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생의 마지막 하루.
그날은 다른 날보다 일찍 서둘러 일어나는 그녀였다.
이제는 감각이 전혀 안 느껴지는 하얗다 못해 생기라는 것을 잃어버린 손으로 사랑하는 산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산이야. 일어나야지."
부시럭 움찔거리는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간지럽히며 현실 도피를 꿈꾸는 그녀였다.
그저 이 일상이 계속되기를…,
"엄마."
잠이 덜 깬 목소리의 산이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그녀에게 파고 들었다.
따스하게 자신을 감싸안은 그 아이의 온기에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고자 억지로 눈을 크게 뜨며 품 안의 따스한 사랑을 그저 쓰다듬는 손길은 슬프고 속상했다.
신은 왜 이리 가혹한 것인지.
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를 두고 죽으라. 온통 몸 안의 온기를 뺏는 잔인함에 그녀는 막고 있던 눈물을 가둔 댐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음…엄마 향기 좋다."
서늘하게 등줄기를 따라 박히는 소름.
서서히 짙어지는 죽음의 향기가 산이에게도 느껴지는 모양이였다.
병원에서 나와 온몸이 차가워지면서부터 맡아지는 신기한 향기, 패딩을 입고 온통 땀이 가득하여도 코끝에서 느껴지던 그 내음을 산이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
그녀는 단호히 산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으차."하며 아직 눈 뜨기를 거부하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화장실로 데리고 가더니 "변기 뚜껑은 반드시 올리고 볼일 보는 거야. 알았지?"라며 올려진 변기 뚜껑을 손으로 가리켰다.
볼일 다본 산이를 데리고 세면대 앞 거울에 서서 눈물 고인 얼굴에 애써 밝은 빛을 띄우며 "세수 할 때는 비누 거품을 충분히 내고 하는 거야. 해볼까?"라며 토끼 모양 비누를 건네주었다.
달콤 상쾌한 향이 그녀의 체취와 어울리며 산이를 포근히 감싸안고 있었다.
아침부터 출근 준비에 바빴던 엄마가 6일 동안 자신의 곁에서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못내 짜증난 산이는 "알았어. 알았다고!" 잔뜩 찌그러진 미간으로 비누 거품을 내어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런 산이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혈병으로 한참을 고생했던 아이가 건강한 것에 감사하자며, 신은 그를 만나게 하였고 자신의 목숨을 산이에게 준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서운함은 서서히 감사함으로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맞아. 날 죽여달라했지. 그랬구나. 내 목숨이 이 아이에게 간 거구나. 서운할 것도 억울할 것도 아닌 감사할 것임을 내 미처 깨닫지 못했네.’
그 생각이 확고해지니, 마음이 즐거워지며 산이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산이야. 치약은 꼭 뒤에서 부터 짜야 돼. 가운데부터 짜지말고…치카치카는…,"
"알았어! 위, 아래 어금니 구석구석 깨끗이! 엄마 참! 귀찮게. 일 안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걱정어린 엄마의 말을 그저 잔소리로 듣는 산이에게 수건을 건네며 "문지르지 말고 꾹꾹 눌러서 닦아."라고 끝까지 당부하는 그녀였다.
자신이 없을 때 혼자 감당해야하는 일이기에, 그녀의 당부는 울부짖음이자, 사랑이었다.
"학교가기 전, 알림장 확인, 학교갔다와서는 숙제하고 알림장 확인하고 준비물 미리 챙겨두고…금요일에는 오자마자 실내화 빨아야돼. 이따 학교갔다오면 엄마가 알려줄게. 할머니 말씀 잘듣고, 밥도 잘먹고 에어컨 바람 추울 수 있으니 가디건 꼭 챙기고…,"
"엄마!"
산이는 이제 화가 난 듯 한 말투였지만, 그녀는 세상 사랑스럽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 그만 해. 산이 옆에 없을 거야?"
심장이 저 밑 감정의 바다에 깊이깊이 내리꽂이고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자신의 눈앞에 화를 내는 조그마한 아이를 끌어안으며 거짓말하는 그녀였다.
"아니야. 있을 거야. 항상 옆에 있을 거야."
"에휴. 이 울보 엄마야. 그럼 이제 그만 해. 내가 아기도 아니고…,"
밥상에 앉아 의아하게 "니 엄마 왜 저런다니?"라는 할머니에게 모른다는 고갯짓 한번과 함께 수저를 들고 밥도 잘 먹는 산이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알림장 확인하더니, 크레파스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제 동진의 따스한 온기 덕분인지, 신의 배려인지 오늘은 많이 춥지 않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저 산이 옆에 앉아 반찬 올려주는 지금이 행복했다.
손을 흔들며 나가는 아이와 일터에 나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그녀는 그저께 쏟아버린 도시락을 다시 싸들고 구둣방으로 향했다.
보온도시락 가득 사랑을 담아, 자신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던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점심은 그저 행복이었다.
"은수 씨 요리 잘하네요."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사랑함을 심장에 가득 채워 도망가지 못하도록 자물쇠 거는 그녀였다.
자신이 천사가 되도 기억해야하기에 영원히 온마음으로 바라볼 것임을….
"동진 씨."
괜히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막으며, 촉촉해진 눈으로 웃으며 입가에 밥풀까지 묻히며 산이보다 더 정신없이 먹는 그에게 다가간 차가운 한 손은 밥풀을, 다른 손은 그의 뺨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 밥 먹다 아련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황당했지만, 그 눈빛이 너무 가슴 아파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숙인 고개로 식사에 집중하는 그였다.
