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2.
함안에 근상이를 내려준 문도는 다시 남해 고속도를 올라타고 부산 방향으로 한 시간쯤 달렸다.
`어휴, 두 시가 다 돼가네? 고모님 많이 기다리시겠다.’
시계를 본 문도가 점심 차려놓겠다던 고모 생각에 투싼의 가속기를 밟았다.
-띠리릭, 띠리릭
그때, 문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예, 고모님. 거의 다 와 갑니다.”
-“그래? 잘됐네. 지금 강철이가 와있다.”
“예? 강철이가요? 하하. 그 녀석, 제가 오는 줄 어찌 알고 왔대요?”
-“알고 온기 아이고, 오랜만에 인사하러 들렀다가 네가 온다는 소리 듣고 빨리 오면 만나보고 갔으면 하네.”
“아, 그래요? 한 이삼 십 분 내로 도착하니까 꼭 보고 가라고 하십시오.”
-“그래. 국 다시 데워 놓을 게. 조심해서 얼른 온나.”
고모와 통화를 마친 문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장님이 무슨 일로 다시 부산에 내려오라는지, 궁금해서 표정이 매우 굳어 있었다.
“루룰루 룰루~ 루룰루 룰루~”
문도의 입에서 갑자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히트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인 `백학(cranes)’의 곡조를 닮은 노랫가락이다.
`강철이 짜식, 많이 변했을까? 지금은 뭘 하고 지내지?’
문도의 무심한 눈동자 속에 십여 년 전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뭐라꼬? 학급 짱한테 놀림을 받았어?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단 말이가?”
강철이가 눈을 부릅뜨고 문도를 노려봤다.
“가만 안 있고 어째? 나는 내 혼자고, 그 새끼는 반 아들 얼추 절반이 똘마닌데. 서너 명이면 모를까?”
문도가 무안해서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김해에서 중학교를 마친 문도는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하숙 생활을 했다. 그런데, 급우들이 김해 촌놈이라고 놀리고 왕따를 시켰던 것이다.
한 달 만에 김해 고모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왔을 때, 원생인 친구 강철이가 그 얘기를 듣고 버럭 화를 내며 흥분했다.
문도는 중학교부터 고모가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김해의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강철은 문도가 맨 처음 사귄 고아원생 동갑내기 친구다. 강철이는 덩치도 문도와 비슷했고 싸움도 잘했다.
고아원에는 코흘리개부터 고등학생까지 20여 명의 원생들이 있었는데, 강철이는 고등학생 두 명을 제외한 원생들의 대장이었다.
원장인 문도 고모의 부탁도 있었겠지만, 강철이는 부산 영도 섬에서 골목 대장이었다던 문도가 마음에 들어서 친하게 지냈다.
“야, 문도야. 돌아가면 다음 일요일 날 그 짱을 좀 불러낼 수 있겠나?”
“응? 왜? 일대일로 맞짱 한판 붙으려고?”
“그래! 안 그러모 그 새끼들이 일 년 내내 니를 괴롭힐 거 아이가? 내가 함 떠서 완전히 개 박살 내놓을 거니까, 약속 함 잡아봐라!”
그래서 강철이는 다음 일요일에 중학생까지 포함해서 싸움 좀 하는 조무래기 원생 몇 명과 함께 부산으로 몰려왔다.
문도의 반에서 짱 노릇하던 `불곰’이라는 녀석도 똘마니를 예닐곱 명이나 데리고 나왔다.
문도가 똥통 학교라고 불렀던 자기 고등학교 뒤쪽 후미진 곳에서 두 패가 마주 보고 대치했다.
“야, 고문도! 쟤들은 웬 중딩이같은 아~들이야? 응원부대냐? 흐흐.”
불곰이 어이가 없는지 혀를 내밀고 으르렁거렸다.
불곰은 삼수했는지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아 제대로 다녔으면 3학년이다.
“네가 문도를 김해 촌놈이라고 놀렸다는 불곰이냐? 내는 문도 친구 되는 박강철이다. 내 친구를 놀리모 내를 놀리고 모욕 준 거나 마찬가지 아이가? 문도 대신에 사과 받으러 왔다.”
강철이가 당당하게 나서서 불곰을 째려보고 시비를 걸었다.
