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입을 뗀건 지혁이었다.
"...... 그렇게 느끼잖아 , 그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소리야
남의 슬픔을 내 슬픔같이 느끼는거.. 그거 되게 바보같은 거거든..
그래 내 상처는 커- 때로는 상처 없는 부위를 더 찾기 힘들지.
그런거까지 다 당신이 왜 공감하는건진 몰라도, 그러진 마-
힘들어질 뿐이지"
지혁은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의 잔을 들었다.
하임은 왜 자신이 이걸 공감하는지 맘속에서 외치는 소릴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말 해선 안될 사실이었다.
지혁이 눈치챈다면 도망칠 것이다. 그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러하듯
나비가 바람결에 날아가버리듯 그럴것이다.
하임은 입을 다물었고 , 그는 말 없이 하임을 응시했다.
"지금은 ......... 나도 복잡하거든 새로운 정보가 잔뜩 들어와서
좀체 그럴일 없는 상황인데 말야.. 늘 같은 자리에 있기에 미칠거 같은 일이지..
새로울 일은.. 이제 없을줄 알았거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지혁은 말을 끝맺었다.
하임은 맘이 속상해짐을 느꼈다.
하임은 병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하임의 손 위로 다른 손이 올라왔다.
"당신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천천히 마셔..."
지혁이 잔을 드는 하임의 손을 잡고 이야기 했다. 하임은 그렇게 손을 잡은 지혁의 손을 살짝 뿌리쳤다.
지혁은 손을 황급히 땠다. 그러곤 한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하임은 눈으로 말갛게 쳐다볼 뿐이었다.
"........."
"벌써 취했어?"
지혁이 하임을 살핀다 하임은 말이 없다
그러더니 한잔을 더 따르더니 성급하게 꿀꺽꿀꺽 마셔버린다.
"아뇨 - 됐어요 빨리 마시기나 해요-"
지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에서 그늘이 비쳐왔다. 속눈썹 때문인지.
아니면 슬픔 때문인지도 몰랐다.
"빨리 마신다고 해도 내가 취할일은 여간해서 없을꺼야-
결과야 어찌됬든- 어떤 마음에서 당신이 날 도와주는 거든
여튼 고마운건 사실이야- ..모든걸 잊고 싶은 날이.. 누구에게나 있잖아"
그의 전매특허인 담백한 칭찬이 또 내 맘을 흔들었다.
금방전에 자신의 상처에 개입하지 말라고 해 놓고서
또 금방 칭찬으로 나를 당기고 있다.
마치-
장하민씨의 솜씨로 줄이 그어져 있던 제인에어의 한 대목 처럼..
이 남자의 갈비뼈 어귀에 내 갈비뼈 밑의 끈이 달려있는것 마냥.
아니.. 내 갈비뼈에 달린 그 끈을 이 사람이 손에 쥐고 있다는게 맞겠지..
이 사람 가슴의 끈은 이 사람 말 대로 라면... 장하민양이 쥐고 있을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늦은 나이에... 아니.. 짝사랑을 하긴 늦은 나이에... 이런 사람에게 빠지고 있을까.
멍이 들었어도- 눈이 부어도- 이사람의 청초한 느낌을 난 미워 할래야 미워 할수가 없달까.
가시 바짝 세울때와 달리 알콜이 조금 들어가자 조금 느슨해진 그 모습이....
...
나는 술보다 그 사람에게 취하는것만 같았다.
왠지 모르게 분했다. 심지어 나를 여자로도 안 보는듯한 이 남자가
왠지 얄밉게만 느껴졌다. 한발짝 다가가면 도망가고.. 안전거리에서 벗어나면 그러지 말라고 꼬박꼬박 언질을
하는 이 남자가 얄미웠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 말을 이었다.
"당신 상처도 내 상처 못지않게 큰것만 같은데 .. 당신 상처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마
상처는 주로 그런 부주의에서 덧나니까...... "
그의 무심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다고 느끼는건 내 환상일까.
