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외각 인적이 드문 카페에서 미령이 남 비서를 기다렸다. 집안에 일
이 생겨 잠시 외출을 다녀와야겠다고 하자 원길이 흔쾌히 승낙했다. 미령
이 초조하게 저쪽에서 걸어오는 남비서를 봤다. 남 비서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음료수는....?"
미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야돼.... 이 사람... 나보다 원길씨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몇 십년동안 원길씨를 지켜왔고 그가 하라면 뭐든지 할 사람이야...
침착하게 얘기하자... 미령이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남비서는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미령을 봤다.
"본이 아니게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집에 갔었습니다."
"그 아파트에 오셨다구요.....?"
"네. 회장님 심부름으로요."
원길씨가 날 의심하고 있어...
"회장님도 일찌감치 두 사람 관계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뭘? 뭘 안단 말이에요?"
미령이 흥분했다.
남비서는 미령의 반응이 크자 조금 당황했다.
"사촌오빠 아니잖습니까? 동거남이죠, 과거에 사귀었던......"
멍하니 남비서를 봤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은 그 사람과 아무 사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던데요..."
"그렇다면 회장님한테 똑바로 보고 하지, 왜 그러지 않았어요?"
"보고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회장님 지금 많이 힘드십니다."
미령도 익히 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누구보다 힘이 되줄 사람은 여사님 뿐입니다."
"............."
"회장님 곁에 있어주세요...."
남비서가 간곡히 부탁했다.
물결치듯 미령이 감동했다.
"고마워요. 남 실장님...."
"이게 회장님을 위한 길이니까요....."
예상과 달리 남 비서는 어떠한 폭언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이 원길을 위
할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남 비서가 몇 십년 헌신해왔는데도.... 유
일한 사람은 나 뿐이라고... 좋은 사람들한테 큰 죄를 짓고 있는 듯 싶었
다. 미령의 눈이 충혈되더니 눈물이 고였다.
원길이 아내의 과거 동거남을 만나기 위해 옷매무새를 고쳤다. 남비서가
도와주다 필터를 통해 소라가 밖으로 불러 나갔다. 원길이 의아해 문틈
사이로 소라와 남비서가 말다툼하는 소릴 들었다.
"회사에 관련된 어떠한 것도 소라씨는 손대지 마세요."
험상궂게 남비서가 쏘아봤다.
"나는... 회장님이 힘들어보이시니까.... 그랬던 거 뿐이에요...."
소라가 억울하다는 듯 울먹였다.
원길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남비서?"
"사이버수사대장한테 연락이 왔는데 소라씨가 회장님 외출중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 비서... 사실이야?"
소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좋은 데 외출하시는 것 같아서..... 방해 될까봐 그랬습니다."
"사이버수사대장이 뭐라 하지?"
"와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남 실장님한테 의견을 물어봤구
요..."
"이 비서... 난 지금 회사의 운명을 좌우 하는 위치에 있네. 이 비서의
실수에 그대로 무너질 수가 있어... 이 비서가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데... 예전 모습 같지 않아 당혹스럽군......"
"죄송합니다. 회장님...."
"남 비서, 수사대장한테 전화를 넣게...."
남비서가 차갑게 소라를 보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삼정그룹 회장실입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렸는데....."
"잠시만요...."
수화기를 원길에게 건넸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네. 회장님 말씀대로 홍콩 현지 법인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투자자문사
로 등록된 기업 가운데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서요. 등록된 사람은 외국
인이 맞는데.... 일 년전 죽은 사람이더군요...."
원길이 깜짝놀라 유심히 들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것 같습니다. 실체적인 인물이 동양 사람이라고... 또
한국 사람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수사가 더 진척되야 자세한 건
알 수 있을 거 같네요... "
"예... 감사합니다."
원길은 둔탁한 것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히 앉았다. 남비서가 다그치듯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날 아는....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 아냐...
삼정그룹을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단순하게 생각해... 하지만 혼란스
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