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유승아 선생님! 수고 많으십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승아는 요즘 자신을 대하는 의사들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옛날에는 자신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던 인턴들이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먼저 자신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후후. 역시 이유하 선생님의 파워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네?”
사라지는 인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아는 앞에 앉아 있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지연 간호사는 그런 승아의 시선에 피식 웃으며 며칠 전 병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두 달 전이었나? 이유하 선생님이 다른 의사 분들에게 한마디 하셨잖아요. 후후. 유승아 선생 건드리면 자기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네?”
승아는 김 간호사의 얘기를 들으며 놀란 눈을 하였다. 그러다 점점 인상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다른 의사들의 태도 변화에 그들이 이제야 자신도 한 명의 의사로서 받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김 간호사의 얘기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속이 상해 화가 나던 승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왠지 알 수 없는 느낌이 하나 자리 잡았다.
어릴 때부터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는 게 당연한 걸로 여기고 있던 자신에게 이번 일처럼 아무 조건 없는 도움은 뭔가 마음속이 따뜻해져왔던 것이다.
툭.
“여기서 뭐 하냐?”
생각에 잠겨 있던 승아는, 자신의 머리 위를 차트로 살짝 치며 말을 거는 유하의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승아의 시선에 유하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선배… 참 좋은 사람이에요.”
“뭐?”
유하는 승아의 뜬금없는 말에 황당한 듯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열은 없는데……. 너 다른 사람한테 가서 그런 황당한 소리 하지 마라. 왕따 당하기 딱 좋은 소리니깐. 나 참, 살다 살다 별 웃긴 소리를 다 듣네.”
“…….”
승아는 그런 유하의 말에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선배는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낙찰됐다구요!”
그 말을 끝으로 승아는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하는 잠시 사라져가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차트를 무심히 넘기며 뭔가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입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유하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유승아 선생님.”
승아와 유하는 지금 막 어려운 수술을 끝마치고 수술실을 걸어 나왔다. 오늘 집도의(執刀醫)는 유승아, 그녀였다. 유하는 오늘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보조로 수술실에 들어간 것이다.
‘녀석…….’
유하는 수술 장갑을 벗으며 손을 씻고 있는 승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승아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왜요? 선배?”
“짜식이… 하도 수술을 깜찍하게 잘해 예뻐서 그런다.”
조금 전 수술은 경력이 있는 의사라도 쉽게 마무리 짓기 힘든 대수술이었다. 그렇기에 보조 같은 일은 잘 하지 않는 유하가 일부러 그녀를 돕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간 것이었다. 혹시나 그녀가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승아는 너무도 깔끔하고 정확한 수술 실력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보조인 자신이 그녀의 수술 속도를 맞추기 위해 본 실력을 드러내야 할 정도였다.
“헤헤…….”
승아는 그런 유하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칭찬을 받는 것보다 지금처럼 유하의 짧은 말 한마디가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도수진 간호사는 살짝 웃으며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두 사람 사귀는 거 맞죠? 결혼은 언제 할 거예요?”
“쿨럭! 무슨 소리입니까? 도 간호사님!”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유하는 그런 도 간호사의 말에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도 간호사는 여기 병원에서 가장 베테랑 간호사였다. 벌써 나이가 50대 초반을 넘어선 그녀는 일명 ‘엄마’로 통할 정도로 여러 의사와 간호사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
“무슨 소리라니요? 둘이 사귀는 거 맞잖아요.”
“맞긴 뭐가 맞습니까! 승아와 제가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아시고 하는 소리입니까! 제가 나이가 몇인데 어린아이를 상대로…….”
“우리 남편이랑 제가 여덟 살 차이인 거 아시죠? 그런데 두 사람은 고작 일곱 살 차이이면서……. 오버예요, 이유하 선생.”
“참, 나……. 도 간호사님도 원장님 닮아가십니까! 농담이 많이 늘어… 어! 승아야!”
도 간호사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던 유하는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는 승아의 모습에 급히 그녀를 부르며 쫓아갔다.
“후.”
도 간호사는 밖으로 달려 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미 병원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 눈치 채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과 상관없는 다른 사람 일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이유하 선생이 유달리 유승아 선생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거기다 병원에서 요즘 ‘얼음 닥터’라고 불릴 정도로 웃음이 없는 그녀가 단 한 명, 이유하 선생에게만은 다른 사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걸 보고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단지 두 사람만이 그 감정을 속이고 있었을 뿐.
“에구, 좋을 때다~ 후후.”
도 간호사는 자신이 붙인 도화선으로 제발 둘이 더 이상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수술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승아야! 거기 서! 유승아!”
“…….”
앞서 달려가는 승아를 쫓아간 유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승아를 뒤돌아보게 하며 소리치던 유하는 그녀의 눈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거 놓으시죠, 이유하 선생님.”
“…….”
“이제부터 어린애 같은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돌아가 늙은 아줌마들이나 찾아보시라고요!”
“삐쳤냐?”
“제가 애예요? 삐치게! 흐… 흑…….”
“참, 나……. 아직 완전 애구만, 뭐…….”
유하는 투덜거리며 울고 있는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조금씩 진정되어가자 그녀를 조금 떨어트린 뒤 어깨를 붙잡아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진짜 이런 말, 내 체질 아니니깐 딱 한 번만 한다.”
“…….”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쓴 적은 장담하는데… 한 번도 없다. 누가 죽든 살든, 무슨 짓을 하든 말든 나에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전혀 상관없었단 말이야. 한마디로, 제 잘난 맛에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아온 게 나라구.”
“…….”
“그런데… 네가 우는 건 그냥 못 넘기겠다. 다른 사람처럼 편하게 무시하면 되는데… 그게 안 돼.”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냐? 내가… 휴우…….”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네?”
유하의 말에 승아는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순간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하는 그런 승아의 시선에 인상을 확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난 이런 거 체질 아니라고 말했지! 지금 이 팔에 닭살 돋은 거 안 보이냐! 너 나랑 사귀어도 지금 그런 말 다시는 못 들으니깐 잘 기억해……!”
승아에게 소리치며 짜증을 내던 유하는, 순간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승아의 행동에 놀란 눈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승아는 살짝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한 걸음 물러서며 환하게 웃었다.
“다시 말할 필요 없어요. 정확하게 들었으니…….”
놀란 눈으로 승아를 바라보던 유하는 그런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원장의 부탁으로 그녀가 병원에 적응할 동안만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녀가 이제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는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아마도 언제나 나에게만 보여주는 저 웃음 때문이겠지…….’
유하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살짝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절대 그 웃음 잃지 않게 하마.’
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