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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 학교 입구 앞에서 플리마켓을 봤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겸사겸사 플리마켓을 둘러볼까 했는데 이게 웬 횡제야, 윤서가 보였다. 딱히 특별한 옷을 입지 않았는데 내 눈에는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윤서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첫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윤서는 내가 보이지 않았나 보다. 먼저 눈치챈 쪽은 윤서의 친구였다. 아직 윤서는 나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건가.
그래서 향초를 사준다고 했다. 향초를 보면 선물해준 내가 떠오를지도 모르고 그렇게 떠오르다 보면 언젠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토끼 향초는 윤서를 닮았지만 윤서보다 귀엽지 않아.'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했더라면 윤서는 미쳤다고 저 멀리 도망갈 것이 틀림없었으니. 기껏 좁힌 거리인데 다시 벌릴 수 없었다.
'향도 윤서와 어울리지 않고.'
여기 있는 어느 것도 윤서가 뿌린 향에 비해 잘 어울리지 않았다. 첫사랑 향수가 윤서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지 향초에서 풍기는 여러 향이 공기 중에 가득 섞였지만, 윤서가 뿌린 첫사랑 향수는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귀여워. 저런 면도 있었구나.'
마지막에 한 말이 부끄러웠나 보다. 나를 토끼로 생각할지 몰랐는데. 자신도 덩달아 부끄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결국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순간 마음이 통했다는 착각을 했으니까. 그래서 버벅거리며 로봇이 고장 난 듯 말을 하는 윤서가 귀여우면서 안아주고 싶었다. 품에 쏙 들어올 만한 체구를 가진 윤서는 당황한 시간 동안 표정이 풍부해졌는데 그게 윤서의 본모습이라면 일깨워주고 싶기도 했다. 무뚝뚝하고 냉정하면서 차가운 윤서의 모습도 좋지만, 감정이 풍부하고 활기찬 윤서는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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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는 노래를 부를 때면 늘 물이나 음료를 사서 갔다. 노래를 계속함으로써 생기는 건조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고 노래를 하다 보면 목마를 때가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나는 보통 물을 마시지 않았는데 민서따라 물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니까 목이 촉촉해져서 목 보호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민서를 뒤따라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현도 같이 들어갔다. 민서가 먼저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현은 활짝 웃었는데 현에게 관심이 있으면 껌뻑 넘어갈 만했다.
"왜? 윤서야?"
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봤는데 나는 짐짓 헛기침하고 외면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어디 아파? 목이 아픈 거야?"
"아니라니까. 빨랑 가자. 너도 노래 부르고 싶었구나?!"
서울은 모르지만, 이곳 대학가는 학생들을 위해 상당히 싼 값으로 동노를 운영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보통 천원에 세 곡이거나 시내로 가면 천원에 두 곡이었지만 여기는 달랐다. 2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시설이 조금 허름한 위층은 천 원에 8곡이었고 아래층은 천 원에 7곡이었다. 물론 4시까지지만. 하지만 그 이후로는 천 원에 6곡이었으므로 다른 곳보다 상당히 싼 가격임은 틀림없었다. 우리는 가장 싸게 부르고 싶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방 안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역시 여기는 빨리 와야 한다니까."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은 자리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여기도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비싼 동노로 가야겠지.
"정말 천 원에 7곡이야?"
현의 대학가에는 없었나 보다. 하긴, 서울 물가가 얼만데. 여기서처럼 운영했다가는 적자 나서 폐업했을 거다.
"응. 근데 4시 이전까지야. 다행히 지금은 4시 되기 10분 전이지만."
이러면 돈을 한가득 넣어서 오랫동안 부르면 된다. 4시 이전에 돈을 넣었으니 천 원에 7곡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안쪽에 자리 하나가 비어서 우리는 마이크 덮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부터 부를래?"
나는 현과 민서에게 묻고 마이크를 잡았다.
"부르고 싶으면 먼저 불러. 나는 곡 생각해놓을게."
현도 고개 끄덕임으로 대신 대답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때 내 애창곡이자 대학교 1학년 때 나온 역주행 곡을 선택했다. 곧이어 노래 전주가 흘러나오고 화면에서 숫자가 3, 2, 1이 뜬 후에 노래가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부르던 노래였으니 가사를 보지 않고도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딴생각이 났는데, 예컨대 이 곡을 알았던 시기나 노래에 있는 내 과거 생각났다.
'그때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갔었지.'
점점 감정이 고조되는 구간을 부를 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연수 선배와 함께 동노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어갔다.
'늘 이 구간일 때 생각나는 건 왜일까.'
사실 이 노래도 오랜만에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노래방 갈 때마다 다른 노래만 불렀으니까. 이 노래 제목은 꺼내지도 않았다. 이제 시간도 꽤 흘러갔고 선배에 대한 마음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
나는 본래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돌도, 가요도 좋아하지 않았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갇혀 화면과 번쩍거리는 정신 사나운 불빛들을 보는 것도 싫었다. 고요하고 밝은 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걸 더 선호했기 때문에 노래방은 악마의 도피처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 동아리 사람들이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노래방에 가려고 했을 때 나는 빠지려고 했다. 연수 선배도 가기 전까지 말이다. 민주도 물론이고 유진이도 간다고 했던 데다 민주가 나를 설득했다.