마음이 복잡해져서 벌컥벌컥 마셔대는 술은 이미 내 주량을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세진이랑 마실때랑은 달랐다. 어찌되었건- 정신줄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니까.. 세진이랑은 내가 팍 풀어져도
엎어져 자도 상관 없었지만.. 이 남자가 내가 갑자기 잠들면 얼마나 곤란할까...
하임은 기를 쓰고 버티고 있었다.
-
지혁은 하임의 눈을 보고있었다. 이 여자는 아무래도..
지금 취하는 건지.. 아님 졸리는 건지..
억지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 하다.
지혁은 속으로 하임의 잔 수를 셌다.
맥주 4캔...조금 넘었던가?.. 참 쉽게도 취하는 군..
급하게 마시고 , 빨리 취하네..
이래서야 뭐 , 나 취할때까진 기다리지도 못하겠네..
지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망각하고자 술을 먹었으나..
자신은 너무나 말짱했다.
이 여자앞에서 긴장을 좀 푸는건
술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다.... 이 여자 앞에서 조금만 방심해도.....
난 말이 많아지고
바보같을 정도로 허술해지고..
빈큼을 보이고
조급했던 성미가 다소 여유를 찾게된다.
그래선 안되는 거란거 알지만..
이 여자가 나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게..... 의외이지만...
이 갈빛눈이 나를 흔들림없이 향하는걸.. 조금 즐겼다... 그 즐김에 따라 죄책감이 둔탁하게 맘을 내리쳤지만..
그럼 안되지만 즐거웠다.
장하임이 슬슬 꼬이는 혀로 한마디를 더 했다..
"당신이란 사람을 다 알수가... 있긴 할까요 내가?"
지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길을 기어이 끝까지 올거야? 먼 길이 될테니.... 오지 마 그냥...
내가 알려주는 만큼만 알면... 되잖아. 우리 친구하기로 했으니까.. 그정도면 충분하지.."
"...."
하임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문장이 아닌 단어를.. 점점 단어를 내 뱉기 시작했는데
지혁은 이 강단 넘치는 여자가 이토록 술에 약하다는게 놀라웠다.
"얄미워 짜증나... 뭐야... "
궁시렁궁시렁 그 와 중에도 술잔에선 손을 좀체 때질 않았다. 맥주 4캔에 이정도 솔직함에다
이정도 취하는 여자라니... 기대 외의 일이었다. 땍땍거리는 걸로 봐선
보드카 한병도 끝장 낼 여자로만 보였는데.....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오늘의 고통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가려고 슬슬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물속으로 돌아 가려면 쉬었던 숨을 폐에서 다 끄집어 내야만 했다.
그래야..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지혁이 하임을 말 없이 응시했다. 하임은 그 사이 맥주를 좀 더 마셨다.
눈꺼풀이 속수무책으로 무거워 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하임이 지혁의 손을 잡아왔다. 지혁은 깜짝 놀랐다...
손은 지나치게 따뜻하고- 작았다.
확 빼려는 찰나.. 하임과 눈이 마추쳤고.. 하임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든 듯했다.. 슬슬 말이 줄어들때.. 이럴꺼라 예상은 했지만...
지혁은 잠시 그 손을 자기 손위에 그대로 얹어 둔채... 그래선 안 되지만
...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잡은게 아니라.. 살아 숨쉬는 어떤이가 자신의 손을 잡은것을
잠시...
그 따뜻함을... 눈을 감은채 그대로.. 있었다.
"장하임-"
낮게 불렀지만 여전히.. 이제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모양이었다.
지혁은 안쪽의 하임의 방을 보았다. 거실에 둘까 했지만... 방이 그러기엔 너무나 가까웠다.
살짝 손을 빼고 하임의 쪽으로 가서 하임을 업었다. 하임은 힘 들이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그때 그 남자로 오해한건지 뭔지 무방비하게 업혀왔다. 생각한 거보단 가벼웠다.
