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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도전! 에스퍼 리그
작가 : 은백
작품등록일 : 2016.10.28

수십 억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능력 배틀 스포츠!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소년소녀의 작고 거창한 이야기

 
2부 - 도주자(1)
작성일 : 16-10-28 21:15     조회 : 374     추천 : 0     분량 : 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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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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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하다.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 불꽃머리는.

 

  백합 모양 머리장식의 양 갈래 금발 소녀, 린다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새벽의 칼바람을 쏘이면서 새삼 한 소년에 대한 자평을 내려 보았다. 보통 춥다고 투정은 못 부릴 계절이지만 시간대가 시간대이니만큼 잘 드는 날로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소녀의 고운 피부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깟 추위는 온천수처럼 속에서 샘솟는 의구심 더미에 금세 파묻히고 만다.

 

  갑갑한 속을 털어놓는 혼잣말에 분홍빛 입술이 희뿌연 입김을 내뿜는다.

 

  “그 고글 모양 AR 스캐너, 의심할 여지가 없어. 분명히 지지난번 에스퍼 리그 16강에서 만난 그 남자 거야.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나한테 접근한 걸까? 아더란 소년이랑 함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아무리 탁월한 연기라 해도 린다가 이판에 몸담은 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어. 제자라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마당이고, 애당초 린다가 먼저 접근하기 전까진 엄청 적극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잖아. 그렇다면,”

 

  순간 호흡이 멈추고 핏기가 싹 가셨다. 기억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 남자의 모습. 옆으로 푹 퍼진 덩치와 피골이 상접한 남자로 구성된 2인조.

 

  “설마, 그 녀석들이랑 같은 패는 아니겠지?”

  “그 녀석들이 누구야, 아가씨?”

  “헙―!!!”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상상조차 못한 불의의 일격에 심장이 마비되는 듯했다. 아니, 차라리 심장마비로 저승길에 오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촌구석 취급받는 제13지구에서도 유독 인적이 드문 골목인데 이 새벽에 사람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수천만 아르카디아 주민 가운데서도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린다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바르르 떨리는 어깨를 한손으로 움켜잡고, 그 목소리가 들린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큭큭큭! 이봐, 아가씨. 딱 한 번 만난 사이인데도 낯이 익은데!”

  “기헤헤헤헷! 그러게 말입니다요, 형님!”

 

  키와 덩치가 범인의 두 배 가량은 돼 보이는 털보 중년 남성이 팔짱을 끼고 불결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그 곁에는 반대로 젓가락처럼 빼빼 마른 체구의 약골 남자가 마치 한 세트처럼 바싹 붙어있었다. 희화화되기 쉬운 외모와 반대로 의상은 점잔한 흑백의 양복 차림이라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진다. 꼭 조직폭력배 같기도 하다.

  린다는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또 이 부근을 배회하는 목적이 무언지는 그들 본인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짐작만으로도 충분하다. 밀림에서 범을 만난 느낌이 절로 안 들 수가 없었다.

 

  “트, 트레트…….”

  “오잉? 아가씨,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걸까? 큭큭큭.”

 

  아뿔싸. 린다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이미 들킨 모양이지만 저쪽에 더 이상 물증이나 심증을 넘겨서는 안 되는데, 이들 앞에서는 장기인 연기력조차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한다.

 

  “뭐 여하튼간에 카페에서 별안간 도망칠 때는 제법 섭섭했다고. 그나저나 젊은 처자가 이 추운 날씨에 별다른 방한 대책도 없이 맨살 훤히 드러내놓고 뭐하는 걸까?”

  “사, 사, 산책요.”

 

  처음으로 말문이 트였다. 그러자 트레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린다를 슥 훑어보다가 음흉한 미소를 한껏 크게 지으며 다가왔다.

 

  “큭큭큭, 왜 겁을 먹어? 해치기라도 할 까봐? 이쪽 주민이라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게 하나 있어서 서성이는 것뿐인데?”

  “물어볼 거라뇨?”

