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처음엔 비랄인지 모르고 손을 댔죠. 아, 비랄과 다쿠니가 그렇게 똑같이 생겼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단단히 주의를 했을 거예요. 그게 그렇게 닮았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어쨌든 다행한 일일세. 그 정도이길 말이야. 자넨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여태 비랄과 다쿠니조차 구별 못하다니… 그나저나 보숨은 어찌된 건가? 움직임이 확실히 있던가?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시볼라에 관해서 하셨던 말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루퍼께서 예측하셨던 대로 시볼라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다만, 브라이튼 계곡으로 군단 전체가 이동했다는 건 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보숨으로 가는 길이잖습니까?
-브라이튼 계곡으로 시볼라의 군단이?
보르말린 옆에서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던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루퍼가 실눈을 뜨고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브라이튼이라… 그렇다면 시볼라가 보숨을 손에 넣기 위해 행동을 했다는 얘긴데…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둘의 사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멀어졌다는…
인우 건너편에서 마구 음식을 입으로 털어 넣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고개를 쳐들고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시볼라가 보숨에 반기를 들었다는 얘긴가! 정말로 시볼라가…
-루퍼께서 시볼라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우리가 대비를 할 것 아닙니까?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사뭇 진지하게 말하자 모여 있던 사내들이 긴장한 채 루퍼를 쳐다보았다. 인우도 덩달아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루퍼에게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갔다. 그러자 루퍼가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곱게 수를 놓던 희고 부드러운 천을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사내들과 인우를 돌아보았다.
-비노스가 휘보를 데려갔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더는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 바로 그날이었어. 휘보가 잡혀가던 날 시볼라가 움직일 거라는 얘기를 비노스에게서 들었지. 휘보를 데려가기로 한 바로 전 날 비노스가 내게 찾아와 귀띔을 해주었지.
-…
루퍼의 말이 이어지자 사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들고 있던 가재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긴장한 눈빛을 들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사내들의 눈빛에서는 두려움마저 풍겼다.
-휘보를 데려간 건 어쩌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어. 오래전 매토리아에서 있었던 일 다들 기억하지?
-매.토.리.아…
-시볼라가 매토리아를 장악하고 그의 깃발을 꽂고 나자 우린 참 의아해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우린 우리 귀와 눈을 의심해야 했어. 매토리아는 시볼라를 비노스로부터 보호한 장본인이었지. 그런데 시볼라가 매토리아를 아갈탑에 가두고 그의 군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진멸한 거야.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런데 그건 그들만이 가지고 있던 속성이었을 뿐이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속성을 우린 이해하려고만 들었지. 우린 우리와 다른 것들에 관해 이해하려는 실수를 범해서 시볼라가 매토리아를 잡아 아갈탑에 가둘 거라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거야. 매토리아도 시볼라의 움직임을 알고도 막지 못했어. 그건 시볼라를 능가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지. 시볼라가 크도록 방치한 실수를 톡톡히 치른 거야. 아갈탑에 매토리아를 영원히 가두는 데 성공한 시볼라가 보숨까지 무너뜨리려는 게 틀림없어. 그건 그가 오래 전부터 짜 놓은 수수께끼였네.
-그럼 시볼라가 이 나바런에도 수수께끼를 짜 놓았다는 말씀인가요?
보르말린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시볼라가 이 세계의 장막을 허물어뜨리고 유구한 역사를 송두리째 짓밟아버렸어. 그것은 마치 별이 별을 잡아먹는 모습과 똑같은 형상이지. 별이 별을 먹게 되면 전혀 다른 새로운 별로 만들어지게 돼 있어. 충돌 직전의 별들은 그걸 서로가 몰라. 자기들 힘만 믿고 달려들 뿐이지. 시볼라는 여태 그렇게 커왔던 걸세. 그의 영향력이 마침내 인간에게까지 미치게 된 거야. 기가 막힌 조합이었어, 시볼라와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된 것도 너무 닮았어. 인간 앞에 시볼라는 언제나 숨은 존재였어. 비노스가 그런 시볼라를 감금해 놓았던 건 가장 큰 실수였어. 그게 바로 시볼라의 수수께끼였지. 시볼라의 수수께끼는 풀면 풀수록 깊은 수렁에 갇히게 돼 있어. 그를 상대한 다는 건 상당한 모험을 각오해야 해. 결국 휘보가 비노스에게 잡혀간 것도 그가 짜놓은 덫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지금으로서는 시볼라의 계략이었다는 게 분명해진 셈이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우리 나바런 전체가 시볼라의 손에 넘어갈 위험에 놓이게 됐다는 선언적 의미가 바로 시볼라의 군단이 브라이튼 계곡으로 진영을 옮긴 것일 거야.