어린 여자애들이 쓸법한 로션 냄새가 났다. 안 업을수 없어 업었지만.. 왠지 지혁은 자신이 잠든 여자에게
나쁜짓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식탁에 엎드린 채로 놔 둘수야 없으니까...
그랬지만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하임이 깨지 않도록-
방은 생각보단 깔끔했다. 나이트 스탠드가 있기에 그걸 살짝 켰다. 침대의 이불을 들추고 눕혔다.
방에서도 그 로션 냄새가 났다. 아침의 장하임이 몰고오는 향기 같은것... 그런 냄새였다.
하임은 푹 잠든듯 발치의 이불을 톡톡 차냈다. 하임의 턱없이 작은 발이 쏙 드러났다. 슬리퍼가 툭 떨어졌다.
지혁은 망설이다가..
지혁은 잠시 침대에 앉았다. 그러곤 하임을 바라봤다.
하임은 옆의 잔머리에 땀이 배여있었다. 말없이 하임이 확실히 잠든것인지 확인 한 뒤
그 잔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의식하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게 그리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나쁜가봐- 당신과 더 가까워 질순 없는데...
다가설수도 없으면서, 다가 오게 하지도 않을거면서...
그래도, 당신이 나를 놔두고 다른덴 가지 않았으면..좋겠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주고 그저 동정만 하는 내 아픔을....
당신이 그래도 알아 주면 좋겠어.. 당신은 알아 주었으면.. 좋겠어..
당신한테.. 자꾸만 다 말해버리고.. 울고싶은데..
그래선 안돼 , 나는..
이렇게.. 아픈 날에는 더 그렇다. 바보같이...
왜 당신이 자꾸 , 내 상처를 파고드는게... 다른 사람처럼
미치게 싫진 않은건지... 하루가 지날수록 더 그래.. 그럼 안되는데 나는..."
그리곤 또 한마디를 덧붙인다.
"몰랐으면 좋았을꺼야.. 당신도.."
지혁은 어두운 불빛에 비춰오는 하임을- 훔쳐보지 않고 그제야- 똑바로 바라볼수 있었다.
아침에 그러하듯
서로가 그러하듯
훔쳐 보지 않고 -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나한테 다가올수록 , 당신도 아파질꺼야
내 감정에 이입하면 이입할수록
당신도 고통스러워 질꺼야-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당신도 떠나버리고 싶어 질꺼야-
만날 때 마다 나를 안 미워할수가 없을꺼야..
그러니 이대로 이 자리에 있어... 그럼 다치지 않을꺼야..
내가 가혹한 일에 시달린다고 해서.. 당신까지 내 친구가 되고 싶었단 이유로
그러면 안되지 않겠어?....
가끔- 이 정도 위로면.. 난 충분해-
내일이면 다시 당신에게 차갑게 대하도록 노력할 테지만 말야..."
지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임의 볼을 스쳤다.
지혁은 그 따뜻함에.. 회한과 함께 죄책감도, 함꼐 느꼈다.
그리고 하임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 여자가 내게 어떤 감정을 품는지 어렴풋히는 , 알꺼 같았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하지만 난 영원히 모르는셈.. 쳐야만 한다..
지혁은 하임의 볼을 감싸다가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잘자 장하임. 고마웠어"
침대에서 일어난다. 방 문을 밀어- 닫는다.
...
그러고선 집 문을 살짝 열고 밀어 닫았다. 다시,
물 속으로 -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잠시 서서 숨을 내 뱉어 본다- 그리곤 오늘 낮의
그 남자를 떠올린다.
그 당당하던 눈동자를.. 묘하게 빛을 반사 시키던 그 눈동자를
복도에는 정적이 맴돌고 불 켜진 전등 아래 날벌레들만 몇마리 날고 있을 뿐이었다.
지혁은 남은 숨을 다 뱉듯이.. 또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