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아까의 눈물을 되새기며 손에 힘을 부여 넣고 말았다.
“···아파요.“
역시나 역시, 반응을 보인 건 손을 잡고 있던 김설이었다.
“커피 제대로 마셨냐? 몰래 싱크대로 부어버린 건 아니겠지?“
“설탕···이랑 시럽··· 다음에 휘핑크림 넣고···.“
그 작은 컵에 뭘 그렇게 많이 끼얹은 거야? 커피가 아니라 당 덩어리가 됐잖아···.
“편법을 썼지만 제대로 마셨나보군. 잘했···.“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뻗은 내 손길을 김설이 보기 좋게 피해버렸다.
이 녀석, 무빙이···.
“치근덕거리지 마시죠.“
되게 비싸게 구네···.
“너 시선처리 하는 게 무지 어설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라고.“
나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는 김설에게 원망하듯 말했다.
“번데기는 무슨··· 반사회적 인격 장애 씨도 시선처리 하는 건 무지 어설펐다고요.“
아니, 그건 너랑 별이가 쓸데없이 잘 캐치하는 거야.
“3주 넘게 같이 살았는데 「영이 씨」라는 소리보다 삐딱한 호칭을 더 자주 듣네.“
“3주가 넘도록 「미안해」 한 마디 듣기가 힘드니까요.“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잘 알 텐데?“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거기다··· 이렇게 무식하게 잡으면 손만 아프다고요···.“
“나는 멍청해서 무식한 방법밖에 몰라.“
“···깍지라던가··· 있잖아요···.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거···.“
“그건 말 그대로 평범한 연인끼리 하는 거잖아. 우린 평범한 주인과 강아지랄까?“
잡고 있는 손은 목줄 대신이고.
“진짜 잔인하시네요···. 달콤한 착각 한 번도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착각이란 것에 한 번 맛 들리면 나중엔 그게 진짜인 줄 알거든. 그 단계까지 오면 그 사람은 답이 없어. 다이렉트로 이나연의 호갱님이 되는 거지.”
“그거··· 경험담이죠...?“
“오~ 정답.“
직접 경험하고 터득한 거니까 잘 새겨들으라고.
나도 모르게 김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상황이 아까처럼 될 거 같았기에 허공에서 손을 거두었다.
“함께한 시간이 3주나 지났어도··· 결국엔 거리는 좁혀지지 않네요···. 무거운 짐을 같이 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위선이야 그거, 고쳐.“
“원래였다면 「아니에요」라고 됐을 대답이··· 지금은 「네」라고 변했네요···.“
“정면보고 걸어, 넘어져서 다치지 말고.“
“언제는 쳐다보라면서요. 이랬다저랬다 거리지마시죠, 조울증 씨.“
호칭··· 또 바뀐 거냐?
“지금은 걷는 중이니까 제대로 앞을 봐야지?“
나는 제대로 정면을 본 채 김설에게 말했다.
하지만 김설은 그런 태도가 싫었는지 강제로 내 고갤 자기 쪽으로 돌렸다.
가까이서 마주친 시선, 선명하게 보이는 갈색 눈이 「오랜만이야」라고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영이 씨, 당신은 너무 삐뚤어졌어요···.”
녀석의 떨림이 그 눈동자를 타고 내게 흘러들어왔다.
호칭··· 제대로 돌아왔구나···.
여기까지만, 딱 여기까지만 들었으면 좀 덜 아팠을 텐데···.
“저는 그런 영이 씨가··· 너무 싫습니다.“
김설의 말은 내 상처를 다시 한 번 자극했고, 나를 우울이라는 늪에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그 늪 속에 잠기는 시시각각, 나는 녀석과 내 사이가 붙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저는 그런 영이 씨가··· 너무 싫습니다」
며칠 전에 들었던 그 말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뒤척거린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게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거기다 오늘은―.
“10월 29일인가···.“
바로 「그 여자」의 생일이다.
“하아···. 17시 호텔 레스토랑인가···.“
그와 동시에 김설의 생일이며, 내가 속죄해야 하는 날이다.
“오늘은 밥 먹기 글렀군.“
며칠 동안 통 잠을 자지 못했다. 거기다 10월 29일임을 자각했기에 입맛 또한 멀어진 느낌이다.
“일어났어?“
내가 깊은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쉴 때, 안방 문을 열어젖히며 별이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 아닌가···?“
나의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아침 인사가 별이에게로 향한다.
“아침 아니고 벌써 점심때야. 오늘 중요한 약속 있는 거 안 잊었지?“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지···. 별이 너는 뭔가를 잊은 거 같지만.
“약속 말고도 또 중요한 날이지, 오늘은.“
“개 생일?“
“김설 말고도··· 다른···.“
별이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로 향했기에 말끝을 살짝 흐렸다.
“내 앞에서 그 얘길 꺼내는 거야?“
“중요하···.“
“오늘 내게 중요한 건 널 어머니와 만나게 하는 거야. 다른 걸 들먹일 시간 있으면 좀 씻지 그래?“
“하아··· 알았어. 씻을 테니까 거실에서 기다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나 상의를 벗었다.
“왜, 왜 안 나가는 거야?“
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는 아까보다 심하게 날 쏟아 부쳤다.
“너 요즘 근육이 많이 줄었다? 운동 제대로 안 할 거야?“
뭐? 고작 그것 때문에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운동 접은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날 밀어내는 건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어?“
“집에서 팔굽혀펴기라도 하라는 거야? 그거 무지 귀찮다고.“
요즘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운동까지 하면 나 진짜 죽는다고.
