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광. 쿠광. 쿠광.
심장이 가슴이 아닌 귓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재하는 재빨리 스마트워치를 손으로 가렸다.
빨간 하트가 유난을 떨며 반짝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서진이 나를 좋아한다!
진짜로? 미션 아니고?
재하는 오른쪽 팔목에 덥석 채워진 팔찌를 보다가, 다시 우서진을 봤다.
재하의 미션 팔찌와 달랐다. 붉은색 실로 매듭을 엮어 만든 팔찌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빨간색 작은 구슬이 촘촘히 꿰어진 팔찌였다.
출연자 마다 팔찌 모양이 다른가?
“나한테 팔찌를 주면 미션은 어떡해?”
재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 그거야?
나도 니가 좋다던가, 고맙다 라던가 그런 말을 했어야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무리 살면서 이런 일이 없었다 해도 그동안 봐온 드라마나 만화는 발로 봤나 싶었다.
“아! 그러니까 나는, 내 말은.”
횡설수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재하의 모습에 우서진이 빙긋 웃었다.
이래선 안 되겠단 생각에 재하는 눈에 힘을 빡 주고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우서진 눈앞에 들이댔다.
재하의 스마트워치 화면에 빨간색 하트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난 지금 제대로 된 말이 생각이 안나!”
재하가 소리치듯 말했다.
“솔직히 믿기지도 않고. 너는 멋지고 인기도 많고. 나는 그냥 평범하고. 그래서 미션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생각나는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내던 재하의 말이 갑자기 툭 끊어졌다.
어?
재하는 뭔가에 푹 감싸여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어?
섬유유연제 냄새 같기도 하고 비누 냄새 같기도 한 따뜻한 기운이 확 덮쳐왔다. 그리고 이마에 닿은 부분이 퉁퉁, 퉁퉁 울렸다.
우서진의 냄새, 우서진의 심장 소리. 그리고.
“난 그냥 그 남자애야. 연습실에 숨어서 질질 짜던 찌질이. 그 찌질이한테 니가 어떤 존재인지 너는 몰라.”
우서진의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몸 전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재하를 감싸 안았던 우서진이 조금 떨어졌다. 시뻘게진 재하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우서진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암튼 미션 아니고. 방송 아니고. 사심! 내 사심이야! 알겠지?”
우서진이 몇 번이나 사심을 강조하자 재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우서진이 재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내 미션 팔찌는 여기 있어.”
우서진은 자신의 팔목을 내밀어서 재하에게 붉은색 매듭팔찌를 보여주었다.
“어? 그럼 이건?”
재하가 놀라자 우서진이 씩 웃었다.
“절에 갔다가 예뻐서 샀어!”
우연히 지나다가 니 생각이 나서도 아니고 절에 갔다가 라니.
“불교야?”
재하는 뜬금없이 종교를 묻는 자신이 또 한심했다.
그냥 응 그렇구나 하지.
하지만 우서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했다.
“중2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 많이 아프셨거든.”
재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우서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가 절에 다니셔서 엄마를 절에 모셨어. 그래서 지난주에 절에 갔다가. 이상한가?”
우서진의 말에 재하가 고개를 급하게 저었다.
“아니! 전혀 안 이상해! 너무 예뻐! 정말!”
재하는 우서진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이번엔 우서진이 스마트워치를 슬쩍 가리며 허둥지둥 말했다.
“다음에 갈 때 또 사다 줄게. 예쁜 거 많더라.”
그리곤 서둘러 말을 돌렸다.
“자! 이제 미션 하러 가자!”
재하는 우서진이 갑자기 말을 돌리자 웃으며 되물었다.
“뭐?”
그러자 우서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션 실패해서 탈락하면 나 매니저한테 죽어.”
“매니저도 있어?”
재하가 깜짝 놀라자 우서진은 다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여우같은 놈한테 걸렸어. 암튼 그 새끼, 아니 그 매니저가 장난 아니게 쪼아대거든.”
우서진의 말에 재하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서진은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오후 5시 34분.
뛰어야 했다.
우서진은 재하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오후 5시 44분.
재하는 뮤지컬 동아리방 앞에 서서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앞으로 3분.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미션을 편하게 끝낼 것 같다는 생각에 재하는 조금 안심이 됐다.