"같이 가자~ 너랑 같이 노래방 가고 싶었단 말이야. 노래방 가는 거 싫어해? 저번에도 빠졌잖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극혐하는 것까진 아니라서 한 번쯤 가도 상관없었다.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게 문제였긴 했지만.
"그래. 가자."
옛날 노래 한 곡 부르고 탬버린 치면 되겠지.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라는 걸 알아야 했다. 친절한 동아리원들은 노래를 잘 안 부르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왜 안 부르냐, 불러보라며 번호 누르는 기계를 줬다.
"생각 좀 해볼게요. 옛날 노래라도 상관없나요?"
"상관없어. 부르고 싶은 거 불러. 저기 수환이는 일본 노래 부르네."
연수 선배도 딱히 최신노래만 부르는 건 아니었다. 다른 동아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는 옛날 노래는 손에 꼽을 수준이라는 거다. 나는 머뭇대다 중학교 때 들었던 노래를 선택했다. 하도 오랜만에 부르는 거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차례가 되고 열심히 가사를 따라가며 불렀다. 다행히 우리는 빠른 노래 진행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 점수도 없애고 반주 구간도 건너뛰었다. 그래서 내 점수가 나올 일이 없었다. 아마 봤다면 70점은 고사하고 60점대였을 텐데. 부끄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노래를 몇 번 더 부르자 부끄러움은 사라졌다. 뭐, 어때. 나만 즐거우면 되는 거지. 학창 시절에는 어두컴컴한 방과 눈이 부실 정도로 아픈 노래방이 별로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좋지도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노래방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학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들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 접했을 때는 그냥 시끄러운 소리였는데 동아리원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서 최신 노래와 옛날 명곡들을 듣고 오니 식사 시간마다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되었다. 흘러가는 많은 노래 중에서도 내 마음에 드는 노래가 생겼다. 올해 나온 신곡은 아니었지만, 역주행으로 노래방 차트 순위 안에 든 노래였다. 나는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손자병법을 읽는 대신 내가 학식당에서 들었던 노래를 찾았다.
"음음음~"
이어폰을 끼고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익혔다. 늘 그렇듯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였는데 가사는 모르겠고 곡이 참 듣기 좋았다. 최근에 유행하는 곡이라서 밑에 추천 동영상에도 노래방에서, 학식당에서 들었던 곡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다리를 꼬고 한참 동안 발을 까딱거리며 흥얼거렸다.
그 뒤로 동아리원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는 게 좋아졌다. 노래방의 알록달록한 불빛들은 내 눈을 테러하는 테러범이 아니었고 어두컴컴한 방은 노래에 집중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어두운 이유도 이제 알았다. 만약 밝았더라면 노래에 집중하기보다 사람들에게 집중했을 테니까.
"오, 윤서야. 요즘은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래 예약하네."
연수 선배는 내가 노래 예약하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수 선배의 밝은 웃음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요. 재밌네요."
나는 활짝 웃고 마이크를 잡았다. 어느새 내게도 애창곡이 생겼고 노래방에 올 때마다 늘 이 곡을 불렀다. 그래서 동아리 사람들은 이 곡이 나올 때면 내게 마이크를 넘겨줬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나는 목이 말라 탁자 위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많이 마셔서 그런 걸까,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잠시 자리를 떴다.
노래방 화장실은 역시 깨끗함과 거리가 멀었는데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 참으면 바지에 실례하게 될까 봐 더러움을 꾹 참고 볼일을 봤다. 내 차례는 아직 한참 남아서 나는 천천히 손을 씻고 돌아갔는데 어디가 우리 방인지 몰랐다. 나는 창문으로 흘깃흘깃 보면서 우리 동아리원 사람들을 찾았다.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유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면 유진이를 지나쳐가야 했다. 그래서 의자 끄트머리에 앉았는데 유진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과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노래를 사랑하고 가사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호수의 표면처럼 그의 눈도 빛나고 있었다. 노래가 절정에 이를 때는 그의 목소리도 절정에 이르렀고 나는 유진이 옆을 봤다. 민주는 유진이를 보기는커녕 노래방 책을 보며 부를 노래를 찾고 있었고 현철 선배는 그런 민주를 보고 손가락으로 예약 버튼을 눌렀다. 유진이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오로지 연수 선배뿐이었다.
"?"
연수 선배는 흐뭇하게 유진이를 봤고 나는 순간 굳어졌다. 아니, 유진이를 볼 수도 있지. 나라도 유진이의 반짝거리는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일 거야. 유진이와 연수 선배에 관한 생각은 이것으로 끝이 났는데 장수환이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윤서야, 노래 예약해."
그가 예약 기계를 건네줘서 뭘 부를지 고민하다 마음에 가는 발라드곡을 선택했다. 탁자 앞에 두고 유진이의 노래를 마저 들으려고 하니까 이미 마이크는 민주 손에 가 있었다.
'민주랑 있고 싶은데. 괜히 화장실 갔다.'
처음에는 장수환에게 흥미가 있었다. 일단 아는 것도 많고 내가 모르는 천문 분야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로 성운에 대해서라든지 보이저 2호에 대해서라든지 대화를 할 때는 좋았지만 어느 순간 일상 이야기로 넘어갔다. 장담하건대, 발단은 분명 장수환이었으리라. 나는 장수환의 일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