“그래? 초등학교 친구쯤 되냐? 대신 나설라모 불알친구쯤 돼야 자격이 있지. 그래야 내가 문도 대신 네 쌍방울을 만져주지! 안 그러냐? 얘들아. 흐흐.”
불곰이 뒤에 둘러선 똘마니들을 돌아보며 히죽거렸다.
“맞아! 얼른 손 좀 봐주고, 오늘 두 놈 바지 벗겨서 쌍방울도 닮았는지 한번 구경해보자! 히히.”
불곰을 둘러싼 똘마니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조롱을 했다.
“거들먹거리지 말고 일대일로 맞짱 함 뜨자! 내는 김해 덕혜고아원 대표로 왔다. 만약 내가 지면, 바지 벗을 게. 대신에 네가 지면, 앞으로 문도를 내 대신 형님으로 깍듯이 모셔라! 됐나?”
강철이가 조금도 기죽는 내색 없이 앞으로 썩 나서며 도전장을 던졌다.
고아원이라는 말을 들은 똘마니들은 갑자기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조용해졌다.
불곰도 움찔하더니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폼을 가다듬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래? 문도가 고아원 출신이었더나? 진작 말하지, 새끼. 마, 우째 됐거나 좋다. 그러자. 야, 너그들! 내 말 없이는 함부로 나서지 마라!”
불곰이 제법 나이 든 값을 하며 제 수하들에게 주의를 줬다. 제 딴엔 어디서 좀 놀아 본 모양이다.
불곰이 웃통을 벗어 건네고 주먹 쥔 양팔을 웅크려 근육질의 우람한 몸통을 과시했다.
폼만 잡으려고, 무술 도장이 아닌 보디빌딩 하는 육체미 체육관에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답게 나와서 마음에 든다. 한 입에 두 소리 하지 말기다, 이얍~!”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철이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불곰의 아래턱을 단화 발로 갈겨 찼다.
어디서 구해 신었는지, 낡기는 했지만 가죽으로 된 단화 구두 코라, 운동화보다는 충격이 컸을 것이다.
“으윽! 이, 이 새끼.”
순식간에 급습을 당한 불곰이 뒤뚱거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는데, 붉은 핏자국이 배어난다. 제대로 맞아서 앞니가 나갔거나 입술을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강철 형, 파이팅~!”
덕혜 고아원 조무래기들이 고사리 주먹을 쥐고 흔들며 응원을 해댔다.
둘러서 구경하던 불곰의 똘마니들은 얼굴 색깔이 새파랗게 질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프냐? 그럼 빨리 덤벼, 이 새끼야!”
강철이 정권 박힌 주먹의 손가락을 오므리며 수비 자세를 취했다.
“끼야압~!”
순간, 불곰이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뻗고 강철에게 달려들었다.
슬쩍,
-휙, 휘릭~ 퍽!
강철이 잽싸게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무릎으로 불곰의 팔목을 걷어 올리는가 싶더니, 연속동작으로 다리를 뻗어 불곰의 코밑 인중 급소를 가격했다.
“끅!”
-풀썩.
달려들던 불곰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땅바닥에 얼굴을 쳐 박고 뻗어버렸다.
그날 이후 문도는 오히려 불곰의 보호를 받으며, 그 유명한 부산 똥통고등학교에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2학년이 되어 태권도 공인 2단이 되고부터는 3학년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명실상부한 학교 짱이 되었다.
**
“오늘도 슬픈, 밤하~늘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네~”
핸들을 손가락으로 토닥거리며 모래시계의 주제곡 크레인(crane) 노래 가락을 허밍(humming) 하는 문도의 잘 생긴 눈가에, 안 어울리게 서글픈 이슬방울이 맺혔다.
동김해 IC를 빠져나온 투싼은 북진하더니 잠시 후 분성산 동쪽 기슭에 있는 김해시 어방동의 어방초등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분성산 끝자락과 어방초등학교 서쪽 담장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저만치 우측 길가에 조그만 연못이 보이고 연못 위 언덕바지에 길쭉한 단층 기와지붕 건물이 보인다.
연못을 지나자 큰 바위로 된 입석 표지판이 우뚝 서있고, 음각으로 새겨진 `성덕암’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문도 고모가 운영하는 지금은 `덕혜보육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이 원래는 `성덕암’이라는 암자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