 

  적대심 범벅의 되물음에 트레트의 능글맞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 동네 출신의 에스퍼 리그 공인 프로 팀, 마스터즈 플랜은 알지? 큭큭.”

  “그야 제13지구인이라면 누구나…….”

  “그 팀에서 활동하다가 제대로 물 먹이고 제명된 선수 중에 마야라는 여자가 있거든, 큭큭. 우리가 그 여자한테 큰 빚을 하나 졌는데 종적을 감춰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그런데 최근에 그 여자가 이름이랑 외모를 통째로 뜯어고치고 이 근처에 은둔했다는 소문을 들어서 혹시나 하고 찾아왔는데, 아는 바가 있남?”

 

  엄습해오는 불안에 린다는 이가 딱딱 부딪혔다. 이쯤이면 평안을 되찾기도 힘들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한쪽 입 꼬리만 올린 채 눈썹을 실룩이는 트레트의 품은 영락없는 협박이다. 하지만 이대로 실토해봐야 상황은 나아질 바 없겠지. 린다는 한 번 시치미 떼기로 한 이상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으래? 큭큭. 그거 아깝구만. 시간 뺏어서 미안혀. 괜히 애꿎은 사람 놀라게만 했구만.”

 

  트레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톤으로 등을 돌렸다. 곁의 게인도 별로 당황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놀란 쪽은 린다. 안도감보다는 의구심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작정이지? 한번 먹이를 문 이상 이대로 놓아줄 리는 없는데, 저쪽 양반들이?’

  “아참.”

 

  자리를 뜨려던 트레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린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쉬운 대로 부탁 하나만 하지. 혹여나 그 여자 만나거든 이 말 한 마디라도 전해주지 않겠나, 큭큭.”

  “뭐, 뭐라고요?”

 

  트레트는 그 특유의 거대한 상체를 숙여 린다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그 내용은 단순한 전언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였다.

 

  “그새 옮긴 거처쯤은 뻔히 알고 있으니, 오늘 밤 8시에 우리가 찾아갈 때까지 그곳에 가만히 반성하면서 있으라고 말이지. 지시를 잘 따르면 용서해줄 수도 있지만, 만약 도망치거나 불순한 행동을 취하면 그 뒷일은 장담 못해. 배신자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고.”

 

 

 

  “이게 뭐야?”

  “만지지 맛!”

 

  린다는 대뜸 자기 소중한 부위의 보호구를 쿡쿡 찌르며 괜한 호기심을 내비치는 소년을 급히 제재했다.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 손님에 한한 이야기고,

 

  “무신경해도 정도가 있지! 아침부터 여자 앞에서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몰라서 그래.”

  『사과하마. 미리 가르치지 않은 내 잘못이다.』

 

  당사자인 아더는 머리만 긁적이고 도리어 가만히 있던 시그마가 죄인을 자처했다.

 

  『AAA컵의 트라우마는 건드리면 안 되는데 말이다.』

  “우아! AAA? 왠지 엘리트 같은 어감인데! 그 위로는 뭐야? AAA+? S?”

  “……이제 아주 쌍으로 갖고 노는군.”

 

  심판의 때가 왔다.

  가냘픈 소녀의 손가락 관절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난지 채 10초가 지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음탕한 남자가 돼버린 불꽃머리 소년과 그 파트너인 고글형 AR 스캐너의 머리에는 왕방울만한 혹이 하나씩 나 있었다. 기계한테도 혹이 날 수 있는지의 과학적 고증은 뒤로 하자.

 

  시침은 어느새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직장이 있는 사람이라면 출근 준비로 한창이거나 이미 출근길에 올랐어야할 시간. 그럼에도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하는 린다의 움직임은 여유일색이었다. 표정도 다급한 기색 없이 그저 뚱할 뿐.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에 그늘이 졌어? 식욕이 없니?”

  “굳이 몇 가지 원인을 꼽자면 그것도 있지.”

 

  으깬 감자에 데친 가지, 멀건 양배추 수프가 입맛에 맞으면 좋았으련만.

 

  “아아, 갑자기 직장에 회의가 들기도 하고.”

