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가상의 왕이 등장하는 픽션소설임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가 있답니다.
【태양이 된 달 – 왕이 된 여자】
제24화 : 혹시 변강세 작가님?
-- 혹시 선비님이 음란서생 서책을 쓰신 장안의 인기작가! 변강세 작가님이신가요? --
“아이쿠...”
진서는 뒤로 벌렁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저앉은 진서의 얼굴위로 키가 큰 젊은 사내의 얼굴이 다가온다.
언뜻 보기에 유들유들 능글하게 생겨보였으나 잘생긴 사내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괜찮으시오 낭자?”
사내는 넘어진 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섬세한 손...
진서는 사내의 손을 바라보다 주저하지 않고 손을 잡아 챈 뒤 그 반동으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진서의 재빠른 행동에 오히려 점잖게 손을 내밀었던 사내가 당황하여 몸이 잠깐 휘청였다.
“혹시 선비님이 변강세 님이십니까?
그 유명한 음란서생 작가님?“
진서는 초면에도 당당하게 질문을 퍼부었다.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였다가
그 유명한 음란서생 작가님?이라고 되묻는 물음에는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사내를 위아래로 훝어보았다.
사내의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
사내가
"나는 그대가 말하는 그 변강세 작가가 아니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진서는 허리를 굽혀 꾸벅 직각인사를 했다.
진서의 얼굴은 무언가 설레는 기대감이 만연했다.
“반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변작가님... 작가님은 정말 천재세요.
제가 오늘 이리 온 것도 천재 변작가님의 신작 <음란서생 2편>을 구하기 위해서지요.
제가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답니다.“
진서는 변작가가 천재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쉴새없이 말을 이어 갔다.
마치 사당패가 마당놀이 연극을 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과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숨 쉴 틈이 없이 재빨리 말을 하는 진서를
사내는 이런 재미있는 처자를 보았나?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변강세 작가가 아니라는 말을 할 틈을 주지 않는군... 하 하 하’
“처자가 볼려고 구하려는 것인가?
그 책은 정숙한 아녀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파격적이라서 말일세~“
사내는 진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매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진서는 순간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작가님... 무슨 말이십니까?
제가 어디로 봐서 음란서적이나 볼려구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처녀로 보이십니까?
진서는 별안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눈을 위 아래로 연속해서 감았다 뜨며 귀여운 척을 했다.
계란형의 동그란 얼굴에 뽀얀 살결이며 풍성한 속눈썹의 단정한 얼굴이 제법 양가집 규수같은 향기를 풍겼다.
“그렇게 보입니다.
음란서적이나 구할려고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처녀로...?“
“헉...”
들켰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나?
역시 작가님이라 인간의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잘 느끼시는 겐가?
아님 내가 작가님의 책을 음란서적이라고 폄하해서 화가 난 겐가?
진서의 머릿속은 갑자기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변강세 작가님의 책이 음란서적이라는 것은 아니고...
음... 그러니까... 아 맞다! 성인맞춤형 책이죠!
성인에게 딱 맞는 맞춤형 서적!“
“성인맞춤형 책? 푸 홧~
그냥 음란서적이라고 하시오 처자!“
내가 음란서적이라 폄하해서 기분이 안 좋으신 거구나.
이를 어쩐다?
“제가 그 책을 구하려는 이유는... 작가님...
저에게는 심히 병약하여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서 오늘 내일 하는 오라버니가 있는데
지난 달에 지인이 어렵게 구하여다 준 <음란서생 1편>을 보고 환하게 웃으시며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진서의 커다란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질 듯한 눈물이 차올랐다.
병약하여 오늘 내일 하는 오라버니를 말할 때에는 특히 한껏 처량한 눈빛으로 선비를 응시했다.
진서의 가련한 표정은 설사 돌부처라 하더라도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로 처연하게 연기를 하였으나 있지도 않은 병약한 오라버니 이야기를 꾸며내려니 어투나 목소리가 매우 흔들리고 어색하였다.
아... 오늘따라 감정이입 안되네...!
어색한 거짓말을 알아챈 듯 한 선비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약간의 비웃음?
“정말이오...? 지금 연기가 매우 어색한데...?”
“변작가님... 연기라뇨?”
“내 발로 연기를 하여도 그대보다는 나을 것이오...!”
"허걱... 발로 연기?"
사내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는 진서가 귀엽게 느껴졌다.
뽀얀 얼굴에 변화무쌍한 표정과 과한 몸짓이 어색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를 웃음짓게 하였으나 정작 진서 자신은 굉장히 진지한 것이 더더욱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하~ 이 처녀! 정말 재미있는 처자군?
생긴 것은 양가댁 규수로 보이나 행동거지는 어디 사당패의 여사당인가?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다.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병약하여 오늘 내일 하시는 오라버니가 계신다니까요.
<음란서생 2편>을 구해서 오라버니를 환하게 웃게 해 드리고 싶다니깐요“
“그건 아니될 말이오...
<음란서생 2편>은 1편보다 더욱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장면들이 더해졌다오. 그대의 병약한 오라버니가 음란서생 2편을 본다면 아마도 심장 박동이 급격히 증가하여 쌍코피가 팍! 터지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오.
단언컨대 처자의 병약한 오라버니의 건강에 더욱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오만~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오!“
“하~ 정말입니까? 그렇게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장면들이 많습니까? 꿀꺽~ 작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진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더욱 반짝거렸다.
“정녕 그대가 보고 싶은가 보오?”
“어... 아니... 제가 아니라 우리 오라버니께서 더욱 보고 싶어하실 것 같다구요“
“흠... 과연 그러실까?
