄송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서 드시면 진짜 좋겠어요.”
시인은 지원의 넉살에 그냥 편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정말 커피도 맛있고 빵도 맛있었다.
오늘 처음 본 지원이지만 어딘지 낯익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섬에 젊은 여자가 별로 없어서 친구가 생긴 기분이라 마음이 편해지는 시인이었다.
“언니, 내가 순정만화를 그리거든요. 근데 모태솔로라는 말이죠. 그래서 뭔가 이야기에 현실감이 없나봐요. 그림은 괜찮거든요. 한 번 보실래요?”
“우와! 그림체 대박! 내가 완전 좋아하는 스타일이예요! 계속 봐도 돼요?”
시인은 연신 대박을 외치며 지원이 내미는 책을 넘겨보았다.
여자와 남자가 영화처럼 만나고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비어있었다.
“울 오빠가 글을 잘 써서 스토리만 좀 써다오 했더니 단칼에 거절하지 뭐예요? 만화 그림이 너무 유치해서 자기 글이 저렴해진다고요! 진짜 짜증나지 않아요??”
“헐~ 너무했다. 오빠가 전국 백만 만화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이네요.”
“우와! 언니 대박! 완전 대화 좋아요. 하하하. 근데 언니는 아까보다 기분이 안 좋아진 표정인데요?”
“아.. 처음 보는 지원씨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가 방송국에서 일하는데.. 어떤 여자 연예인이랑 좀 친한 것 같아서.. 호호호. 짜증나요. 호호호.”
“헐! 진짜 짜증나겠다. 누군데요? 언니보다 예뻐요?”
“요즘 핫한 은유림이요. 그 여자는 왜 예쁘고 난리래요. 쳇.”
“헐~ 내가 보니 그 여자보다 언니가 훨 예쁜 것 같은데요. 여자 연예인들 분명히 성형빨일건데..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울 오빠들은 다 저 살부터 빼래요. 난 내 통통 몸매가 너무 귀여운데.. 하하하.”
“오빠가 많아요? 저도 오빠 많아요. 친오빠 둘에, 같이 사는 가게 오빠들까지 다섯이나 된답니다.”
“저도 오빠 둘인데 언니한테는 졌네요. 하하하. 언니랑 이야기하니까 다음 스토리가 좀 떠올라요. 역시 연애에는 ‘질투’ 에피소드가 있어야겠네요. 저 좀 표절해도 되요?”
“네? 호호호호호. 그럼요. 표절 아니니 마음대로 갖다 쓰세요.”
둘은 처음 만났지만 통하는 것이 많았다.
수다 떨며 커피와 빵을 먹다보니 어느새 게 눈 감추듯 깨끗이 비워졌다.
“언니, 처음부터 실례가 많았어요. 그래도 온 걸 후회하지는 않을래요. 너무 재밌었거든요. 다음에는 좀 더 예의 있게 방문할게요. 하하하.”
지원은 먹을 게 떨어지자 얼른 일어났다.
시인은 좀 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악의 없어 보이는 지원이 맘에 들었다.
“다음에 봐요, 언니. 만화 더 그리면 보여 줄게요. 하하하.”
지원이 떠나가고 시인은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큰 짐 가방을 두 개나 들고 차 타고 배 타고 했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폰 진동이 울렸다.
동원이었다.
“시인씨? 나 이제 집에 들어가는 길이예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몸 안 좋아요?”
조금 가라앉은 시인의 목소리에 동원이 걱정을 했다.
“아니요. 그냥 오늘 좀 피곤해서요. 참 작가님, 아까 드라마 보는데.. 작가님은 회식하고 그럼 딴 여자들 집에 데려다주고.. 안 그랬음 좋겠어요.”
“하하하, 꼭 그럴게요. 왜 상상해보니 질투가 났어요?”
‘상상은 무슨.. 호텔까지 갔다면서.. 쳇..’
“뭐 그냥요. 나 이제 자려구요. 작가님 잘 들어가요.”
동원은 전화를 끊으며 뭔가 쎄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불편한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