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친절한 그림자씨.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이 그런사람이라는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닌, ‘바란다’는 의미의 미소가 피식거리다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평소와 같지 않은 세희의 표정과 행동. 혹시 내가 말을 잘못한 건 아닌가 싶어, 세희에게 무슨 소리인거냐고 물어보았다.
“응? 무슨 소리야?”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을 순 없었고, 아까 만해도 반전 상태였던 세희의 감정 속 장르가 내 물음 이 후로 평소와 같은 느낌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히죽대는 표정. 설마 아까말도 저 히죽스러움에 전부 포함되어있었던 걸까.
세희가 무서운 표정을 지은게 전혀 아님에도, 저 웃음의 의미를 알아챈 몸은 피부를 통해 닭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표정을 눈치챈 세희가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 눈썹을 들썩였다.
“물어봐주니까 대답해줘야지~ 정말 둘이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뜻 이랄까 흐흐”
“..?!!”
..내가 느꼈던 세희의 반전된 표정이 정녕 저 말에 대한 떡밥이었단 말인가.
이번엔 내 심장이 반전되었고, 눈 앞의 반짝이는 세희를 보며 당황함을 잔뜩 머금은 채 움직임의 박동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약간 물러선 스스로의 모습에, 세희가 다가와 한 술을 더 얹었다.
“방금 대화 속 내가 반장이라고 생각하고 말한 거 맞지?”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말도 안되는 전개에 회로가 꼬여버린 내 뇌는, 반박할 틈도 비워놓질 못했다.
‘맞구만 맞구만’거리며 마음 속으로 공론화 시키는 세희의 끄덕임을 말릴 여유조차 멍한 표정에 가두어버렸는지, 내 몸은 마음 속 음성으로만 무슨소리냐고 소리칠 뿐 이었다.
한 참 고개를 끄덕이던 세희는,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며 눈을 번뜩였다.
저 번뜩임이 순수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건, 내 착각인 걸까.
“이럴 줄 알고 사랑의 티리팁팁! 아까한 말 그대로 전해주기!”
이번엔 사랑의 팁이랜다.
요상한 외국어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 세희의 단어 하나하나가 음산하기 까지 하다.
공부 팁이라면 두 손 공손히 감사하다고 90도 인사를 했겠지만, 팁이란 말이 들어간 것 치고 어째서 하나도 도움이 안될 것 같은 느낌이다.
“반장 많이 힘들어 보이시더라구? 이런게 빈틈찬스지.”
말의 의미와 어울리게 끝말부분은 행동까지 추가시켰다. 귓속말로 소곤대며 빈틈을 강조하는.. 세희라는 이름의 먹이를 문 야생동물.
허나, 나는 이런 팁은 알아봤자 사용하지 않을 것 같으므로 환불처리를 부탁했다.
“그런거 칼로리 낭비, 시간낭비, 정신력 낭비야..”
무려 3낭비까지 언급해 주었음에도 세희는 이 부분에서 한없이 긍정적이었다.
“아플때는 러브파워가 두루둡 두배!!”
내가 무슨말을 하던 눈을 반짝이는 세희. 당해낼 수 없는 레벨이라는 걸 깨달았고, 내가 말을 이으면 세희의 반짝임이 커질걸 알기에 러브파워 팁을 무시한 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세희에게 그런 생각 없다는 것을 어필했다.
..녀석이 없는게 편하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옆좌석을 마음껏 침범하면서.
나를 덮어주었던 신발님을 살포시 아래에 벗어놓은 뒤, 몸을 돌려 내 의자에는 다리를 올리고 녀석의 의자에 엉덩이를 두고 앉아 매우 편한 마음 상태를 세희에게 보여주었다.
“..?”
뭐하는 거냐며 갸웃거리는 세희의 고개.
행동만으로는 세희의 사고회로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행복한 마음이 잔뜩 담긴 말까지 덧붙였다.
“어머어머! 세상에! 허스키 사라지니까 자리가 침대잖아!”
“심지어 책상도 다 내것!”
녀석의 책상과 내 책상을 팔로 끌어안았고, 볼까지 부빈 뒤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포효하며 기쁨을 드러내주었다.
허나, 끌어안고 볼을 부볐던게 잘못이 었을까.
방금의 두가지 행동을 보자마자, 세희는 더욱 신난 히죽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세상에!! 껴안고 볼부비기까지!”
“잔장 빈자리가 그렇게 공허해?”
행동 몇 가지 잘못 한 걸로 원치 않았던 부작용. 부작용이 생겼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능글맞은 미소가 다 안다며 가까이 다가와 허스키를 언급한다.
“이해해. 이해해. 다~ 이해해♥ 얼른 가서 반장 불러올까?”
..아무리 노력해도 세희는 이길 수 없었다.
‘다른 의미로 세희는 멘사회원일거야.’
그렇게 실랑이가 끝나갈 무렵, 멍한 표정 속에 시간이 점점 흘러갔고 빈 옆자리를 채워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왔고, 거의 야자가 끝나갈 무렵, 세희는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신다며 자신의 자리를 떠났다.
“..으으으윽~”
한 번 기지개를 쭈욱 핀 뒤, 남은 시간 속에 앉아 멍하니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이기에 평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일까.
몰려오는 무거움과 피곤함에, 몸을 편하게 쉴 시간이 정말로 간절히 필요했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오늘 이렇게 피곤하고 복잡했지?”
내 의지로 명령하기도 전, 피곤했던 몸이 책상에 흐느적 달라붙었고, HP회복이 필요하다고 외쳐댔다.