-그렇다면 우리도 지상 끝에서 나바런의 군대를 모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소집령을 서둘러 내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사수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곳이 파괴되면 진노의 대접이 우리와 우리 형제인 인간에게 곧바로 미치게 될 테니까. 나바런이 시볼라의 손에 넘어가고 자네들과 내가 아갈탑에 갇히는 날 인간들은 대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 나바런을 사수야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시볼라의 세력이 이미 인간들 사이에 두루 퍼졌다는 게 우리로서는 아찔한 상황을 맞은 걸세. 휘보가 사라졌어. 시볼라의 수수께끼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경고야.
-지금이라도 당장 브라이튼 계곡으로 나바런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시볼라를 막을 수 있는 건 우리 나바런의 군대밖에 없지 않습니까?
보르말린이 분에 못 이겨 울부짖듯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지만, 사실 시볼라를 상대한다는 건 최후의 결전과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시볼라가 어느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된 게 없었다. 간간히 여행자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게 전부였다. 그 사이 시볼라는 자기들끼리 충돌하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루퍼도 오래전 시볼라를 꼭 한 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대양의 전투라고 불리던 이노리아 지구에서 벌어졌던 전투였다. 그곳에서 참패한 루퍼는 불과 예닐곱의 군사만 간신히 도망쳐 나왔고 그의 군대 대부분이 아갈로 끌려가서 아갈탑 어디엔가 갇히고 말았다. 그때 루퍼가 본 시볼라의 모습은 매우 가련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먼 발치에서 본 시볼라의 모습 어디에도 포악함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시볼라가 매토리아를 넘어서 보숨까지 넘보고 있었고 결국엔 천상의 향기라고 불리는 나바런을 노리고 있다는 게 확인된 셈이었다.
-이곳 아름다운 나바런이 더러운 시볼라의 깃발에 짓밟히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나바런 군대의 소집령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님, 더블라스의 눈을 피해 또 다시 이주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보르말린이 다시 루퍼를 향해 울부짖었다. 하지만 루퍼는 대꾸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큰 호흡을 연거푸 하며 인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휘보가 없으니 우린 인우에게 모든 걸 걸어야 해.
-루퍼!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루퍼가 인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폭탄같은 선언을 하자 둘러앉았던 사내들이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동시에 루퍼와 인우를 쳐다보았다.
-이, 이 아이는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보르말린이 흥분을 이기지 못한 채 인우를 쏘아보며 소리치자 루퍼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시볼라와 같이 계략을 앞세운다면 우린 우리가 보고 들은 대로 끝내 시볼라의 발에 짓밟히고 말 거야. 우린 여태 단 한 번도 교묘한 계략으로 더블라스를 상대하지 않았어. 더블라스가 이 광활한 우주 곳곳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결코 두려움은 갖고 있지 않았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 모습이 어떤가? 이미 오래된 두려움 속에 갇힌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나약함이란 어린아이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우리와 같이 두려움 속에 갇히면 단숨에 집어 삼키려 드는 게 나약함일세. 우린 결국 운명으로 지어진 존재들일 뿐이야. 하지만 이 아이는 달라. 인간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는단 말이지. 우리는 브라이튼 계곡에서 시볼라와 보숨의 결전을 지켜보고 어찌할지를 결정짓도록 하지.
-루퍼! 휘보가 없다고 이 어리고 나약한 아이를 대신하려는 생각은 절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이 어린 아이에게 우리 나바런의 운명까지 맡기는 건 무모한 판단이십니다! 그리구 나바런의 군대 소집령을 허락하셔서 당장에라도 시볼라의 군대와 맞서야 합니다.
-…
루퍼는 보르말린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희고 부드러운 천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