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욕쟁이(1)
“….”
“….”
주체할 수 없이 퍼져나가는 정적의 안개. 혹시 내 말을 못 알아 들었나 싶어, 추가 설명을 덧 붙여 주었다.
“음.. 이런 날 만난것도 그지 같은 악연.. 아..아니 인연이니까 잘 지내보자.”
“그런 의미로 같이 가는거야. 어떠니?”
이번엔 정말 순수한 친구의 의미로 미소지은 뒤 손을 내밀었는데..
두부녀석이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
허공에서 바람과 악수하고 있는 내 손바닥이, 외롭고도 쌀쌀한 공기를 맛보고 있다.
‘아니,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민망함을 내뿜고 있는 나에겐 눈길 조차 주지 않는 저 매정한 빨간머리. ‘뒤통수나 따가워져버려라’ 라는 심정으로 뒷모습을 계속 째려봤는데, 두부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내 째려봄을 알아차린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약간 미안해질 뻔 했지만.. 그러긴 커녕, 녀석은 멈춘채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수첩 위에 무언가를 적어내리는 걸 보니. 숙제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내 말은 안들리고.. 네 할 일만 눈에 보이냐?’
그러려니 넘어갈 뻔 한 순간이, 나 스스로를 없는 취급했다는 의미가 숨겨졌다는 걸 알아채고 빠르게 불길의 화력을 높였다.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보글거림과 달리, 이 순간에도 녀석은 무표정을 지은 채 수첩에 무언가를 계속 적어내려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건지, 글을 적는건지, 외계어를 쓰는건지.. 뭐든간 의외로 섬세하게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저렇게 섬세하게 하는게 또 뭐가 있겠는가.
보나마나 숙제를 안 해와서 지금에서야 하는게 분명하다.
..음, 딱히 내가 전에 걸어가면서 숙제 한 적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린 건 아니다.
대놓고 큰 소리를 높이고 싶었지만 그 만큼의 용기는 없었기에, 작은 생각 용기를 가져와 맘에 안 든다는 표정과 함께 마음 속 공명을 흘려보냈다.
‘..하! 숙제는 하고 싶으셨나 보죠?!!’
‘외로운 승냥이 한 명 길 좀 가르쳐줄 생각은 하나도 못하고 그런거 할 시간은 있다 이거여요?’
‘물론 길 잃은 건 내 잘못이지만 아무리봐도 얼척이 없네요?’
길은 잃었고, 그나마 지나가는 사람은 저녀석 뿐인데.. 구원의 손길은 커녕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은 나는..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음 속 생각 용기가 생각보다 더 작은 용량이었던 건지, 여러감정들이 흘러넘치다 못해 용기를 조금씩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피부 끝으로 빠져나오던 말들이 결국 입술을 통해 내 뱉어진다.
“에라이 똥Gae자식아!!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에라 치사한 놈!!”
온 힘 다해 부르짖은 내 음성이 닿았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이 내 쪽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눈동자에 붉은 렌즈가 덧입혀진 것 같다. 눈 속에 숨은 붉디 붉은 화염이 나를 뚫는 것 같이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 반응해 나도 모르게 위축되버린 몸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했다.
‘헐.. 무서..’
허나, 나는 이 정도로 꼬리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조그만 도발하나에 굴해버리면 저 아이를 볼때마다 이런 느낌이 될 게 뻔하기에.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리지 말자’를 반복해 다짐했다.
‘아..아냐 안 무서워 짜식아!!’
‘하..한번 밑보이면 끝까지 밑보이는거야.’
‘이왕 찍힌거 어쩔 수 없잖아?! 대들기라도 해야 안 억울하지!’
나를 바라보는 저 이글이글 눈빛. 어딜보나 찍힌게 확실한 것 같다. 뭘해도 날 나쁘게 바라볼 거 라면, 할 말은 해야 덜 억울할 것 같다. ‘기분 나빠져라’ 라는 도발의 의미로 메롱을 남발하며 맹수의 수염을 자극했다.
“째..째려보면 어쩔건데!! 붸붸붸!!”
눈빛에 대한 반항을 말로 풀어보았는데, 녀석은 말이 아닌 인상구김으로 답을 이어가 주었다. 하지만 난 이미 무서운게 없는 몸. 녀석이 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이상, 내 고삐는 최선을 다해 날뛸 수 밖에 없었다.
“꼭 지각해라!! 가다가 쿵 하고 넘어져라!! 아야해라!!”
목소리에 힘을 주며 저주를 퍼붓는 내 모습에 약간 쫄았는지, 두부가 ‘저게 미쳤나’ 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다. 녀석도 곧 알게 될것이다. 두려움보다 악질인게 이상함을 머금은 존재라는 것을. 녀석도 이렇게나 악담하는 상대는 마주하지 못했을 터, 처음 서는 공간 속에선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뭘 쳐다봐!! 니가 어쩔건데!! 어!!”
잠깐의 미동. 이내 비웃음을 흘린 두부녀석은 수첩에 적던 무언가를 계속 써내려 갔다. 그러고보니.. 공부에 손 안 댈것같은 느낌이면서.. 심플한 저렴이의 필수품, 손 때 묻은 모N미 볼펜을 쥐고 있다. 왠지 모를 이질감에, 내 마음대로 생각을 전개해갔다.
“..뭐, 보나마나 필통 안 들고 다니면서 저거 하나 짤래짤래 들고 다니겠지 뭐.”
다 적은건지, 녀석의 손에 있는 볼펜이 찰칵 소리를 들려준다. 다음 행동으로 무엇이 펼쳐질까 싶어 긴장하고 있는데..
‘..뭐야.’
역시 나를 골려주려고 했던게 분명하다.
