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혼자가 되는 연습
“우웅…… 응? 어!”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어젯밤 일리언으로 인해 뒤풀이 파티가 술 파티로 변하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하나의 행사가 끝이 났다.
침대에서 기분 좋은 얼굴로 잠을 자고 있던 카르젠은 눈이 부시다는 생각과 함께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일리언?”
바로 자신을 언제나 살기 어린 마법으로 깨우던 일리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갔지? 지금 몇 시…… 응? 으악!”
일리언을 찾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카르젠은 침대 옆에 놓아둔 시계를 보고는 눈이 커졌다.
“지각이다!”
***
탕!
“일리언!”
“뭐냐.”
“어떻게 혼자 갈 수가 있어요!”
수업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교실 문을 세게 열며 들어온 카르젠은 일리언을 향해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밥은 먹고 왔나 보군.”
“당연…… 에? 어떻게 아셨어요?”
“입가에 묻은 음식 자국이나 닦으시지.”
“어이, 카르젠, 자리에 앉아라. 수업 시작한다.”
“네? 아, 네.”
그때,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마르코 교수의 음성에, 카르젠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나 일리언을 향한 불만 어린 눈빛을 수업 내내 거두지 않는 카르젠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시선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일리언이었지만 말이다.
“일리언!”
“왜 자꾸 불러.”
수업이 끝난 후, 일리언에게 다시 말을 걸려던 카르젠은 그가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자 의아한 눈빛이 되었다.
“응? 일리언, 수업도 안 끝났는데 어디 가요?”
“…….”
“에? 일리언!”
그러다 자신의 물음에도 말없이 교실을 빠져나가는 일리언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싸우기라도 한 거야?”
“내가 저 인간이랑 싸울 군번이라도 되냐.”
“아니.”
“우씨! 그리 쉽게 인정하니 열 받잖아!”
카르젠은 자신에게 다가온 류네아의 말에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아직도 화났나.”
“왜? 네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런 게 있어.”
카르젠은 혹시나 아직까지 체육대회 결과로 인해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일리언은 화를 내면 냈지, 꽁하게 오랫동안 끌고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뭐야? 하나도 기억 안 나는 거야?”
“응? 응. 아침에 일어나니 침대에서 자고 있던데.”
카르젠은 어제 분명 일리언에게 한 소리 내뱉고 도망치듯 그의 곁을 떠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의 기억이 없었다.
“사람 하나 죽여 놓곤 이리 태평하다니.”
“에? 뭔 소리야?”
“정말 기억 안 나?”
“어.”
“…….”
류네아는 정말로 아무 기억이 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카르젠의 모습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으흐흐! 히히히히!”
“커헉!”
“뭐, 뭐냐!”
학생들끼리 편하게 놀도록 교수들도 빠진 데다, 학생회 임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자 학생들은 마음 놓고 일리언에게 얻은 술을 마시며 파티를 즐겼다.
하지만 잠시 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너무도 익숙한 웃음소리. 그에 한순간에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뜨리며 다시 들려오는 웃음소리.
“우헤헤! 히히히히히!”
“저, 저 자식!”
“누구야! 저 녀석한테 술 먹인 놈이!”
저번 신입생 환영 행사에서 충분히 들었던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시선을 돌리던 이들은, 자신들의 예상대로 술에 취해 잠이 든 채 웃고 있는 카르젠을 보고는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 난데.”
“……!”
“……!”
그리고 사람들의 외침에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현재 4학년에 재학 중인 밀란이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펜싱으로 결승전까지 올라갔었고, 결승 상대였던 카르젠에게 패하고 2등이 되었다.
하지만 즐거운 승부였기에 그것을 기념하며 왠지 우울해하고 있는 카르젠에게, 일리언에게 보석을 보여 주고 얻은 술을 권했던 것이다.
“밀란! 네 이 녀석!”
“네놈의 짓이라 이거지!”
“이 자식아! 너 예전 일을 금세 까먹은 거냐!”
“서, 설마 맥주 한 잔에 저리 갈 줄은 몰랐지.”
자신이 권한 것은 맥주 딱 한 잔. 설마 그 양에 이렇게 술에 취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죽어라! 이 자식아!”
“으악!”
그날 밤, 밀란은 밤이 늦도록 사람들에게 쫓겨 다녀야 했고, 모두가 잠들었을 때도 카르젠의 음산한 웃음소리에 다른 누구보다 움찔거렸다.
“무슨 일이냐니깐.”
