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연은 올해로 열여덟이 되었다.
그는 고국의 하나뿐인 공주로 날 때부터 고국 왕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그의 오라비는 일찍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엄한 가르침과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휘연은 오라비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답답한 궐 안에 살면서도 어린 아이같은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
허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아비와 오라비가 국정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고
사대부들이 서로를 음해하고 술수를 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조차 간사하게 구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몸소 느끼며
점차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자신의 표정과 생각을 감추는 법을 터득하고 득실에 따라 사람을 가리며
되도록이면 나서지 않고 조용하게 숨죽여 지내는 삶을 택했다.
공주가 가는 곳마다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궁궐은 이내 삭막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국 세자와의 혼인을 약조하였다."
"대체 누가 신국 세자와 혼인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
"신국은 얼마 전까지 고국의 수도에서 칼부림을 하던 나라가 아닙니까?
근데 어찌 그런 나라의 세자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먼저 그런 제안을 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하였다."
"..."
"휘연아.. 네게도 좋은 기회일 수가 있다. 고국에서야 혼인을 한다 해도 궐 밖에 나가 살아야 하지 않느냐.
허나 신국의 세자빈이 된다면.. 평생을 궁 안에서 편히 지낼 수가 있다."
"소녀가.. 평생을 궁 안에서 살고 싶다 말한 적 있습니까?"
"..."
"어찌 제게는 한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휘연아..."
"소녀가 신국의 세자빈이 된다면... 더는 고국의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인데 그건 괜찮으십니까?"
"..."
"그러니까.... 지금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신국에게 내어주시는 것이군요.. 저를 내어주고 무엇을 받으시기로 하셨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아닙니다. 들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더 비참해지기만 할 것인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혼례일.
"가시죠, 부인."
휘연은 부인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늘부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세자가 보기와 다르게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절차대로 혼례가 진행된 후, 휘연과 세자는 왕실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맞습니다. 이리 보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실 어른들은 휘연을 마음에 들어했다.
신국의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빈궁, 신국의 사람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황송하옵니다."
"세자와 이리도 잘 어울리다니, 내 무척 기쁘오."
"저 또한 기쁩니다, 아바마마"
세자가 거들었다.
신국의 왕은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빈궁에게 이제 고국은 고(古)국이 되었소, 허허"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으나, 휘연은 그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맞습니다. 허나 제 조국이라는 건 변함이 없겠지요."
"신국이 이제 빈궁에게 새로운 나라가 되어줄 것이오. 마음 편히 지내길 바라오."
"황송하옵니다."
"고국이 그리워지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나와 함께라면 다녀올 수 있을 터이니.."
세자가 덧붙였다.
빈궁과 왕, 그리고 세자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혼례 일주일 전.
"혼례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냐."
"소자가 따로 할 게 있겠습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을."
"좀 급작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 다 너를 위한 일임을 잊지 말거라."
"예, 참으로 황송하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늘 저를 위해주시지 않습니까. 소자, 복에 겨워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가 들어도 세자가 심히 비꼬아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자!"
"예, 아바마마."
왕이 호통을 치자, 세자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세자는 어찌 날이 갈수록 심성이 고약해지는 것이오."
"다 아바마마를 닮아 이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준비가 안 된 혼례를 치르게 하는 것은 내 사과하마. 허나, 훗날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땐 이 아비의 큰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훗날... 매번 훗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소자는 지금 아바마마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망해가는 나라의 공주와 대체 왜 혼인하라 하시는 겁니까?"
신국의 왕은 자신의 아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리 한치 앞만 보니..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더냐."
"예?"
"고국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동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그 긴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 저리 건재하지 않더냐. 물론, 지금은 우리 신국이 부단히 앞서 나가고는 있지만 언제 다시 따라잡힐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고국의 세자와 공주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하였다. 세자가 왕이 되고 공주가 혼인하지 않고 궐에 남는다면 우리에겐 아주 불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국을 고국에 병합시키는 것이 시간 문제일 수 있단 말이다. 허나, 공주를 데려와 세자빈을 삼는다면 앞으로 네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또 고국의 세자는 동생이 왕비로 있는 신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하지만..."
"다 너와 신국을 위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꼭 혼인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대체 무슨 방법이 더 있단 말이냐?"
"..."
"어차피 해야 하는 혼인, 조금 일찍 하는 것뿐이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그건.."
"네가 세자가 된 이상, 애당초 너의 혼인에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허나..."
"?"
"마음에 둔 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