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은 계단에 낚시 도구를 대강 정리해 두고 지하 작업실의 불을 켰다. 예준은 10평 남짓한 공간을 작업실 겸 자취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구라고는 간이침대와 작은 싱크대가 전부였다. 벽면에는 예준이 그린 그림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로봇의 머리와 여인의 몸을 한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친근하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했다.
예준은 앙증맞게 생긴 mp3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달그락 거리는 낡은 환풍기 소리가 음악에 묻혔다. 예준이 물이 반쯤 든 2L 생수통을 찾아 양은 냄비에 붓고 버너의 불을 켜는 동안 병수는 대양낚시에서 사 온 라면 두 개를 몇 번 쪼개어 옆에 놓았다.
“야! 아직 생각 안 해 봤어?”
“뭘?”
“얘 말이야.”
“됐어.”
“딱 내 스타일인데.”
“어휴, 저 미친 놈.”
병수는 커다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누워있는 여자의 그림 앞에 걸어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며 볼썽사나운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 시집보내라니까.”
“맨 날 그 짓 하고 있을 건데 너 같으면 시집 보내겠냐?”
“돈은 나중에 성공하면 두둑하게 줄 테니까 나한테 넘겨. 오! 예쓰! 예쓰!”
병수는 이상한 신음까지 뱉어가며 더 과하게 몸을 흔들어댔다.
“야! 야! 그만 좀 해. 신성한 예술 작품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부정 탄다. 진짜.”
“이제 그림 놔둘 데도 없구먼. 어차피 팔리지도 않잖아. 올랭인지 올챙인지 이거 나 주라.”
마네의 올랭피아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라고 예준이 몇 번이나 알려줬는데도 병수는 늘 마음대로 작품 이름을 불렀다.
“맨 날 지하실에 앉아서 그리기만 하면 누가 알아 주냐? 나 같은 고객이 왔을 때 딱 넘겨야지.”
“적당히 하고 이리 와서 라면이나 먹어. 냄비 채로 먹으면 되겠지?”
“어. 그러자.”
예준은 버너의 불씨를 아주 작게 조정한 후 종이컵에 소주를 채웠다. 둘은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비웠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냄비는 금 새 바닥을 드러냈다.
“공모전은 아예 접었냐?”
“그렇지 뭐.”
“하기야, 나도 이제 지친다. 맨 날 상 받는 사람들 들러리나 서는 것 같고.”
“우리만 그러겠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만 상 받는 거지 뭐. 블로그나 열심히 해. 병수 너는 글 쓰는 재주 있으니 그걸로 대박 날지도 모르잖아.”
“그것도 끝났어. 요즘 누가 글 읽냐. 전부 유튜브에 다 몰리지. 얼굴 다 까발려야 돼. 엄청 잘생기든가, 엄청 똑똑해야 돈 벌지. 그것도 아니면 완전 미친 지랄을 하든가.”
“왜? 너 잘하잖아. 내가 그림 빌려줄 테니까 그 앞에서 변태 짓 하면 되겠네. 하하하!”
“미쳤냐? 내가 남들 앞에서 그 짓할 정도로 또라이로 보이냐?”
“아- 정상이었구나.”
“암튼 쉬운 게 없다. 정말. 맨 날 남들 성공하는 것만 쳐다보고 사는 것 같아. 진짜 이생망이다. 이생망.”
“그래도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너는 박람회 같은데 안 나가냐? 그림도 이제 많잖아.”
“그런데 뭣 하러 나가. 돈만 깨지지.”
“야! 골방에서 백날 천날 그림만 그린다고 누가 알아 주냐? 홀딱 벗고, 그림 들고 광화문 광장이라도 뛰어 다녀야 알지.”
“그런다고 예술도 모르는 사람들이 관심 가질 것 같아? 두고 봐. 왓슨 갤러리에서 연락만 오면 한 방에 끝나.”
“왓슨?”
예준은 영국의 왓슨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자신의 작품을 응모해 오고 있었다. 왓슨은 영국에서 공연기획으로 엄청난 돈을 번 억만장자인데 자신의 부를 활용하여 세계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아트 컬렉터가 되었다. 왓슨은 특이한 예술혼을 가진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사 모으는 것으로 유명했다. 왓슨이 그림을 구매했다는 소문만 돌면 그 화가는 현대미술의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고, 점당 수억에서 수십억 원에 작품이 팔려 나갔다. 왓슨 갤러리에서는 학력이나 경력 제한 없이 전 세계 누구든지 1인당 5작품까지 온라인에 게시하여 심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 자체만 공정하게 평가하는 시스템이었다.
예준이 공모전 출품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왓슨의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금수저로 태어나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혈혈단신 공모전에 입상하여 영향력 있는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왠지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이 방해를 할 것만 같았다. 국내에서 학벌이나 인맥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에게는 한번 가보지도 못한 나라의 왓슨 눈에 띄는 것이 훨씬 실현가능한 일 같았다. 왓슨으로부터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지만 예준은 자신의 그림을 꾸준히 업데이트 하며 왓슨을 만날 날을 고대했다. 왓슨은 막막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아이고 모르겠다. 나는 미키씨나 보러 갈란다.”
“미키?”
“미키 몰라?”
“미키, 마우스?”
“아, 진짜. 감 떨어진 애하고 같이 못 놀겠네. 좀 찾아봐라. 아! 오늘은 꼭 소원당첨 되면 좋겠다. 나, 간다.”
“어.”