평소보다 더 편안한 책상, 중력에 몸을 맡기며 퍼져가는 내 신체.
“아아.. 졸려어.. 책상.. 시원해애.. 아아.. 살 것 같다아..”
점점 몸에 힘이 빠져갔고, 중력 아래로 빠져나가는 긴장감들이 눈꺼풀까지 아래로 내려가도록 만들었다.
시야에 검정색 커튼이 펼쳐졌고, 나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검은 화면 속에 시계의 반복되는 초침소리가 들려온다. 공간속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부드럽고 편안하게 귀 주변을 훑는다.
반복되는 백색소음에 몸을 맡기고 숨소리를 편하게 들이마신 뒤 내쉬었는데, 똑같았던 바람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약간 열려버린 눈. 이내 다시 감으려 했지만 전부 감지는 못했다.
‘아..뭐지.. 나 진짜 졸린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신의 형태를 드러낸다.
“너, 쓸데없이….”
힘을 전부 빼고 있다보니, 정신이란 전구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기에 말이 들리다가 들리지 않는다.
몸 속에 숨어있는 스위치를, 평소에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형상조차 흐물흐물해져버려 내 의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집중하고 싶어도 집중되지 않는 몸상태였기에, 마음 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다.
‘미안한데, 잘 안들려….’
마음 속의 사과가 목소리에게 닿을 리 없었다. 목소리가 계속 의미 모를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한테 신경 쓰지마. 그럴자격 없....”
뭔가 슬픈듯이 아래로 내려간 음정. 무의식 속 나는 목소리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주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힘든 상태인거니까 스스로를 알아주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말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오라기 만큼 떠진 눈을 추스리며, 생각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똥싸네.. 내 마음이야.”
"뭔데 멋대로 내 생각 짚어서 얘기하는거야. 뭐든 내가 좋아서 하는거라고."
"나 때문에 슬퍼하지말란 말입니다.. 녜..에에.."
점점 빠져가는 힘과 목소리.
그런 모습이 귀엽다는 듯 첫번째 피식 소리가 들려왔고,
그렇게 말 할 줄 알았다는 두번째 피식소리도 공기를 기분 좋게 흔들었다.
방금 말했음에도 까먹어서 모르겠지만, 별로 좋게 말한 것 같진 않은데.. 왜 좋아하는거지..?
“남의 말 꼭 안듣더라. 바보가.”
멍하니 바보란 말을 계속 되뇌었다.
'바보..바보.. 꿈 속.. 바보..'
투명한 정신의 사이 틈,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때문이야.]
'...!!!!'
정말 바보 같았던.. 잊고 싶었던 기억이 상기되었다.
순간 속에 녹아있던 나는 한없이 작았고, 부족했고 바보같았다.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가 정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멍청하게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제발 부탁한다고 소리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은아이는, 아직도 이렇게나 바보같다.
‘맞아, 말 안 듣고 행동하다가 그렇게 되어버렸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 끝에 눈물 한 방울이 고이는게 느껴졌다.
눈물에 방울이 맺힐 즈음,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 가까이 체온이 느껴질 찰나, 감은 눈 사이로 들어오던 밝은 조명 빛이 잠시 가리워졌고, 다가오던 무언가는 살짝 떤 뒤 다시 빛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검은 빛 이 후 찾아온 불빛.
‘아..아아…’
온 몸이 저린다. 눈 앞의 모든게 굳어져 움직이질 않는다.
갑자기 그 사이를 뚫고, 그때 꿈 속에서 봤던 불빛이 내 눈 앞에 찾아왔다.
[무서워.]
[두려워.]
정신없이 흔들리던 마음 속 두려움이, 아까 빛을 가려주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피하고 싶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손을 움직이도록 만들었고, 가까이 오려다 제자리로 돌아갔던 그 물체를 탁 하고 잡았다.
놓으면 빠져나갈 것 같아, 가지말라고 말했다.
“안돼.. 제발.. 그대로 있어주세요.”
내 말과 동시에 잡았던 그림자가 움찔거렸고, 동시에 두근거리는 박동소리가 잡은 손에 스며 들어왔다.
잠깐 반항하던 그림자는, 떨리는 내 손을 눈치챘는지, 나에게 잡힌 그대로 다가와, 아까처럼 다시 눈 앞에 그림자를 드리워주었다.
찾아온 장막. 보여졌던 두려움의 형상들이 사르륵 녹아내린다.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불안한 풍경을 스르륵 덮어준다.
성급함을 멈추는 숨소리와 박동의 움직임이, 내 긴장감을 빼 앗아갔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림자는 계속 움직이는 것 같은데, 이젠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야.”
“..자는거.. 맞냐?”
‘미안해, 하나도 안들려..’
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허공의 감각 속 그림자씨가 가까워지는 건 느껴진다.
“자리 안 바꾸면.. 안 되냐.”
눈 앞에는 검은 화면 뿐.
그리고 그림자씨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것 같은데.. 안 들려.
‘안 들..리는데..’
잠깐의 정적. 들리지 않고 흩날리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거짓말이야.”
바람속에 숨긴 조그만 말이었기에, 내 귀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날 생각해주는 예쁜 마음이 담긴 말이 었겠지.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 쉬는 시간. 무슨 말 이었든지 옆에 있어준 그림자씨가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친절한 그림자씨.’
..숨소리에 행복이 담긴 흔들림이 섞였다는건, 그림자씨도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