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우가 새로운 팀장으로 온지 1주일이 지났다.
시작부터 삐걱거릴 것이라고 생각한 준혁의 예상과 달리 형사팀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준혁은 누나를 잃은 연쇄살인사건을 조금 더 깊게 파헤칠 수 있었다.
대략적인 사건기록들을 모두 정리한 준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범죄자들의 DNA가 등록된 1)데이터베이스(Data Base)를 뒤져 보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강도, 살인을 저지른 유사 전과자 놈들만 따로 분류하고..."
준혁이 키보드를 두드렸고 모니터 화면에 수 만명은 되어 보이는 전과자들이 떠오르자 다시 마우스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1998년 서울에서 첫 번째 살인사건 당시 20대인 놈들만 다시 재분류"
준혁의 눈에 사건 기록에 첨부되어 있던 놈의 폐쇄회로상 사진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대로 보였다.
"그러니까 유사전과자 중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출생한 놈들만...검색"
모니터 화면에 약 9000명의 살인, 강도 유사 전과자들이 검색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혈액형이 AB형인 놈들만 검색한다"
준혁이 몇 번 더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이윽고 원하는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 사건검색결과 : 김갑수 외 122명 >
모니터를 바라보던 준혁이 씨익 미소지었다.
"조만간 만나자. 개새끼야"
조용히 뇌까리던 준혁이 검색된 123명의 인적사항과 사진을 출력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력된 기록을 가지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 준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가까운 동사무소로 가는 것이었다.
폐쇄회로에 찍힌 놈의 얼굴을 보다 확실히 대조해 보기 위해서는 경찰서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된 전과자들의 사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진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동사무소에서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확인하는 것.
동사무소 자체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하면 최근에 갱신한 사진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갱신해 온 사진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산 신월동사무소에 도착한 준혁이 평소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안경을 쓴 20대 중반의 귀여운 인상을 가진 동사무소 여직원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한다.
"저 쪽에서 번호표 뽑고 기다려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 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준혁의 말을 들은 여직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이내 반가운 얼굴을 했다.
"못생긴 사람이랑 일 없네요. 야! 한동안 얼굴도 안비추더니 왠일이야? 귀하신 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너스레를 떠는 소순해의 말에 준혁이 피식 웃었다.
준혁과 순해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창시절 제법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준혁이 형사팀에 발령받은 이후, 사건 수사를 위해 동사무소에 들를 일이 잦아졌는데 처음 사건 수사를 위해 동사무소에 방문했을 때 순해가 직원으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대님께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강녕하시죠?"
"퍽이나, 또 사건 하나 터졌구만?"
순해가 기도 안찬다는 듯이 말했다.
"말씀 섭섭하게 하시네. 우리 사이 이거 밖에 안됐었어?"
"우리 사이? 우리 준혁님은 놀림거리 하나 다시 생기셔서 좋으시겠지"
준혁이 학창시절 순해의 작은 키 때문에 자주 '호빗' 이라고 놀려대던 것이 생각났는지 순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에이 왜 그러실까. 내가 잘할게. 좀 도와주라"
"잘 하겠다는 놈이 빈 손으로 왔냐?"
"오 이런 세상에 맙소사. 내가 이런 실수를! 슬슬 출출할 시간인데 빵이라도 사다줄까? 직원들까지 먹을 수 있게 넉넉하게. 콜?"
과장되게 행동하는 준혁을 보며 순해가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순해도 슬슬 출출하던 참이었다.
"또 죽빵 이 지랄..."
순해의 말을 준혁이 중간에서 급히 끊었다.
"아 거참, 귀여운 여성 분이 그렇게 상스러운 말 함부로 쓰기 있기? 없기? 내 지금 바로 빵집을 털어 오겠습니다. 주문만 하십쇼"
"뭐 그렇다면야..."
순해의 말에 씨익 미소지은 준혁이 말한다.
"그럼 부탁 들어주는 거지?"
"공문 없이는 안돼. 원칙은 원칙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준혁이 손에 쥐고 있던 결재판에서 수사 협조 공문을 꺼내더니 순해의 눈 앞에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그냥 곱게 내놔라. 수사 협조고 뭐고 다 때려 치우기 전에"
"공문보다 먼저 이것부터..."
준혁이 A4용지 뭉치와 공문을 함께 내밀었고, 이를 건내받은 순해가 의아한 얼굴로 준혁을 바라봤다.
"이게 뭔데?"
"내가 쫓고 있는 범인들"
"뭐? 이 사람들 전부?"
123명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종이뭉치를 바라보며 순해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응. 총 123명이야"
"이 사람들.. 뭐 어쩌라고?"
순해가 불안한 눈빛으로 준혁을 바라봤다.
"공문에 적혀 있는 그대로야. 그 사람들 주민등록증 갱신하면서 옛날부터 최근까지 바껴 온 사진들. 그거 출력 좀 해주라, 이왕이면 컬러로. 부탁할게"
준혁의 말을 듣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순해가 말한다.
"야.. 그 정도는 니네 경찰서에서 보관하는 운전면허증 사진 확인해도 되잖아. 운전면허증이야 주기적으로 갱신하는게 필수지만 주민등록증은 갱신을 하든, 말든 그 사람 마음이라고? 오히려 경찰서에서 보관 중인 사진이 더 많을..."
"운전면허는 따든, 안 따든 그 사람 마음이잖아?"
"..."
"주민등록증은 17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발급받아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거고. 다 알면서 아마추어 같이 왜 그래?"
"요즘 운전면허 안 따는 사람이 어디있..."
"그리고 내가 짬이 안돼"
"뭐?"
"이제 막 경찰 조직에 발을 들이 민 내가 어떻게 면허 담당자한테 그런 부탁을 하겠어?"
"..."
"친구 좋다는게 뭐야 응? 나 그럼 지금 빨리 빵 사러 갔다 올게?"
"그러니까 진짜 이유는 니 직장생활 편하게 하자고 나를 이용..."
준혁이 순해의 뒷말을 듣지 않고 급히 동사무소를 뛰쳐 나갔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빵받고 우유까지 콜! 내가 인심썼다. 크게 쏜다!"
"야이 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준혁의 뒷통수에 욕설을 내뱉으려던 순해가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준혁 이 개 십색볼펜 똥물에 튀겨 죽일 놈...'
눈 앞에 놓여 있는 종이뭉치를 바라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순해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더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놈이랑 엮여가지고. 하아...."
넓은 동사무소 안에서 유난히 순해의 한숨소리가 크게 들리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