어쨌든 책은 다 팔렸다오~”
“에~ 정말이십니까? 벌써요?”
“물론이오. 워낙에 인기가 있어서 선주문 들어온 것이 상당하였다오...”
“한 권도 남음이 없이 다 팔렸습니까?
작가님 애장판이나 특별판도요?“
“그렇다오... 모두 팔렸다오!”
진서는 실망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가지고 싶었는데...
“그러면 변작가님... 여쭈어 볼것이 있는데... 작가님이 삽화까지 그리시는 것 맞죠?
그림이 정말 아주아주 좋던데...
화려한 색감하며... 인상적인 구도하며...“
“아마 그럴 것이오.
음란서생은 특히 삽화가 죽이지요.“
“네? 그런데 아마 그럴 것이오는 무슨 뜻?
어쨌든 <음란서생 3편>은 언제 쓰실 겁니까? 변작가님? 저 지금 여기서 선주문 하겠습니다.
계약금이라도 걸까요?“
진서는 고운 비단 주머니를 주섬주섬 꺼냈다.
사내는 그런 진서를 애써 만류하였다.
“<음란서생 3편>이 언제 나올지 그건 잘 모르겠소...
왜냐하면...
나는 변강세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오!“
“에~~~ 뭐?~~~ 변강세 작가님이 아니시라고요?
진서의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말문이 막히는 듯 입모양도 같이 동그래졌다.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하세요?
아까... 처음 제가 인사했을 때 그때 말했어야죠...!!!“
진서는 세상 억울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나 뭐한거니?
있지도 않은 병약한 오라버니까지 지어냈는데...
진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 거렸다.
“처자께서 말할 틈을 주셔야 제가 말을 하죠...
어찌나 숨 쉴 틈 없이 쉴새없이 말을 하시던지...”
사내의 그 말에 진서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아다봤다.
물론 음란서생 서책을 과년한 처자가 구하려니 부끄러워서 말과 행동이 좀 빨라지기는 했어!
상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나 혼자 판단하고 나 혼자 연기하고...
그러긴 했다만
이 키 큰 훤칠한 사내가 변강세 작가님이 아니라니...
으... 아... 손발이 오그라들게 부끄럽구나!
"그럼 선비님은 누구십니까?"
"그러는 처자는 누구시오?"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내가 저 사내가 변강세 작가가 아니라면 그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무에 있다고?!
“알겠다고요... 알겠으니 선비님은 가던 길 가보시어요“
진서는 돌아서서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두 팔로 감쌌다.
명문가의 여식이 음란서적을 구하려고 생판 처음보는 사람에게 온갖 거짓말을 일삼았구나!
오호 통재라~
“그런데 그 책이 그리 보고 싶소?”
“아니오... 아니라고요... 제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워서 오늘 내일 하시는 병약한 오라버니가 보고싶어 하신거라니깐...
내 어떻게든 그 책을 구해서 오라버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구요”
사내는 도포 자락에 숨겨두었던 음란서생 책을 높이 흔들며 말했다.
“나는 오늘 하나 구했소만... 하 하 하
애석하오! 그대의 오늘 내일 하시는 병약한 오라버니가!“
사내는 아이같이 맑은 얼굴을 하고서 진서를 약올리는 듯 책을 높이 쳐들고 보여주지 않았다.
책 표지에 <낮과 밤이 다른 음란서생 2편>이라고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이 냥반이...”
진서는 불끈 주먹을 쥐고는 섬광이 쏘아져 나오듯 선비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진서는 뿌드득 이를 갈았지만
사내는 유유히 운종가 쪽으로 멀어져갔다.
'묘하게 눈길이 가는 음란서적 성애자 처녀군
거기에다 성격은 불같이 급한 아가씨라~ 큭 큭 큭'
허탕을 친 진서는 터덜터덜 걸어서 운종가의 비단가게 왕서방네로 들어왔다.
"진서아씨... <음란서생 2편> 구하셨습니까?“
왕서방이 진서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진서는 운종가 왕서방네 비단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또한 진서와 왕서방은 나이차가 상당히 있었지만 서로의 취향이 상당히 같아 <음란서생 1편> 외 다수 음란서적으로 대동단결된 사이였다.
진서의 허탈한 표정을 본 왕서방이 개구리같이 커다란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못 구했네... 그게 말이야 아주 이상한 진상 선비 때문에..."
진서는 가짜 변강세 작가 노릇을 한 그 사내를 떠올리자 아름다운 얼굴에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키가 훤칠하니 엄청 잘 생겼더구만 어찌 그리 재수가 없이 굴다니...
참으로 얼굴이 아까운 사내였어.
"못 구하실줄 알았습니다. <음란서생 1편>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하여
2편은 선주문 들어가고 막 줄을 서고 난리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자네... 오늘 오전에 2편 발매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죠. 근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매하자마자 아침 일찍 다 매진되었다고 하더라구요. 변강세 작가 집 앞에 줄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더라구요."
"자네는 혹시 구했는가?"
"아뇨... 저도 못구했습니다. 보고싶어 미치겠는데..."
왕서방은 <음란서생 2편>이 보고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서는 그 사내를 다시 떠올렸다.
<음란서생 2편>이라고 쓰여 있던 책을 높이 쳐들고 약을 올리던 사내!
키가 훤칠하고 엄청 잘 생긴 그 사내!
그리고서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의 하얀 손을 들여다 보았다.
아까 잡았던 그 사내의 손...
커다랗고 섬세했던 그 손...
어쩐지 한 번 잡으면 다시 놓지 못할 것이란 느낌이
지금 갑자기 드는 것은 무슨 일인지...
인연(因緣)의 시작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