하지만 잠깐 멍해질 새도 없이 우서진이 불쑥 떠올라 마음이 출렁거렸다.
강당 앞에서 아쉬운 듯 손을 놓던 우서진에게 재하는 미션 잘 하라고 하고서 서둘러 이곳으로 왔다.
서로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복도 끝에서 우서진이 나타날 수도 있단 생각에 재하는 손목에 있는 팔찌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끼익.
재하는 눈 앞의 복도에서가 아니라 등 뒤에서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뮤지컬 동아리방 문이 열렸다.
“어?”
문현빈이었다.
재하는 서둘러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오후 5시 46분.
탁 탁 탁 탁 탁.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에 재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 너희, 왜?”
최지민이었다.
셋 다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문현빈! 나도 지금 나가야 된다니까!”
듣자마자 짜증이 나는 목소리였다.
오후 5시 48분.
후관 5층 뮤지컬 동아리방 앞 복도에서 권재하, 문현빈, 최지민, 이은주가 서로를 뜨악하게 바라봤다.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캐봐야 했다.
“너희 뮤지컬 동아리야?”
재하는 문현빈과 이은주에게 물었다.
이은주는 뭔가 생각을 하는지 한 쪽 보조개만 쏙 들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있다가 최지민을 보며 말했다.
“아니. 난 그냥.”
그리고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문현빈은 그런 이은주를 보고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뮤지컬 동아리야. 이은주는 선배가 불러서 같이 온 거고.”
최지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난 간다!”
문현빈은 미련 없이 재하 앞을 지나쳐갔다.
“최지민!”
이은주가 살짝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최지민을 불렀다.
“저기 시간되면 무대 배경 채색 좀 도와줄래?”
최지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재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은주는 활짝 웃으며 최지민의 팔을 잡았다. 그러다 재하의 손목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권재하 그 팔찌 뭐야?”
이은주는 우서진이 준 팔찌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션 팔찌는 그냥 매듭 아니야?”
이은주가 갑자기 물어대자 재하는 말문이 막혔다. 우서진과의 일을 들킨 것만 같았다.
“너 설마! 아니지?”
“뭐가?”
망할.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고, 당황하는 티가 너무 심했다.
이은주는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최지민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최지민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재하를 보자 재하는 아차 싶었다.
저 자식 날 마녀로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최지민을 붙잡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은주는 최지민과 함께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하는 다시 혼자 복도에 남아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가?”
문현빈의 목소리에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저녁노을이 비스듬하게 문현빈의 얼굴을 비추었다.
“간 거 아니었어?”
재하의 말에 문현빈이 미소를 지으며 재하에게 다가왔다.
“내가 가버리면 저 자식이 눈치를 챌 줄 알았지.”
재하는 문현빈의 말에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카드에 적힌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재하에게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천재네.
“같이 내려가자! 사실 혼자 내려가기 무서워서 다시 온 거야.”
어울리지 않는 문현빈의 너스레에 재하는 피식 웃으며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여기다!”
문현빈의 말에 재하가 민망한 듯 안경을 쓸어 올렸다.
지난 번 촬영 때 재하가 문현빈의 어깨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계단이었다.
“내가 원래는 그런 일이 잘 없어. 코피도 난 적 없는데 그날은 스트레스 때문에.”
재하가 주절주절 말을 하자 문현빈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니가 연약한 스타일은 아니지.”
“뭐?”
재하가 확 노려보자 문현빈이 겁먹은 척 장난을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
재하는 얼른 손을 뻗어 문현빈의 손을 잡아챘다.
“야! 조심해!”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한 문현빈을 보며 재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문현빈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꽉 잡은 재하를 쳐다봤다.
“뭐야! 장난이었어?”
재하가 원망하는 얼굴로 손을 놓아버리자 문현빈이 어린애처럼 웃었다.
“권재하 너 표정이!”
“내 표정이 뭐!”
재하가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문현빈은 시시각각 변하는 재하의 표정이 신기하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재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문현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불이 켜진 맞은편 본관 건물의 복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
키가 큰 남자애의 옆모습이 보였다. 우서진이었다. 우서진 앞에는 자그마한 여자애가 서 있었다.
누구지?
재하는 뱃속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