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데. 굳이 숟가락이 필요할까? 내가 있는데! 누나.”
지국장은 숟가락 대신 내 손에 손깍지를 끼웠다. 행복한 산책에 꼬리를 찰랑찰랑 흔들어 대는 댕댕이처럼, 깍진 낀 손을 흔들었다.
“아~하세요. 우리 사랑스러운 누나.”
느물거리는 지국장의 장단을 도저히 맞출 수 없어, 짜증을 냈다.
“치워라~.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이 깍지 낀 손 좀 빼라고!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갈무리한 지국장이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고백했다.
“장난으로 넘어가고 싶은 누나의 마음을 알겠는데. 그래도, 누나의 남자가 되고 싶은 내 마음 좀 봐달라고 말하는 거야!”
진한 수컷의 선전포고에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국장의 정공법에 마음대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연을 꿇을 수 없으니. 머리만 지끈거렸다.
지국장의 높다란 콧등을 응시하며, 아찔한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도망가자. 도망만이 살 길이다. 도망!’
“누나의 댕댕이로. 그저 누나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이젠, 누나의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된다. 누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맥주는 내가 마셨는데, 네가 왜 취해서 그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눈빛으로 지국장은 자조적으로 말했다.
“남자라서… 누나한테 취했지!”
지국장에게 잡아먹힐 열기에 움찔한 나는 횡설수설했다.
“남자라고 강조 안 해도, 너 원래 남자라고. 대한민국에서 육군 특전사로 제대하면 상남자지! 아무렴.”
“그럼 뭐해. 누나한테, 남자로 보이지 않는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지국장을 애써 무시했다.
“아니야. 너 충분히 남자로 보여. 이 누나가 남자라고 공증받아 줄까? 됐지. 아깝게! 미역국에 말아 놓은 밥이 다 불렀다.”
노심초사 감정의 마지노선을 사수하려고, 퉁퉁 불러버린 미역국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아~맛있다. 역시, 사람은 배고프면, 헛소리가 나와. 그렇지? 너도 먹어.”
애달픈 눈으로 임수를 바라보던 지국장은 입매를 억지로 말아 올려, 쓸쓸함을 삼켰다.
“내가 사랑하는 누나를 굶기면 안 되지! 잠깐만 기다려.”
우격다짐으로 입안에 넣었던 내 미역국을 가져간 지국장이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색하고 껄끄러운 이 타이밍을 타계할 방법은 오직 삽십육계 줄행랑이다.’
편의점의 진열대를 훑어보던 지국장의 눈길을 피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
“코 닿으면 엎어질 거리인데. 뭐가 급하다고 전화까지 해. 빨리 나오기라 하셔. 댕댕아 ”
나랑 통화하던 지국장이 편의점의 통유리를 두드리며 으름장 놓았다.
[혹시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참고로 100m 달리기 11초 야. 우사인 볼트는 아니더라도, 내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는 무정한 누나 정도는 잡을 정도는 돼. 알지.]
“내가 애야? 뭐가 무섭다고 도망가냐! 늙은 누나 피곤하다. 빨리 나와.”
지국장은 착잡함이 묻어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회유했다.
[그렇지. 누나한테 난 고작, 댕댕이인데. 뭐가 무섭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그런데, 누나 그것 알아? 댕댕이도 누나의 목덜미를 물 수 있다는 거!]
슬픔이 묻어나는 지국장의 목소리에 가슴 한편이 아려왔지만, 밝은 목소리로 회피했다.
“한집에서 15년을 산, 정이 있는데. 내 목을 물어봤자, 죽이야 하겠어. 살짝 깨물겠지. 안 그래? 댕댕아.”
지국장의 절절한 고백을 치기 어린 사랑의 열병으로 묻어두고, 구두끈을 질끈 묶고 장난스럽게 튀었다.
아무리 달리기가 느려도. 먼저 출발했는데, 도망을 못 칠까 싶었다.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린 지국장은 어느새, 내 등 뒤까지 반짝 쫓아오고 있었다.
“누나, 연인의 데이트 필수 코스인 ‘나 잡아라’ 놀이하고 싶었구나.”
“아니야! 쫓아오지 마!”