그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은은한 빛은 점점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고 그녀에게 풍겨지는 더욱더 짙어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향기는 오묘하게 어제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와 하나가 되었던 그때가 일상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산이의 생명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기에 그녀는 그저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가슴 속에 담아가기 위해 눈을 떼지 못했다.
직모인 그의 성격 같은 곧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흩어보고, 부드럽고 하얀 피부를 손으로 쓰담아 보며, 밥을 오물거리며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의 맑디 맑은 눈을 마주보는 것으로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심장에 꽉 눌러 담았다.
"동진 씨, 오늘은 일찍 가 봐야겠어요. 우리 산이, 동진 아찌릏 좋아하는 산이랑 친구가 되어 주세요. 내일 봐요."
얼굴빛이 오늘은 따스해보이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얼굴에 닿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이리 왜…차가워요? 왜 따스해지지 않아요?"
정리한 보온 도시락을 들고 그녀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낼 봐요."라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뒤로 하고 학교 돌봄에 있을 산이에게로 향하는 그녀였다.
흐르는 눈물이 이제 많이 서럽지 않아, 합리화를 찾은 그녀는 어느새 도착한 돌봄 교실 앞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보물을 끌어안았다.
"보물 재밌었어?"
"엄마. 학교가 돌봄만 있었으면 좋겠어. 아…왜 공부해야지?"
세상 힘들다는 얼굴 표정에 황당함 가득, 그녀의 얼굴 미소가 퍼졌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하나 문 아이스크림이 따스해서 달콤함에 입안에 퍼지는 사랑스런 맛이 좋은 산이와 그녀는 잡은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노는 저 몸이 아팠던 아이에게 자신이 줄 저 작은 마음의 고통이 너무 죄스러워 그저 조여오는 가슴을 치고 또 치는 그녀였다.
잔인한 운명.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산이를 껴안으며 그녀는 피눈물이 흐르는 심장이 들킬세라 웃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산이 옷 벗어. 샤워하게."라며 따뜻한 물을 받는 욕조의 소리가 공허히 울렸다.
옷을 냉큼 벗고 들어간 산이를 두고, 어느새 아직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를 위해 된장찌개를 끓이는 그녀였다.
보글거리는 찌개를 멍하니 바라보다 "엄마 나갈래."하는 산이 목소리에 번쩍 든 정신으로 가스불을 끄고 온통 물장난에 엉망이 된 욕실로 들어갔다.
따스한 증기가 그녀를 감싸며 자신을 향해 물을 뿌리는 산이에게 놀라 "이 녀석!" 하며 달려드는 지금이 행복했다.
"샴푸는 손끝으로, 샤워볼에 비누묻혀 온 몸 구석구석"
가르칠 것이 많으나 시간이 없었다.
"잠옷 입어."
산이를 위해 나이별로 준비해 놓은 잠옷과 속옷을 펼쳐놓고 그녀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산이야. 내년엔 이걸 입는 거야. 봄가을에는 파란색, 겨울엔 빨간색 엄마가 저 서랍에 넣어놓을 테니 챙겨 입어."
말하는 그녀 눈에 고이는 눈물, 산이는 다가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갔다.
"이 바보 엄마. 내 여자. 그만 울어라. 마음 아프게. 산이 아기 아니라고. 형이야. 형 알겠어?"라며 자신을 끌어안은 그 아이에게 더 작은 마음이 된 그녀는 "응, 응. 내 남자 알았어."라며 고개짓을 하며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아침에 혹시 놀랠까, 밥 먹고 잠이 든 산이 곁에서 일어난 그녀는 책상에서 보험금 약관과 편지가 든 봉투를 들고 자신의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피곤함에 곤히 잠든 어머니 머리 맡에 봉투를 내려둔 그녀는 빠질 만큼 빠져버린 자신의 생명을 느끼며 그 곁에 쓰러지듯 누웠다.
감은 눈 사이 서서히 밝아지는 불빛.
환호어린 목소리들이 그녀를 감싸며 꿈속에서 들렸던 어른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다. 내 아가야."
그렇게 그녀는 그날 죽었다.
***
"왜 와? 니가 뭔데 감히 여기 와? 가! 오지 마!"
목발를 짚고 이미 화려한 꽃에 쌓여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도시락을 들고왔던 그 다음 날 나타나지 않던 그녀가 걱정되어 쫓아왔던 집, 마침 그곳을 머물다 갔던 지인으로 인해 그녀의 죽음을 알게된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그녀를 위해, 노력했던 걸음 걸음이 아무 의미 없어졌으며 그 마지막을 그녀의 부탁대로 찾아간 곳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쫓아와 그를 손가락질하며 눈물 가득한 분노어린 얼굴로 주저앉은 그를 향해 소리 소리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동진 아찌!"하며 달려오는 산이를 억지로 끌어 안으며 대성통곡하는 아이를 강제로 막고는 그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다.
"내 귀한 딸, 온갖 마음 고생 하느라 속이 썩어 문들어질대로 문들어진 이 불쌍한 내 딸. 혹시 기죽을까 모진 소리 퍼부었던 걸 가슴 속에 멍들게 만들려고 만났어? 내 딸이 저 사랑스러운 것, 얼마나 마음 고생했으면 화병도 아니고 냉가슴으로 죽게해? 한여름에 패딩입고 떨었던 그 아이 밀어내지 못해 그렇게 아프게 보내야 했니? 나타나지 마! 산이도 데려가려고 나타난 거니? 꺼져.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야. 삼촌! 저거 내쫓아 줘요. 저거 내 눈에 안 띄게 해 줘요."
다가온 검은 양복 속에서 그는 울고 울었다.
그녀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