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아- 푹 하고 한숨을 내 쉰다-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덜렁이다.
커피를 하루에 몇잔은 먹어댄다는 사람이...그런 실수를 하고.. 바보같이.
왠지 문을 닫고 들어갈때의 그는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이상했다.
이상한 점이 하나나 두개여야.. 아 지금 좀 이상하네 그러지
맨날맨날 이상하니까..
뭐가 정상인지도 잘 모르겠다.
병원에 안 가면은.. 흉이 질 텐데.
하얀손에 그런 흉은 어울리지 않을것 같다.
나야 미술하며 손은 좀 못나졌지만.. 원래도 마디가 굵은 편이라-
그런 상처, 있어도 표시도 잘 안났겠지만.
안경을 올릴때마다 얼굴보다 더 잘보였던
여자보다 더 곱던 흰 손에 그런 흉터가 남는다면... 잘 보일것이다 너무나 또렷하게-
하임은 이제 작약 생각은 그만하기로.. 그렇게 맘을 먹는다.
근데 왜 그렇게 입술을 깨물어 뜯어대는 것을 멈출수가 없을까..
그만하자- 그만.
그 사람이 그렇게 들어가는 통에 저녁에 끝나고 나면 세진이를 만나도 되는 이야기도 물어보지 못했다.
세진이가 한국에 오다니- 왠지 든든해진 기분이다. 더 크게 환영해줘야 하는데
이럴때는 나의 무뚝뚝함이 가슴 시리도록 미안해지고 만다.
하임은 말 없이 작약이 준 오늘분의 원고를 읽는다. 작약이 쓴 책중에 이렇게
등장인물이 확고한 책은 읽어보지 못했었던거 같은데..
내가 그렸던- 그 사람이 꿈처럼 영원히 사랑한다는 그 여자는 자꾸만 등장한다.
요정처럼 작고 상큼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그 여자.
그 사연을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사실은 알고자 했다.
처음엔 그랬다.
알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사람의 눈을 보니 그 대답을 듣고나니
누구인들..... 내가 알게 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 사람의 눈빛만으로 충분히 , 그 왼손에 끼워진 말도 안되게 크고 번쩍이는 그 , 새끼손가락의 반지는
그 여자의 반지임을... 알수 있었다.
왜 주지 못했는지는... 묻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이가 먹어도 하다못해 사람들은 늙어도... 사랑, 그 단어앞엔 늘 질풍노도일 모양이다.
하임은 읽고 나서도 한참을 연필을 드는데 망설이다.. 그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손은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을까.
창밖의 더운 바람이 싫어져 문을 닫는다. 하임은 무의식적으로 또.. 한숨을 쉬었다.
-
세진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전화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돌아온게.. 기대한 만큼... 기쁘지 않은가?
바쁠수 있지만... 그래도..
공백을 채우려면.. 우리 사이에 더 많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세진은 어쩔수 없이, 픽 웃고 만다. 아마도 하임이 지금쯤 더 많이 더 기뻐해주지 못한것에
미안해할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쩔래 장하임... 넌 날 다 모르는데.. 난 널 왜 이렇게 씩이나 잘 아는지..
강남역 부근도 많이도 변했다- 예전과는 확 달라졌다고나 할까.
그럼 이까지 온 김에- 미술 재료랑 책도 좀 살까하고 **빌딩으로 향했다.
큰 서점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책 저책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 혹시..."
"네?"
돌아보니 있는건 어떤 여자였다.
얼굴에 화장을 떡칠하고- 앞뒤로 파인 옷을 입은
못되게 생긴..
누구..?
"유세진... 아니야?"
벌써 말이 짧네? 진짜 웃기는 여자다.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 전 유세진이 맞는데.. 누구시죠?"
최대한 예의를 그러모아 대답했다..
"나 진혜주 ! 왜 도하 친구고- 너랑 한참전에 소개팅 했었잖아- 기억안나?"
....
기억못할 만도 하지.. 그게 언제적 일인데
어디선가 내 사진을 보곤 하임이를 졸라서 억지 소개팅을 했던 여자다.
그떄 분명 김도하 자식이 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경고 했는데도 어찌나 끈질기게 연락을 하던지.......
...귀찮은 기억이 가득한 여자다.
세진은 마지못해- 웃는다. 몹시 마지못해.
".. 아... 그렇게 이야기 하니 기억이 날 것도 같네... 그래"
"너 그러고선 유학 갔다고 장하임 그 기집애가 얼마나 시침을 뚝- 떼던지- 이탈리아로 갔었다며?
이제 완전 돌아 온 거야?"
"..... 아니 잠시만 돌아왔어- 아주 잠시- 일주일 있다 또 갈꺼야"
앞트임 뒤트임 칼을 대도 100번은 더 댄듯한 그 눈에 조금은 아쉬움이 서리는것 같다.
세진은 등골이 서늘하다.
진짜- 싫은타입......얼굴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남 험담을 아주 랩처럼 뱉는 여자였다.
뒷담화 부문 올림픽이 있었으면 금메달 여러개 목에 걸만한 그런 여자였다.
세진은 뒷담화엔 취미가 없었다. 특히 앞에선 그런 말 안하면서
뒤로만 그러는 사람은 더더욱- 싫었다.
그날 만났을떄도 대화의 4분의 3이 남 험담이었다.
소개팅 날 할만한 이야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럼 너 그 소식은 들었어? "
"무슨 소식?"
"도하가 다른여자 만나서 - 장하임 완전 차였잖아-
낙동강 오리알신세! 게다가 그게 장하임보다 한참 어린애래-"
진혜주는 이 이야길 전하며 오히려 좀 고소해하는거 같다.