“개는 영이 네 것일지 몰라도··· 영이 넌 내 거 아닌가?“
“아마 지금 말하시는 분 거겠지요.“
내 말투가 비꼬는 투로 변했다.
“그럼 자기관리 정돈 해야지, 날 위해서.“
귀찮아.
“나중에 할게.“
“상황 무마시키려고 얼렁뚱땅 넘기는 건 좋지 않아.“
“네, 네, 제대로 11월부터 하겠습니다.“
더 이상 이딴 걸로 얘기가 늘어지는 게 두려웠다.
“좋아. 근데··· 개 생일은 어쩔 거야?“
“김설이랑은 정이 많이 들었나봐?“
한 달 가까이 같은 방을 썼으니까 밉다가도 그리운 사이가 된 건가?
“착각하지 마! 개가 요즘 들어 너무 울상이라고! 그것 때문에 거슬려서 미칠 거 같단 말이야!“
지금 김설이랑 사이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딱히 부끄러워 안 해도 돼.“
“너···! 목에 키스마크 하나 더 찍히고 싶어?“
“아~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 여자」한테 그 핑계를 대고 집에서 쉴 수 있겠다.“
“윽···! ···미안, 흉터 남았지?“
“아마도?“
나는 목에 붙은 살구색 밴드를 쓰다듬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래···. 씻고 나와, 거실에서 기다··· 아니지, 역시 같이 씻을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같이 씻자고 하면 나 살벌해서 죽는다고.
“기각, 나가서 기다려.“
별이를 쫒아내듯이 내보낸 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안방에 딸린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에 몇 분이나, 혹은 몇 십 분이나··· 그렇게 멈춰선 채, 오랫동안 차가운 전신을 지졌다.
꾸역꾸역, 애써 괜찮은 척 좀 이른 점심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난 후 급하게 안방 화장실로 가 변기를 부여잡고 먹었던 걸 모두 토해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나 혼자만 남들보다 몇 배의 중력에 짓눌리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 속에서도, 왜 미칠 듯이 외로운 걸까?
내 가슴이 무언가를 계속 안고 싶다고 호소한다. 만지고 싶다고 갈망한다.
약속시간까지 네 시간 남았네···. 하아··· 몰골이 말이 아니라 혼나겠다.
정신을 놓칠 것만 같았던 그 순간에, 노크도 없이 누군가가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온 그 녀석을 보자말자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 상황이 주는 놀람 탓에 미친 건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멍멍···해봐.“
「영이 씨」라고··· 한 번만 따뜻하게 불러주면 안 될까?
마음속에서만 겉도는 내 진심이 과연 김설에게 닿을까?
말하지 않아도··· 녀석이 눈치채줄까?
“그 동안 별이 씨가 눈치 못 챌 정도로··· 얼마나 혼자서 끙끙 앓은 건가요···.“
“별이가 알면 나 여기저기 물린다고··· 또 피 줄줄 흐른다고.“
“약 사올까요?“
“내가 어디가 아픈 줄 알고?“
“소화가 안 되시는 거 같고··· 감기··· 그냥 종류별로 다 사올게요.“
“그럼 나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어.“
“그럼 어쩔까요? 나연 언니한테 전화할까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러면···?“
“그냥 네 시간만 나랑 같이 자주라.“
“제가 미쳤다고 당신이랑 자나요?“
“왜? 언제는 네 몸을 내 맘대로 써도 좋다며?“
우리 집에 짐 싸들고 처 들어온 날 기억 않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잘 정도로··· 제가 헤픈 여자로 보이시나요?“
“싫다면··· 나 잘 동안만 곁에 있어줘. 그것만 해주라··· 날 미워도 해도 좋으니까···.“
눈물이 났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니라,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나 진짜 너무 외로워···.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제발 오늘만 좀 도와주라.“
지긋지긋한 피로도 네가 있으면 사라지지 않을까?
구역질 날 거 같은 이 10월 29일도, 너와 함께라면 행복하지 않을까?
“하아··· 뭐 옷이라도 벗을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네?! 당신 영이 씨 맞나요? 그냥 상변태 같은데요?“
“「영이 씨」··· 무지 그리웠다고···.“
며칠 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땐 면전에서 대놓고 싫단 소리를 들었지만.
“삼천만원 같은 거 안 갚아도 되니까··· 빨리 와서 나 좀 안아주라.“
나는 양팔을 정면을 향해 뻗었다. 오로지 김설이란 사람을 내 품 속에 넣고 싶었기에.
“···정말 삼천만원 다 까주시는 건가요?“
“당근. 침대에서 내가 잘 때 동안 그저 안아주기만 하면 끝이야.“
“하는 수 없죠···. 절대 딴 마음 먹지 마세요, 전 영이 씨가 싫으니까···.“
“안 먹어. 나도 내 몸만 필요한 거니까.“
“아프다고 성희롱 하시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시끄럽고! 빨리 널 만지게 해달라고!“
뜸들이지 말고 빨리 내게 오란 말이야!
“젠장, 망할 영이 씨!“
“너, 말투가 너무 나랑 비슷해진 거 아니야? 김설 넌 욕 쓰면 안 돼.“
“안길 테니까 닥치고 눕기나 해요.“
···네, 네.
사람의 체온이란 게 그리웠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별이가 아닌 김설의 체온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달려와 안기는 김설이··· 내겐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