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시작하기 9년 전 내 동생은 행방불명되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고, 연구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날이 되었다. 나는 그날도 어김 없이 국제 연구실 인턴으로 야근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야근하는 저녁이면 책상 위 조그마한 서랍 속에서 날 좋은 공원의 온도를 머금고 있는 구를 느끼며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문제는 그날따라 동생이 하는 말이 머릿속에서 끊어지지 않는 실처럼 맴돌고 있었다.
“구를 통해 빛을 볼 수 있다고?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해”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도저히 이 고민은 내 머릿속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이가 없네, 전화라도 해봐서 나도 보고 싶다고 말이나 해야겠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지막 벨소리
“뭐야, 벌써 자?”
별일 아닌 듯 꽉 쥔 구를 내려놓고 새로운 구를 만드는 기획안을 작성했다.
***
수많은 구들이 부딪힌다. 온도와 온도가 서로를 감싸안는 느낌이지만 그 속에서는 통로가 없는 미로같이 두 개의 온도가 감싸다 못해 복잡하게, 알아볼 수 없게 엉킨다. 연구실 내부에서 입구까지 한 방향으로만 구의 본연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추억 속 한편의 미쳐 숨기지 못한 자연적인 냄새, 마침내 그 냄새를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 구는 죽었다. 서로의 온도를 집어삼킨 채, 반복적으로 나오는 현상이지만 과정은 매 순간이 다르다 어이가 없듯이 형식은 말했다.
“오늘은 따뜻하다 이거지?”
구의 온도가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다.
“형 진짜 빛을 본 적이 있다고요? 요즘 구도 비싼데 이러다가 우리 진짜 길바닥에 앉아야 해요.”
차가운 바람이 연구실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봤다고 새끼야, 오늘은 돼야 해야 했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썩을 구가 문제야”
연구실에 놓인 찬기운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온도가 비슷한 구에서 반대인 구 까지 심지어 온도가 동일한 구까지 수백 번을 비비고, 붙여두고, 서로 깨보고, 구에서 빛을 봤다 는 게 맞기는 해요 형?”
목소리는 낮았지만 답답하고 화난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모든 순간들이 멈춘 듯 호준과 형식 또한 하나의 돌이 된 것처럼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저 먼저 갈게요 형”
“그래”
들어올 때 가벼웠던 문이 나를 뭉개듯이 무거워졌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 마음 하나도 연구실의 벽처럼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소리야 집으로 가자”
고정된 몸을 인간의 힘으로 끌어당기면서 물렁뼈라도 된 듯이 힘겹게 14층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있다. 14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길어야 1분 조금 넘는다. 그 시간이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진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삐걱거리는 소리 외에는 고요하고, 죽어있었다. 증오했던 구들이 오늘도 나를 집까지 안내해주고 있다.
“행운인지 저주인지”
미세한 바람들이 나를 반겨준다. 아침에 있었던 자연의 냄새, 빈 공간을 메워주던 새집 냄새. 모든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날린다. 오늘 하루만큼은 침대가 나를 삼켜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베개 옆 책상에는 희미하게 나를 반겨주는 냄새가 존재했다. 동생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간직하고 있는 구이다.
“너 때문에 내가 9년이란 시간을 달려왔는데 너는 어디 있는 거야”
***
동생의 냄새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싹함이 온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람이 죽으면 냄새는 없어진다. 고유의 소리 또한 사라진다. 집안 베란다, 침대 밑 심지어 세탁기 안까지 바람이 안고 간 듯 갑자기 사라졌었다. 그 순간 내 책상 위에 미세한 동생의 냄새가 담긴 핸드폰이 있었다.
“형 현실은 우리랑 멀리 있지 않아 다가가야지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그때서야 볼 수 있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보고 있는데 뭘 본다는 뜻인 건지.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에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난 느낌을 받았다.
“구는 사실 우리 그 자체인 거야, 서랍 안에 있는 온도도 냄새도 없는 구를 밖을 향해 세게 부딪혀봐.”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니 동그란 구가 굴러오는 소리 외에는 어떤 냄새도 온도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구를 잡아 거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한번, 두 번, 세 번 깨질 듯이, 가루가 되고 더 이상 부딪힐 면적이 없어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다’의 의미를 생각할 때 한줄기 반짝임이 내 몸을 뚫는 기분을 받았다.
무언가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빛이 내 몸안에서 춤을 추며 나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화려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늬와, 곡선과 직선 그 사이에 파생된 다양한 선들이 이루고 있는 형태적 모습은 나를 압도시켰다. 앞을 향해 걸어갈 때마다 온몸은 꿈틀거리며 나를 흥분시켰다. 햇살의 온도가 내 손을 뜨겁게 달구고 있고, 심장이 튀어나갈 듯 뛰고 있었고, 내 얼굴에는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