“진작 말해주지. 진심을 담아 내가 잡기 놀이, 해줬을 텐데. 사랑스러운 누나~잡히면, 죽는다.”
토끼몰이하듯, 속도를 조절하면 쫓아오는 지국장이 너무~너무 얄미웠다.
“잠깐, 타임. 숨 좀 쉬자. 도망 안 갈 테니까. 그만 쫓아와.”
다 잡은 사냥감을 가고 노는 양, 지국장은 내 제안을 인심 쓰듯 수락했다.
“사랑스러운 누나가 힘들다면. 뭐, 기다려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누난데.”
“그 얼어 죽을, 사랑스러운 누나라는 말 좀, 그만해. 제발.”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얼어 죽어도, 좋을 만큼! 내가 사랑하는 누나. 이제, 누나 곁으로 간다.”
“오지 마. 너 갈 길, 가! 굳이 내 곁으로 안 와도 돼. 먹고 살기도 벅찬 사이끼리.”
**
어느새 집 마당까지 쫓아온 지국장은 내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잡았다! 얼어 죽을 만큼, 사랑스러운 누나! 드디어, 내 품에 안겼네.”
지국장의 가슴팍에 안긴 내 심박수가 올라간 만큼, 내 등 뒤로 그의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
“이것 놓지! 내가 죽부인도 아니고. 그만 껴안지. 덥다. 더워! 그만 나가 떨어 주지. 이 댕댕아.”
내 허리를 더 세게 감싸 안은 지국장은 내 귓가에 짓궂게 간지럼을 태웠다.
“싫은데. 그보다. 도망가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는지!”
‘갑자기 열이 왜 올라! 얼굴도 화끈하고. 심장은 왜 뛰고? 부정맥인가? 그것도 아니면 갱년기? 정신 차려. 임수야!’
지국장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타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설마, 기억상실을 운운하지 않겠지. 사랑스러운 누나!”
“이게 어디서! 다섯 살 많은 누나한테, 가당치도 않은 끼를 부리셔!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이 댕댕아.”
뒷발길 질로 지국장의 정강이를 뻥~차 버렸다.
“악!~아프잖아. 누나~너무 아파. 아무래도 다리 깁스해야 할 것아. 내 손 좀 잡아줘.”
속수무책으로 내 발길질에 당한 지국장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엄살을 떨었다.
“이참에 입원시켜줄까. 내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네 정강이 뽀샤버릴까?”
“앵두 같은 누나의 입술로, 두툼한 내 입술을 뽀샤주세요!”
지국장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툴툴대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야!”
지국장의 손아귀 힘에 휘청이던 내가 덮치듯 그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는데.
엉겁결에 내 손이 지국장의 가슴골 라인을 타라, V라인 티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젠장! 아 쪽팔려.’
단단한 가슴팍을 뜻하지 않게, 비비듯 훑은 내 손짓에 목까지 빨개진 지국장이 애절하게 호소했다.
“누나 때문에 뛰는 내 심장의 소리, 언제까지 모른 척, 할 거야?”
올려다보는 갈망하는 눈빛으로 내뱉은 지국장의 숨결에 닿을 때마다 내 목울대가 짜릿 찌릿했다.
멈춰버린 뇌는 산소 부족을 호소하듯,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뭐가 단단히 잘못됐어. 굳이 나를? 발정 난 댕댕이는 위험해! 일단, 일어나자. 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지국장을 밀쳐내지만, 미동조차도 없었다.
지국장은 겁먹은 아이처럼, 절절매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날 댕댕이 취급해도 좋으니까. 제발~ 날 밀어내지 마. 내 곁에만 있어 줘! 누나가 날 버릴까 봐, 무서워.”
서글프게 매달리는 지국장을 보며, 연민이지 죄책감인지 모르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희망 고문은 싫은데…정말 싫어하는데…….’
분리 불안증을 호소하는 지국장의 응석을 내쳐야 하는데, 습관처럼 내 손은 그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진짜 이기적이다. 받아 줄 수도 없으면서, 헤어지기도 싫고. 이건 뭐~어장관리도 아니고. 못된 X이다. 나도.’
자기혐오 와중에도! 널따란 지국장의 품에서 펼치는 잔 근육의 향연과 아찔하게 풍기는 베이비 체향에 도취됐다.