“기억 못한다는데 뭔 말을 하겠냐.”
어젯밤, 파티가 종결된 이후에도 작은 소란은 계속되었다.
귀마개를 가지고 있는 이들과, 그것을 뺏기 위한 이들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교수들까지 달려 나와 혼을 내며 그들을 기숙사로 들여보냈지만, 그런 교수들을 향해 귀마개가 있으면 달라고 매달리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류네아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동을 만든 당사자는 이렇게 잘 자고 일어나 멀쩡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아아아! 아얏! 무슨 짓이야!”
“…….”
그저 얄미운 마음에 그의 볼을 쭉 잡아당겨 버리는 류네아였다.
***
수업을 다 받지도 않고 교실을 나온 일리언은 특별한 목적지를 두지 않고 아카데미 안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평소라면 시간이 되는 대로 도서관으로 직행했을 테지만, 오늘따라 머리가 복잡했던 일리언은 그저 조용히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걸어 다닐 뿐이었다.
타악!
“아아!”
후두둑!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공원 근처를 산책하듯 걷던 일리언은 자신에게 다가와 부딪쳐 넘어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여자가 떨어뜨린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넘어지며 다리를 삔 것인지 여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 이, 이봐!”
하지만 일리언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다리의 아픔을 호소하던 여자는 일리언이 자신을 그냥 지나쳐 가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일리언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그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멈칫.
그러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다시 뒤돌아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럼 그렇지.’
여자는 일리언이 다가와 자신을 일으켜 줄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은 도도한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떨어뜨린 책을 줍는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을 일으켜 줄 것이라고 여기고 앞으로 다가서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탁!
“……!”
하지만 잠시 후, 자신의 손에 얹힌 것은 그의 손이 아닌 자신이 떨어뜨렸던 책이었다.
“책을 함부로 다루면 쓰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뒤돌아 걸음을 옮겨 가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야!”
그러나 이내 표정이 굳어진 그녀는 최대한 낼 수 있는 큰 소리로 그를 힘껏 불렀다.
“…….”
그러자 말없이 고개만 돌려 여자를 바라보는 일리언.
“너 때문에 넘어졌으면 적어도 일으켜 줘야 하는 양심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부러 와서 부딪쳐 넘어진 이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
“윌로우가의 사람인가.”
자신이 윌로우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 일리언으로 인해 조금 당혹스러워하던 여자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어찌 안 거지?”
“너에겐 녀석과 비슷한 냄새가 나.”
“뭐? 어, 어! 지금 뭐하는 거냐!”
알 수 없는 일리언의 대답에 여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다시 다가와 자신을 안아 올리는 그의 행동에 흠칫했다.
“그냥 간다고 뭐라 했던 것 아닌가.”
“부축을 해주면 걸어갈 수 있다.”
“부축은 체질에 안 맞아.”
“하지만…….”
“시끄러. 자꾸 떠들면 떨어뜨린다.”
“…….”
여자는 일리언의 협박 아닌 협박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 헉!”
“라즈넬 선배?”
“뭐야! 라즈넬이잖아!”
얼마 후, 치료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일리언은 자신이 안고 있는 여자, 아니 라즈넬을 알아보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에 새삼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마치 스타라도 되는 듯 그녀를 안고 있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들까지 보이자,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윌로우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저러는 거냐, 아니면 너이기 때문에 저러는 거냐?”
“둘 다라고 해 두지.”
보통 여자라면 남자 품에 안겨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을 때 부끄러워하거나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 않은가.
하지만 라즈넬은 달랐다.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손까지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이자, 일리언은 고개를 내저으며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치료실로 향했다.
“가볍게 삔 거니깐 너무 걱정 마세요. 무리하게 걷지만 않으면 됩니다.”
잠시 후, 라즈넬이 치료 받는 모습을 한쪽 벽에 기대서서 지켜보고 있던 일리언은 의사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뒤돌아 치료실을 나가려고 했다.
“이봐.”
“또 뭐냐.”
하지만 그런 그를 부르는 라즈넬의 음성에 다시 걸음을 멈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말 못 들었나? 많이 걸으면 안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왕 도와주는 거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어때?”
“그건 밖에 서 있는 녀석에게 말해.”
일리언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일리언의 말대로 누군가 서 있었다. 바로 윌로우가의 둘째로 알려져 있는 밀드란이었다.
“구면이군.”
“우리가 인사를 나눠야 하는 사이였던가.”
“그렇지는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