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악마의 속삭임
.
.
.
악마 백대빈과의 만남은 참 이상하고도 허탈했다.
나는 몇 번을 생각해도 우리 집에 빛나는 노란 머리칼과 어스름한 빨간 눈을 지닌 악마가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자는 사이 그가 해코지할까 봐 조금 무서웠다.
그렇지만 이 악마는 다행히도 아직 내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
나는 이른 아침부터,
"똑똑, 예현아 자?"
하고 마냥 얄미운 목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내가 숨을 삼키고 자는 흉내를 내니 악마 백대빈의 나른한 목소리가 문턱 너머에서부터 계속 들려왔다.
"일어나 예현아아아~~~!"
방학 아침부터 사람을 왜 귀찮게 부르는지. 더군다나 앙탈을 부리는 악마라니.
"방금 일어났어요."
"아! 잘 됐다. 내가 예현이를 위해서 요리를 해봤어! 자고로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으, 악마의 요리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저 악마가 물러날 때까지 아늑한 방에 누워 좀 뻐길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내 배는,
"꼬르르르르르르륵......"
"헉, 예현이 배고파!?!? 얼른 나와! 수저도 놔줄게!"
어제 한 끼만 먹고 마음고생을 한 내 배는 나약하리만치 고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덜컥,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거실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었고, 부엌에서는 노릇하니 고소한 냄새가 났다.
"예현아, 얼른 와봐~! 내가 인간들이 많이 먹는다는 간장 계란밥을 만들었어."
인간들이 많이 먹는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능력도 꺼뒀다더니 마냥 허술하지만은 않은 악마의 뒷모습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나는 정말로,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악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해줄 줄은 몰랐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낡은 숟가락으로 한술을 떠 입안에 넣으니 밥과 간장이 어우러져 꼬들꼬들하고도 반가웠다.
내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고 난 뒤, 제일 첫 끼니로 마가린에 간장과 간장, 참기름을 이용해 밥을 비벼 먹었던 달달한 기억이 입안에서 팡팡 터지듯 열렸다.
"... 오?"
"어때?"
"나쁘지 않은데요."
"그럼 나 칭찬해 줄 거야?"
"네, 밥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푹 익히지 않은 달걀에다 밥과 간장, 참기름 2분의 1티스푼, 통깨 조금까지!
밥과 간장에는 양념이 잘 베여있었다.
악마가 해준 간장 계란밥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꽤나 훌륭했다. 형벌을 껴안은 듯 무겁던 마음이 간장 지단 위로 덮여 노랗게 뒤집혔다.
그 순간, 누가 평생 본대? 아주 잠깐이잖아, 이런 악마와의 일시적인 동거라면 나쁘지는 않을 거야. 하고 무의식의 숲이 내게 속삭였다.
/
어쨌거나 든든하게 나를 먹여준 악마에게 아주 약간의 감사를 지니고서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기 위해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덥석!
하고 악마가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고서는 옷깃을 타고 올라가더니 내 손목을 붙잡고서 강한 힘을 줬다.
악마는 악마였는지, 내 손목과 그 위로 틔워진 혈관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왜인지 모르게 호흡이 가빠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세요...?"
"아직 나가지 마, 우리 그래도 얘기할 게 조금 남은 것 같아."
"저 공부해야 해요."
"잠깐이면 돼, 서연재가 곧 올 건데. 너를 보면 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느닷없이? 저 상당히 부담스럽고 힘든데 이것 좀 놔주세요."
"으응... 미안해...... 그래도 나랑 이야기는 해 주면 안 돼?"
악마가 아쉬운 듯 내 손목을 놓았다. 동시에 헉, 하고 숨이 쉬어졌다.
"저 시간 없으니까 요약해 주세요, 옷깃도 손목도 절대 잡지 마시고요."
"너 예쁘잖아, 네가 혹여라도 그를 만나고 천사의 영향을 받게 되면 난 네 일상이 달라질 걸 알고 있어. 나는 너를 지키려는 거야."
"음...? 그러니까, 연재라는 분이 천사님이신 거예요?"
"잘 들어봐."
"뭐를요...?"
악마가 나에게 한낮의 밤잠과 같이 속삭였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서서히 내 눈이 감겼다.
독서실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가야...
/
번뜩!
하고 내가 눈을 떴을 땐, 백대빈이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일어났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악마의 멀쩡한 셔츠 깃을 똑같이 잡아 따지고 싶었다.
이래서 경계를 풀면 안 되는 건데, 사람이든 악마든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건데.
숨... 숨이 찼을 때 저 자식의 명치를 발로 차, 이 집에서 밀어냈어야 했는데.
"제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죠?"
악마는 다급한 나와는 상반되게, 약 오르리만치 느긋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하고 웃었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놀라지 마 예현아. 악마의 속삭임을 너의 몸에 전달했어."
"네? 그게 뭔데요? 뭔가 이름만 들어도 상당히 불쾌하고 짜증이 나는데 믿어도 되는 거예요?"
천사의 속삭임이라면 어릴 적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천사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과거를 들려주고, 애정을 구하는 것.
그런데 그 반대? 악마의 속삭임이라니, 그것이 뭘까. 내 컨디션은 또다시 급하게 무너졌다.
"어떤 이야기 하나 해주려고. 넌 인간이니까 내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으려면 잠시 동안은 이게 필요할 거야.
그럼 이제부터 말해줄게. 어떤 한 악마의 이야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천사에 대해서."
악마는 굳게 다짐이라도 한 듯이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내 시간을 뺏어간 네 다짐을 들어라도 보자.
홀리지 않았지만, 머리가 지끈거려와서 차라리 홀리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