  『혹은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직장에 나타났거나 말이지.』

 

  저 성가신 인공지능이 가슴 한편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린다는 태연한 기색으로 무장한 표정을 풀고 일순 정색했지만 시그마의 말은 끊일 줄 몰랐다.

 

  『본디 직장이란 보수나 적성 못지않게 주변인과 동료 또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거든. 아더도 알아두어라. 훗날 되새길 때가 올 것이야.』

  “그래서,”

 

  훈훈했던 아침상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온도계가 있었다면 영하를 기록했을 정도로.

 

  “린다가 소프트 오페라에서 모난 성격으로 지내서 누구랑 원수라도 졌다는 소리?”

  『꼭 그렇게 해석할 것도 없지. 난 그저 가설을 하나 내놓았을 뿐. 찔리는 점이라도 있나?』

  “그런 거 없어!”

 

  린다의 반응이 슬슬 과격해지자, 무신경의 끝을 보여주는 아더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쯤은 깨달았는지 팔을 홰홰 내저으며 둘을 말렸다.

 

  “에헤헤, 아침 댓바람부터 뭘 또 싸우고 그래. 릴랙스, 스마일!”

  “흥……!”

  『…….』

  “그럼 오늘은 그 카페 휴무야? 갈 필요 없는 거지?”

  “소프트 오페라는 연중무휴야. 대신 이제 갈 일은 없을 거 같아.”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린다.

 

  “왜? 점장한테 짤렸니?”

  “그럴 리가 있어? 린다가 에이스인데, 에이스.”

  “해적왕의 아들?”

  “출처불명의 지식을 갖고 와서 놀리지 마! 스스로 그만두기로 했어.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지만 뭐 형식적인 연락은 취해놨고.”

  “흠. 보수가 적었나보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더랑 함께 나갈 대회 준비도 있고, 여러 모로 바빠질 거잖아?”

 

  겉으로는 아더를 위하는 척했지만 당연히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제 형용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수익이 들어올 텐데 고집 피울 이유는 없지. 그리고 트레트와 게인이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해. 시그마의 눈을 피해서 유토피아를 1분 1초라도 빨리 취하는 게 관건인데, 어떡하지?’

  “이야, 감동인데. 괜히 내 부담만 커지잖아.”

 

  아더는 순진무구하게도 린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했다. 세상의 때가 묻을 겨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때 자체가 묻지 않는 체질인걸까. 술술 넘어가는 상황에도 린다는 등골에서 묘한 한기를 느꼈다. 일이 너무 잘 풀리면 꼭 예상 밖의 전개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린다는 다시 한 번 작정하고 아더의 속을 떠보기로 했다. 이마에 맨 시그마가 마치 도청 장치처럼 까다롭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있잖아, 아더.”

  “응?”

  “솔직히 다른 안전한 길도 많을 텐데 굳이 에스퍼 리그를 택한 거야? 아더 말대로 일련의 사태가 헤일로 엔터테인먼트의 음모라고 한들 우리한테 무슨 힘이 있겠어?”

  “이유는 두 가지 더 있어.”

  『복수, 구원. 이렇게 말할 참이겠지.』

 

  귀찮은 주황색 고글이 또 끼어들었다. 어지간히도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모양인지 아더도 시그마의 대리 답변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그마 말대로야. 그 중에도 시초는 역시……”

 

  반 박자 정도 뜸을 들이다가, 태양처럼 해맑던 그와 어울리지도 않게도 굉장히 부정적인 어감의 단어가 뒤를 이었다.

 

  “복수!”

  “복……수?”

  “응. 패러독스를 은퇴까지 몰고 간 여자! 팀 노아즈 아크의 ‘마리오네트’! 내 은인이자 인생의 롤모델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망할 여자는 절대로 용서 못해.”

  “그렇구나.”

 

  그 말을 듣자 린다도 짐작 가는 면이 있었다. 패러독스의 열정적 팬을 자처하는 아더의 입장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단 이 결의가 단순히 오해로 끝나지 않으려면, 한 가지 중대한 전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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