숙제를 마쳤는지,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다시 뒤돌아 걷고 있는 저 붉은머리 두부.
‘지금 혼자 길 안다고 여유 부린거야?’
‘와.. 사람 화나게 하는데 아주 재능있는 녀석이네?’
입술을 잘근 깨물고 다시금 도발어린 공격을 하고자 성대에 힘을 주었는데, 녀석이 갑자기 내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뭔가를 날리고 걸어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무언가가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허나, 나는 그 종이에 대한 궁금증보다 저 무표정 섞인 미소가 더 분했다.
“보나마나 쓰레기겠지!!”
“저런 자슥들 때문에 지구가 아파해요!!”
“너 때문에 토양오염이 심해지는거야!!! 나쁜 녀석아!!”
지구의 안부까지 걱정해가며 욕과 함께 신명나게 발로 바닥을 '쾅쾅' 치고 있는데..
진정하라는 듯, 녀석이 버리고 간 흰 수첩종이가 돌돌 구르더니 내 앞에 날아왔다.
"아. 그렇네."
힘없이 날아오는 이 친구를 보고, 한 가지 반성해야할 부분이 떠올랐다. 이 수첩종이는 죄가 없다. 나는 이 순수한 친구까지 무시해버리려 했던 걸까. 갑작스레 미안함이 올라와, 흰 친구를 집어들어 탈탈 털어준 뒤 묻어있는 잉크에 대한 의미를 살펴봐주었다.
또박또박 쓴 글씨. 빠르게 쓴 글씨치고는 정말 예쁜 모양을 지닌 글씨체다. 오른쪽 끝에 그려진 학교모양의 그림도 귀여움을 더 해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생각을 거듭하던 중, 밑에 써있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 지금에서 왼쪽, 직진, 왼쪽으로 가면 학교. ]
..라고 심플하게 적어져 있다.
“..아.”
생각이 멍해졌다. 대체 두부녀석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 인 걸까. 모든 행동들이 오해를 불어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건 내 고정관념이 나쁜 쪽으로 생각을 움직여버렸던 것 뿐인 걸까.
..멍해지다 못해 생각이 허공에 날아가고 있었다.
요즘 이런 식으로 생각이 비워지는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정말 속을 모르겠네..’
붉은 뒷모습을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지만, 언제 사라진건지 공간엔 한 조각의 흔적도 없이 바람만 불고 있었다. 멍해진 생각 속에 한 가지의 깨달음이 흘러들어왔다. 혼자 가라고 말은 나쁘게 했지만.. 결국 나는 녀석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었다.
‘뭐.. 일단 나쁜애는 아니란 걸까.’
숙제 하는 건 줄 알고 여유부린다고 비꼬아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나한테 길을 알려주려 했던거라니.
길을 알려주려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에 발끈해 나쁜 소리를 늘어놓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감정은 어떤 생각으로 메워져 있었을까.
“..미안하네.”
아까 욕했던게..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무들의 장막. 파르릇 소리를 내며 흐드러지는 나뭇잎들의 가락 소리. 이에 몸을 맡긴 나의 감각들이 한 폭의 비단자락 같은 시를 표현하고자 들썩이고 있다.
먹을 잔뜩 머금은 길쭉한 형태의 투명한 붓 하나가 공기를 타고 스르륵 자신의 그림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새들은 지저귀고
하늘은 나를 반겨주는구나.
모든 생명의 근원들은
인간을 위해 많은 힘을 주고 있건만..
뿌리깊은 생물로 부터 탄생한
이 사각물체는..
어찌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인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땅을 한 걸음 즈려 밟고 싶으나
어찌하여 이 사각이는 이렇게나 의심스러운고.
기분 좋은 미소를 담은 채 종이가 이끄는 방향대로 움직이려 한 발을 들어올렸지만.. ‘파짓’ 하고 다가온 의심 하나가 나를 감싸 안았다.
‘ 잠깐, 내가 너무 안일 했던건 아닐까? '
고맙다는 감정에 이끌려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메워지긴 했지만.. 앞 뒤 느낌을 따져보면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에도 문제가 존재했다. 침을 꿀꺽 삼킨 뒤, 종이를 다시금 살펴보았는데..
"..이럴수가."
처음 봤을때와 약간 다른 느낌이 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보니 이 종이.. 핀셋으로 집어야 할 정도로 욕쟁이의 기운이 가득하다. 의심 마땅한 독한 기운이 웅장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정말 의심없이 이 지시를 따라도 되는걸까.
진심을 다해 적어준 거라면 이렇게 생각한다는게 정말 미안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엔 확신이 부족했다. 10퍼센트의 가능성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버렸을때 곤란해지는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다.
“..이거 거짓말이면 어떡하지.”
선택의 중심이 세워지질 않고 있었기에, 일단 녀석에 대한 신뢰도를 살펴보기로 했다. 여러 단어들과 상황들이 조합을 거쳐 몇가지의 요점들을 결론으로 내밀었다.
일단 상황에 섞여있는 인물 프로필은.. 욕쟁이와 나.
마트에서 두부로 인해 서로를 마주한 구면이긴 하지만.. 오늘 포함해서 두 번 밖에 마주치지 않았을 뿐더러..
‘아까의 행동 좀 생각해봐.’
언급하자마자 아까에 대한 상황들이 눈 앞에 천천히 펼쳐진다.
잔뜩 구겨진 인상 속, 아무 생각없이 내 뱉어지는 나쁜 말들.
“ 웃지마, 더러워.”
“….”
“XSin도 아니고.”
“….”
의도치 않게 한 번 더 마주한.. 녀석의 표정과 말투.
뭐랄까. 두 배로 화나는 느낌이다.
어떻게든 좋게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호의적으로 이런 상냥한 종이를 건네줄 사람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