혼자 막 깔깔댄다.
"그러게 관리나 좀 받고 다니지- 맨날 선머슴애 처럼 그게 뭐야- 도하가 늦게 깨달은거지-
걔가 솔직히 얼굴 좀 흰거 말고 뭐 볼게 있니? 안정된 직업이길 해 뭐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임이는 아마, 그 뒤에 한참을 외로웠을것 같다.
친구들도 다 그놈이랑 엮여 있었으니... 하임이라면 풀어내기보단 도망을 택했겠지.
그렇게 혼자 있는걸 택했을것이다. 여전히 자기 꺼 못챙기는 바보같은 장하임.
세진은 마음이 쓰린다.
이게 다 , 자신이 자리를 비워서, 마치 그래서 그런것만 같아
죄책감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진혜주는
잘못 골랐다.
이야기를 전할 상대를 한참- 잘못골랐다.
세진이의 늘 웃는상인 얼굴에서 미소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진다.
세진의 무표정한 얼굴은 다른 사람의 인상쓰는 모습보다 한참, 섬뜩하다.
세진은 이왕 이렇게 된거- 확실히 유치해지기로 결심하곤
바로 냉정한 얼굴로 말을 받아친다.
"저기- 미안한데, 내가 그때 너 왜 바람맞혔는지 이야기해주고 싶어진다.
그냥 니가 싫었어- 그냥 짜증스럽더라고- 완전 짜증나는 타입...
니가 얼마나 거절을 못 알아듣던지-
그런걸 질척거린다고 하는거야..
너보다 한참 예쁘고 고운 내 친구한테 사실 그냥 친구면서
예비 시누이처럼 딱딱대는것도 완전 비호감.
그래서 그랬어-
그리고 사실 나 일주일 뒤에 안가-
그냥 너랑 또 마주치기 싫거든 , 약속 잡고 만나긴 더 싫고-
그런데 니 표정보니까- 그리고 니가 그렇게 환한 얼굴로 전하는 이야기 보니까
꼭 얘기해줘야 겠다 싶네-
넌 여전히 꾸준히 별로라고- 꾸준히- 싫기도 참 쉽지 않은데 말야"
"뭐.. 뭐라고?"
진혜주의 얼굴이 불이라도 난듯 새빨개진다.
그러곤 진혜주의 손이 올라온다. 세진은 한번에 그 손을 막아낸다.
그리곤 세진이 귓가에 속삭인다.
"한번만 더 장하임 씹고 다니다 나한테 걸려-
그날은 그냥은 안 끝나 , 알았어?
그때는 명예실추로 법정에서 만나던지- 민형사로 엮이게 될꺼야-
그리고- 너처럼 화장 떡칠안해도- 하임인 여전히 예쁘더라, 화장 좀 작작해 - 어차피 덮는다고 달라지지도 않을 얼굴
화장품 값 아껴서 아프리카 아이들 후원하면.... 천국은 가지 않겠어?
넌 많은 뒷담화를 하고 다녀서- 특히 더 신경써야 할것 같은데....... "
세진은 그렇게 얘기하곤 언제 그랬냐는듯 생긋 웃는다.
생글생글.. 원래의 얼굴처럼 말이다.
"더티하게 뒤에서 남 씹는건 그만 둬- 사람이 왜 사람인데- ? 발전이 있어야지-
그럼-"
얼굴이 펄펄 끓는 진혜주을 두고 세진은 말 없이 뒤로 돌아간다.
어디 어설픈 여우같은게 까불고 있어
나 유여우야 니가 여우면 난 구미호급이라고
어디서 까불고있어-
세진은 말 없이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선다.
그리곤 자신이 유치했단 생각에 좀 부끄럽긴 해도-
하임이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건 참을수 없었다. 나도 아직 한참 덜 자랐네....
바보멍청이같이 , 그런거에 일일이 상대를 하다니..
세진은 다시 매연 가득한 길로 나서고- 시간이 남은 김에 좀 걷기로 한채- 더운 날의 길을 걷는다.
-
강비서는 회사의 일을 마치고 출국 준비를 마쳤다. 대충 짐을 싸서는 마지막 여러가지 일을 정리하러
지혁의 집으로 향했다.
샤워타임도 아니고- 그냥 눌러도 될것 같아, 강비서는 집의 벨을 눌렀다. 한번 눌러서 답이 없기에 연거푸 눌렀다.
5번이나 누르고 나서야 지혁은 느지막히 문을 열었다.
몹시 귀찮다는 듯 툭 말한다.
"비번 알잖아- 그냥 누르고 들어오지"
강비서는 씩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전에 그랬을때 저한테 뭐 던지셨잖아요- 정신이 있네 없네 하시면서-"
"......."
그러다 지혁이 손으로 머리를 긁고
강비서는 지혁의 손에 난 벌건 물집 난 상처를 발견한다. 자세히 보고는 펄쩍 뛴다-
"자 작가님!!!!!! 손에 왜 이런 상처가!!!!!!
아이고... 이게 뭐에요 제가 자리 비운지 얼마나 됬다고
이럴때 마다 매번 요렇게 다치실 꺼에요? 이 상처 어떤 일로 생긴거에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티슈로 상처의 진물을 닦아내며 한마디한다.
"벌이야- "
"무슨 벌이요?"
"물보라를 일으키고- 호수를 바다로 만든 벌-"
지혁은 여전히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눈은 자신을 명확히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생각에 잠긴 듯, 뭔가 너머를 보고 있는듯한
의뭉스런 눈길-
강비서는 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비행기 타기 전엔 쉬긴 그른거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