일말의 양심에 가책이 간지럽게 피어오르는 내 오감의 새싹들을 싹둑 잘랐다.
“어~머 댕댕이 무서웠구나. 이럴 줄 알았냐! 어디서 수작질이야. 덥다고. 빨리 떨어져.”
지국장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싫어~용. 댕댕이는 무서워서, 누나를 꼭~안고, 자야 돼용~. 누나앙~.”
도톰한 입술로 갖은 아양을 떨지만, 좀처럼 날 가둬 놓은 상남자의 팔뚝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야~하게! 안아 달라고 조르지 않을게. 누나, 잠시만 이러고 있자. 달밤에 포근하게 안아주세용. 사랑스러운 누나~.”
“어디가 포근한데! 집 앞마당에서 이러고 싶냐? 호텔 스위트룸도 아니고. 딱딱하다 못해.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지국장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응! 누나랑 있으면, 어디든 좋아.”
“너는 좋을지 모르지만, 난 싫다. 이 늙은 누나, 입 돌아가기 전에 일어나자!”
설렘에 들숨을 들이킨 지국장이 단단한 팔뚝에 힘을 풀고, 입술을 엉큼하게 놀렸다.
“호텔! 스위트룸이면! 밤새도록 누나를 끌어안고 자도 돼? 정말? 지금이라도 갈까. 누나~가자.”
지가 듣고 싶은 말만 개떡같이 듣고, 찰떡같이 곡해하는 지국장 때문에 내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영어도 아니고! 화자의 숨은 의도를 묻는 시험도 아닌데. 국어 몰라? 그냥, 말 그대로. 곧이곧대로! 집에 들어가자는 소리잖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무섭게 지국장을 노려봤지만. 안타깝게 역효과만 났다.
기죽기는커녕, 내 손을 살포시 잡은 지국장은 색기가 가득한 눈망울로 상상의 회로를 돌렸다.
“정답~! 호텔, 스위트룸! 누나. 말 그대로, 곧이곧대로. 우리 결혼해요! 딩동댕. 야~호.”
“땡! 땡땡땡땡~! 소에 경 읽기도 아니고. 진짜~. 소는 잡아먹기라도 하지. 너는 어쩌면 좋냐?”
“누나… 나한테 누나는,”
내 손을 잡고 놓아줄 생각이 없는 지국장과 보리쌀 게임 하듯, 실랑이도 버거운 나는 원천봉쇄로 돌아섰다.
“아! 모기다.”
지국장의 반듯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윽…….”
찰진 짝 소리와 함께 지국장은 뒤로 주저앉았다. 어리둥절한 그는 붉게 물든 애꿎은 이마만 매만졌다.
“…누나?”
“오늘따라 모기가 왜 이렇게 많아! 마당에 화단이 있는 집은 이래서 안 좋아! 모기약이라도 뿌려야겠다.”
없는 모기를 때려잡은 것처럼, 내 손바닥을 지국장의 티셔츠에 장난스럽게 닦았다.
‘어린놈이, 어디서! 누나한테, 기어 올라와. 어림도 없지.’
멋있는 로맨스 꿈꾼 지국장에게 병맛을 선물한 나는 웃음기를 참으며 입꼬리를 내렸다.
내리깔아보는 내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지국장이 날 안고 낙법 하듯, 바닥을 한 바퀴를 돌았다.
“엄마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지국장의 팔 베게 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꼴이 되어버렸다.
발정 난 댕댕이의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머릿속에 울려대는 시끄러운 경보음에 어떻게든 그의 품에서 도망가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어! 저기 봐봐. 비키니 입었어. 달밤에! 얼굴도 진짜 이쁘다. 저기.”
보란 듯이 내 허리 위로 무릎 꿇고 올라탄 지국장이 농염한 눈동자로 훑어보며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마치 먹잇감을 포획한 만족감에, 입맛을 다시는 야수처럼 보였다.
옴짝달싹 못 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지국장은 맹수의 마지막 하울링 하듯, 들뜬 날숨으로 느른하게 읊조렸다.
“누나를 사랑하는 나를… 동정해도 좋고. 연민이라고 해도, 좋으니까. 제발, 내 곁에서, 누나의 눈에 나 좀 담아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